왜관 : 조선은 왜 일본사람들을 가두었을까?

다시로가즈이지음

정성일옮김

왜관.일본인이모여살던부산의한지역으로서이책은1687년(숙종4년)부산포의초량에설치되어2백년에걸쳐존속한초량왜관에대한이야기이다.이장소는현재부산용두산공원일대에해당하는곳이다.

일본인거주지가처음생긴것은15세기초엽으로조선을방문한일본인을응접하기위해설치되어운영되었으며일본인이외국으로나가서교류를한것은조선이유일하다고한다.왜관은조선의쌀,인삼등을무역하는창구역할을하였으며일본바쿠후의권한을위임받아대마도주가관리하며일본에서는대금을은으로지불하고있다.당시일본에서는조선인삼의인기가매우높아이를구하기가쉽지않았으며때로는정부관리조차도밀무역을할만치매우높은수익을주는물품으로요즘이야인삼재배가흔하지만당시는모두야생인산삼이무역의대상이었다한다.이로인해일본에서는이를일본국내에서도재배하기위해노력하는내용도포함되어있다.

왜관은약10만평의면적에4백내지5백명정도의일본인이거주하였으며모두남자만거주하는관계로가끔조선여자와의통정문제도발생한다.왜관거주자들의아침식사준비용으로왜관밖에장이서는데여자문제로인해물건을파는사람들도젊은여자들은팔지못하도록막고있다.또한호랑이가왜관으로뛰어들어두마리를잡는이야기가나오는데잡아서호랑이고기를맛보았다는내용도있다.당시조선과일본의식생활을비교한곳에서는조선의김치가오늘날처럼고춧가루를사용하지않은것으로주로소금에절여먹은것으로되어있으며김치를담그는야채도배추라든가오이가아니라무,파,미나리등으로되어있다.고추가근세초기일본을통해서조선에전해진것으로알려져있는데이당시는고추가많이사용되지않아서인지주로소금으로간을하고향신료로서는생강이나산초를많이사용하였다.

중세까지는가족을동반한불법거주자들이있었으나이로인해장기거주가문제가되자대마도에서는왜관거주자들에게아내나딸등여자를데리고오는것은허용하지않는다.책에서언급한왜관의문제로밀무역이나등이없는것은아니었지만장기간운영된것으로보아조선과일본모두이를유지하기위해서로노력을많이한것으로보인다.

책의마지막6장의제목은‘조선을조사하다’이다.조사하게된동기는‘동의보감’으로쇼군인요시무네가동의보감를접하고서는이책에나오는조선의동식물의조사를명하자왜관을중심으로상당기간조사한것으로되어있다.

이책을빌린지는한달이훨씬넘었다.지난달중순인가일본방문을앞두고도서관에서요코하마에대한책을찾아보던중눈에띈책이다.사실책의원래제목보다부제(조선은왜일본사람들을가두었을까?)가호기심을자극하였는데책을읽어보니전혀상관없는것은아니나약간은상술이섞인것이아닌가하는느낌도들었다.일본에서발간된책의원제목은<왜관:쇄국시대일본인마을>이다.

책을읽기시작한이후로회의및학회참석준비등으로시간여유가없어읽는것이늦어졌지만진도가잘안나가는내용인탓도크다.제목의부제처럼흥미위주라기보다차분하게당시의상황등을역사적인사실기술하듯이되어있어저녁늦게읽다보면몇장못넘기고는졸곤하였다.

그러나책내용전체적으로는당시의조선과일본과의관계,그리고일본인들의삶뿐만아니라왜관을둘러싼조선과조선인의삶도일부알수있는자료들이많이있다.당시왜관의담당자는매일매일의일과를일지형식으로자세히적어놓아많은사료를남기고있으며이를바탕으로사실을충실히전달하려는표현들로인해과거조선의삶에대한궁금증이없는사람은끝까지읽기가쉽지않으리라보인다.조선말기조선을여행한외국인들의기행문을몇권읽어본터라그보다약200년전의조선상황을알수있다는사실이중간중간책내용이지루하기는하지만끝까지읽는힘을준다.

저자는가능하면객관적인시각으로내용을기술하려고노력한흔적이곳곳에배어있다.한국에서출판될것을알고그랬는지는모르나조선에관한내용을기술하면서도개인적인감정을전혀드러내지않고있다.전문가적이면서도,가능하면풀어설명하고,또기록을남긴다는생각이들어있는책으로보았다.조선시대,그리고그당시에살던조선인에대해궁금하게생각한다면재미있게읽을수있을것이라고생각한다.

책의내용중에서

조선의향응요리는역시나일본요리하고는취향을달리한다.양자의최대차이점은소,돼지와같은짐승의생고기를음식재료로사용하느냐그렇지않느냐에있다.그당시에도멧돼지라든가사슴고기를먹는일본인은있었다.그렇지만일반적으로짐승의고기는‘발이네개’라고하여기피의대상이되었다.더군다나손님앞에차려놓는요리에는절대사용하지않고있었다.221쪽중에서

조선에서는독한소주를사람들이많이마시고있습니다.그렇지만늘육식을하기때문에비장이나위상태가튼튼한것같습니다.그때문일까요?남자든여자든목청이높은데,보통대화를할때도마치싸움을하고있는것처럼들립니다.특히여성의목소리는하늘을찌르듯이날카롭답니다.술을잘마시는여자분들이위아래로많이계시는모양이지요?

조선어통역관으로유명한오다이쿠고로의표현으로223쪽중에서

계해약조(1683년숙종9년,조선정부가왜관주민을상대로하여공포한규율조항)

1,경계구역밖으로나가지말것.어기면사형.

2,‘피집은(被執銀,밀무역자금)’을받는자는쌍방이사형.

3,사무역이이루어지고있을때각방(왜관안의방)안으로몰래들어가서밀무역을일삼는자는사형.

4,오일차잡물(조선으로부터의지급품)이왜관으로반입될때,일본인은조선의하급관리들을구타하지말것,이를어긴쌍방의죄인은왜관의관문에서처형.

신묘약조(1711년숙종37,조선여성과의교간과관련하여공포)

1,대마도의사람이왜관을뛰쳐나가여성을강간하면사형.

2,여성을유인해내서화간하는자,혹은강간미수에그친자는유배.

3,왜관으로들어간여성을보고서도통보하지않고교간한자는그이외의죄를적용.184-185쪽중에서

죄의경중에관계없이사형이많은것이특이하다.이러한것으로보아왜관의필요성은조선보다일본이더필요했던모양이다.또한당시조선인들은장황하게험악한말을퍼부으면서말로상대방을제압하려고하는데도좀처럼손을들지않는데비해일본인은걸핏하면때려4항이포함되었다한다.

왜관의설치는임진왜란전에도있었지만왜란으로폐쇄되며서울에있던왜관도전란으로소실된다.1598년히데요시의사망과함께정유재란(1597년정유년에재차침범한것)이끝나면서임시로부산포앞바다에있는절영도라는섬에임시왜관이설치된다.그후로대마도는관계를다시회복하기위해노력하여1607년정식으로통신사가일본을방문하며1608년초두모포왜관(구왜관)이신설된다.임진왜란과정유재란끝난지10년만에다시관계를회복했다는것이다소의외이다.일본으로서는관계회복을위해왜란때잡아간사람들을돌려보내는등의조치를취하기는하였지만책의내용으로보아왜관의설치는조선보다는일본이더필요한사항으로보인다.그러나조선으로서도남해안의왜구를해결하는한방편으로정식적인관계를일부용인하는것이아닌가하는생각이든다.옛날부터도지리적여건상일본과는보기싫더라도다시봐야하는관계인가보다.

2006년4월23일정리

Leave a Reply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