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민의 탄생

인민의탄생

송호근지음

왜이책을읽게되었는지기억이나지않는다.다른책과마찬가지로신문에서소개한것을보았을것이다.제목이그리매력적이지도않은이책을읽은것은2006년에읽은[한국의평등주의,그마음의습관,송호근지음]때문이다.지금은내용이가물가물하지만당시이책을읽고는저자를기억하고있다.마음에와닿는책을읽었을때의기쁨,평소궁금했던내용에대한답을들었을때의시원함.그런책이었다.

우리나라의역사중평소궁금하게생각한것이조선과현대의단절이다.왕조는궁궐만남긴채사라져버렸다.가끔이씨왕조자손이라고소개되는것을본적이있지만그저남의일이다.조선시대가일제의합병으로망하기는했지만해방후사회적으로왕조에대한토의가있었다는이야기를들어본적이없다.긴세월이기는하지만조선말기를살았던사람들이꽤생존했던해방후에왜조선은역사적인일로만남았을까?치욕적인합병이라는결과로끝난왕조와의연계성을의도적으로무시한결과는아닐까?그러면서도우리는조선왕조의능을유네스코에문화유산으로등재하였다.

이책은우리가애써조선과의연속성을무시한것에대한대답을주지는않는다.하지만조선왕조의백성이근대의인민으로어떻게바뀌어가는가를다양한방향에서조명하고있다.이또한궁금했던내용이다.조선왕조의강력한신분제도와통치제도에서인민이근대의인민으로바뀌어가는과정이매우더디고,제한적일수밖에없었을것이다.조선왕조가임진왜란과병자호란을겪으면서도500년을유지했다는것을자랑스럽게이야기하지만이로인해결국근대로의이행이늦어진것도사실이다.유지하는것만이능사가아니라발전적이어야한다는것을알려준다.

이책을읽으면서뒤늦게인문서적을읽는것이쉽지않다는것을느낀다.용어도생소한것이많고,내용이잘이해되지않는점도있지만매우흥미로운내용을담고있다.교양과목으로선택한강의를듣는느낌으로이책을읽었다.이책과연관된책이[시민의탄생,송호근지음]이라는소개를본적이있어이책도빌려다놓았다.[인민의탄생]을덮으면서[시민의탄생]을펼쳐보니다른책이아니고[인민의탄생]제2권이다.읽으려면또고생스럽겠다는생각이든다.그렇지만읽어볼것이다.우리의근대에대해관심이있다면읽어볼것을추천한다.

이책을비평할능력은되지않아책내용중일부를길게소개한다.

책내용중에서

외국학자들이의아해하는한국의높은교육열은어떻게설명하나?그것이경제발전의동력이었기에높은교육열의수원지가무엇인지궁금한것이다.외국의눈으로보면,자녀에의투자는비합리적이다.그런데한국인들은모든것을자녀에게투자한다.왜?그답도역사에묻혀있다.오랜세월동안한국인의습속으로정착되어왔고,그것이비합리적이라는각성에도불구하고현대사회로연장되었다.조선은세계최고의지식국가였다!는사실을이해해야그궁금중이풀린다.지식사회에서지식은권력이었고,가문의영광이었던것이다.<책머리에,18-19쪽중에서>

1970년대세대가자부심을갖고행했던과거와의단절,못난아비죽이기의대가는혹독했다.어릴적입양되었다가성인이되어고국에돌아온입양아의당혹감이그런것일까?낯설기짝이없는산천이뭔가부모의체취를풍기고있음을알아차려야하는곤혹스러움과마주해야했다.부모의채취를어떻게잡아내고어떻게이해해야하는가?나의몸과마음,나의가족과사회에서도그체취가풍겨난다면어떻게해야하는가?여기에고은시인의말이적절할것같다.“우리자신의심신속지층에도저광막한선사시대와그선사의작은단층인역사시대의여러내력들이켜켜이압축되어있지.나는내조상의무한(無限)이지.”역사의내력들이나를통해새로이현현되고,나를통해미래로뻗어나간다.그렇다면필자는,‘이단의자식’은일찍이아버지를죽였지만다시아버지를찾아야하는이율배반적상황에직면한것이다.어쨌든돌파구를만들어야했다.그것이인류학적아버지든,사상적아버지든,현대적지식으로무장한천애의고아에겐아버지가절실했다.나의기원,1970년대세대의기원,그리고20세기한국의기원이어디에서비롯되었는지를알아야했다.우선가장가까운근대,개화기로부터그기원에의탐색여행을출발하기로했다.<책머리에,19쪽중에서>

도대체조선의인민은어떤통치구조를통과했는가?이질문이‘근대에이르는과정’에해당한다.조선은세계에서흔치않을만큼통치구조가단단한국가였다.중국과일본을이웃하고외침을수차례받으면서500년을지속할수있었던비밀이그속에있다.조선은기본적으로‘지식국가’였다.성리학을유일한국가학문으로설정하고모든것을성리학적논리체계로구축했다.성리학은종교이자통치이념이기도했다.그러므로지식은종교이고,종교는정치였다.지식,종교,정치간선순환구조를사대부가관할했다.왕권은선순환사이클을상징하는최고의권력이었지만,항상지식권력을장악했던사대부세력의감시와견제를받아야했다.사대부는성리학의도통(道統)을책임졌고,왕족과귀족은권력의합리성과정당성인왕통(王統)을책임졌다.일종의분리통치구조였지만,도통과왕통은성리학의가장높은명제인도덕정치라는큰틀속에서일치했다.도덕정치에서는도통과왕통의위계가인정되지않는다.천리(천리),천도(천도)와의일치라는유교정치에서왕과사대부는분업관계에놓여있다.인민은도통과왕통의분업체계를완성하는또하나의객체이다.민유방본은분업체계의도덕성을보완하고뒷받침하는가치체계일뿐실제로민유방본이본격적으로실현된것은아니다.지식,종교,정치가삼위일체를이뤘다는뜻에서이슬람의칼리프체제만큼정종일치(정종일치)의정도가높은사회가조선이었다.그런데,칼리프체제가부족으로갈라진사회였던데에비해,조선은지식,종교,정치의삼위일체를강력한관료제적통제로구축했으며,학문적일체감으로뭉친사대부계급이그관료제를완전히장악했다는점에서칼리프체제와비교할수없을정도로단단하다.지식,종교,정치를삼위일체로묻어주는것은궁극적진리의근원이자그자체종교인‘하늘의이치’에의믿음이다.이런유교국가에서왕은대사제,사대부는중사제,민호의가부장은소사제였다.비숍여사가조선에입국했을때500년도읍에종교시설이하나도없다는것에놀랐는데,사실은왕궁을비롯한십만민가가모두하늘을섬기는종교시설이었다는점을이해하기에오랜시간이걸렸다.<서론:인민,담론장,그리고근대33-34쪽중에서>

유교는내세관이없는현세종교였다.죽음을부르는천재지변과전염병앞에서속수무책이었던조선인민들은정부가그토록탄압해마지않았던불교와주술신앙을그들의내면세계로암암리에불러들였다.언더우드부부,비숍,그리고당시조선을여행했던많은선교사와저널리스트들이흥리롭게목격했던것은남루한집안에곱게모셔둔귀신단자.콜레라가번지마을입구에거리고양이그림,무엇보다칼과요령을흔들며작두위에서광란의춤을추는무당들과밤새도록쿵쾅거려잠을설치게하는굿판이었다.그런가운데,18세기말에유입된천주교는조선인민의비어있는내세관으로진격해들어갔고,급기야는유교가궁극적진리의발원자로서섬겨마지않은천리(天理)를‘하늘의주인(天主)으로대치시켜다.정신과마음의최종주체로서유교적천리가천주교의천주로바뀌자수많은개종자들이속출했던것이다.<서론:인민,담론장,그리고근대,36쪽중에서>

개화기초기에왕과조정이갖고있었던적자로서의인민개념은갑오개혁이단행된1894년경에이르러‘통치객체로서의인민(인민,subject)에서’자유와통의(통의)를갖춘인민(인민,people)’으로서서히전환되기는한다.일찍이일본과미국에유학했고,세계일주여행을통해당시의문물을직접목격했던유길준(유길준,1856-1914)같은개명지식인의영향이컸다.그러나그것도개화파관료와일부지식층에한정된변화였을뿐,향촌지배세력이나관리층전반에걸쳐일어나변화는아니었다.국가기구의전면적재편을초래했던갑오개혁때에도그여파가조정에국한된것이었을뿐,지방의관료기구는중앙정치의개혁과는완전히단절되어있었다.쇠락해가는지방관아에는갑오개혁과같은개혁의손길이전혀미치지못했으며소령과아전들은수백년동안전수된그교묘한방식을동원하여지방민들의수탈에열을올리고있었다는게비숍여사의고발성관찰이다.

명백한절망으로죄어진계급들의무관심,타성,냉담,생기없음의마비상태로가라앉아있다는것은놀랍지않다.개혁에도불구하고한국은아직도단지두계급,약탈자와피약탈자로구성되어있다.면허받는흡혈귀인양반계급으로부터끊임없이보충되는관료계급,그리고인구의나머지80퍼센트인,문자그대로의‘하층민’인평민계급이그것이다.후자의존재이유는피를빨아먹는흡혈귀에게피를공급하는것이다.<개화기인민,67쪽중에서>

조선의통치계급이애써외면했던이새로운인민의맹아는18,19세기에걸쳐세가지통로를통해형성되고진화한것으로보인다.천주교,민란과농민전쟁,서민문예(庶民文藝)가그것이다.18세기말에유입된천주교는군주와인민의차이,사농공상의신분차별을모두천주와신자간의관계로대치하고인민과백성을천주(신)와구분하여모두‘사람’(혹은인간)으로표현함으로써유교적세계관에평등의식을확산시켰다.평등개념까지아닐지라도민란과농민전쟁은착취와수탈로생존을위협하는지배계급에대해인민이저항권을갖고있음을유교적세계관의요체인도덕정치의관점에서정당화하는데에기여했다.한편,서민문예는양반층이즐겼던문학과예술에대비되는평민문학과예술을지칭하는데,양반문화의하층지향적확산이라는의미도있으나서민의식을형상화하고신분차별을약화시키는데에기여했다는점에서인민개념에새로운지평을열어주었다.<인민의진화,79쪽중에서>

시기는다르지만,천주교의유입과확산,민란과농민전쟁,서민문예의출현과확대가인민의변신과질적변화를촉진했던추동력이었음은앞에서살펴본바다.이세가지추동력은한가지공통요인을포함하고있었다.글을읽고쓰는능력,특히조선의공식문자인한자가아니라국문해독능력을갖춘이른바문해인민(文解人民,literatepeople)이그것이다.문해인민,언문을읽고쓸줄아는인민,이들이이연구에서주목하고자하는변동의주체이자추동력이다.조선사회에서국문은주로상층여성과하층남녀의문자였다.–중략–언문독해능력을갖춘문해인민의존재가중요해지는이유는조선의정통이념에대한긍정적혹은이단적시선을언문소설,교리서,통문(통문)등을통해습득할수있는가능성때문이다.생각을문자로표현할수있는수단이마련된다는것은의사소통의장(sphereofcommunication)이형성되는것을의미한다.의사소통의장은개인적삶의울타리를넘어자신의생각과정서를타인과공유하게만든다.<인민의진화,91쪽중에서>

유교적통치질서의핵심은신분에따른속박이다.그러므로향촌민이든도시민이든특정신분에구속된개인이‘신분적속박’을벗어나비교적자유로운‘계약적질서’로이전했는가의문제를따져야한다.종종변란을일으킬만큼저항의식이투철했다고해도,인간관계가여전히신분적속박에머물러있다면그것은근세를벗어난새로운인민이아니다.새로운인민을입증할수있는기준은두가지다.하나는종래의신분적질서를깨고계약적질서라나타났는가의문제이고,다른하나는계약적질서로진입한인민대중이혈연,지연,학연이라는전통적연대의경계를넘어공적이익(peopleinterest)을추구하는어떤결사체를결성하고있는가의문제다.‘기계적연대’에서‘유기적연대’로,게마인샤프트(Gemeinschaft,공통사회)에서게젤샤프트(Gesellschaft,이익사회)로의전환을강조하는서양고전사회학자들의변동론은바로봉건제적신분질서로부터계약질서로의이행에초점을두었으며,이런관점은동서양을막론하고근대의도래를판단하는공통적분석도구임에는틀림없다.<근대인민의형성과분화,98-99쪽중에서>

언문사용이일반화되기까지는창제이후450년이소요되어야했지만,인민들은비공식적방법을통하여언문을익혔고사적영역과공적영역에서제한적으로언문을사용했다.비록언문을사용할줄아는인민이지극히낮은비율이었을지라도,언문사용은한자로구축된‘문치(文治)’의내벽을허물고인민을위한권력적교두보를설치하는기능을수행해왔다는사실을일단지적해두는것이중요하다.언문이새로운인식체계를만들어낼수있다는사실을조선의지배계급은전혀눈치챌수없었다.언문은지배언어인한자의훈독과음독을위한발음기호였기에우선은보편어질서로의포섭을목적으로하였지만,언=문이창출하는새로운세계에는지배이데올로기의정당성을의심하고유교국가의억압적본질을간파하게하는대안적,저항적인식이싹틀토양이존재했다.정음창제이후불과40년뒤인성종21년(1490)에벌써언문을번역한소장(소장)이관아에접수되는사건이발생할정도였고,중종때는불교의윤회설을소설형태로쓴작품이언문으로번역되어세간에유통되기도했다.서헌부에서채수(채수)가쓴[설공찬전(설공찬전)]이민중을현혹할위험이있다고판단할만큼언문소설은인민의심리와인식구조에직접적인충격을몰고왔던것이다.<인민의초상:민족과근대만들기,135-136쪽중에서>

동일한유교문명권이라도식자층의사회적위치는달랐다.일본과베트남에서지식인은통치계급에속해있기는했지만왕족과귀족을보좌하는관료이거나종속적인지위에머물렀다.일본에서는지배집단인무사계급을주로보좌하였고,베트남에서는왕족과귀족바로밑층에있거나더러는과거를통해고위직까지올라갔다.반면,조선의지식인은통치계급이었다는점이두드러진다.조선의지식인은사대부이자고위관료로서통치이념을생산하고사회의규율을바로잡아야하는중책을맡고있었던반면,일본의식자층은그런통치의무를무사계급에게맡긴채비교적자유로웠다.베트남역시사대부가존재했으나조선만큼통치의무를무겁게진것은아니었다.조선은사대부의나라였고지식인의나라였다.나오면사(士)요,들어가면대부(大夫)인사대부는그자체지식인이었으며문(文)을통해통치이념을세워나갔다.왕과귀족들도사대부의논리를수용해서정치를행하지않으면안될만큼사대부의정치이론과철학은통치의근간이었던것이다.<지식인과문해인민:조선,일본,베트남비교,148쪽중에서>

문의철학,즉문학관을둘러싸고일어난사대부들간의논쟁이권력투쟁으로비화하는현상은일본과베트남에서는결코볼수없는조선만의배타적특징일것이다.문은정치였고철학이었으며수기정심의구현체였기때문이다.이런점에서조선은유별난‘문의사회’였다.건국초기부터사대부들은문학의‘가야할바’와‘지향할바’를두고치열한논쟁을벌일정도였다.문학이무엇이어여야하는가는곧유학의정통론을찾는과정이었다.송학을받아들인일본에서는정통론이무엇인가를두고논쟁이일어나지않았다.–중략–조선은문과도덕(도덕,주자학)과통치가일체를이루는문학관이무엇인가를두고충돌했다.이른바훈척(훈척)세력을중심으로한사장(사장)문학과사림(사림)세력을중심으로한재도(재도)문학간의대립이그것이다.훈척세력은개국과정에서권력과부를독점한개국공신들,왕의인척들,고관귀족들로서수기보다는치인(치인)과외교(외교)에치중해서문장과수사를문학의본질로보았던반면,권력에서소외된지방의중소지주인사람파는내면수양을통한도(도)의정립을문학의정도로생각했다.사림파에게는도덕과윤리에의한문의창달이지배권력에대한비판의칼날이었던셈이다.<지식인과문해인민:조선,일본,베트남비교,158쪽중에서>

교육과관련하여반드시조명되어야할사안은서당의역할변화이다.향촌서당은17세기에들어향교의쇠퇴와는역으로전국에확대되었는데,강습을맡은훈장들이유랑지식인이거나빈곤한유생들이었기에체제에대체로비판적입장을견지하였다는점,그리하여후기에는촌락민들의토론장이되거나민란이나변고가발생했을때서민적대안을모색하는역할을했다는점이다.이런성격이향촌의계조직인동계,학계,송계,민회와역할중첩이일어나19세기‘민란의시대’에서민담론을만들어내는장소로자주활용되었다.서당은평민자제가언문을깨우치고기초소양을배양하는장소였으며,서민간의견교환을할수있는의사소통의장소였다.양반에게서원이있었다면,서민에게는서당이있었다.<조선의통치질서와국문담론,218쪽중에서>

종교적담론,문예적담론,정치적담론은지배담론과각축을하면서조선사회통치질서를이루는세계의축을내부부터서서히무너뜨렸다.정조이후순조대부터붕괴의속도는매우빨라졌으며,그만큼국가는내외부의변화에대응할수없는경직성의공간으로진입해들어갔던것이다.동학은정치,종교,문예담론이결집하면서폭발한최대의도전이었다.문해인민의관점에서보자면,동학은정치,종교,문예담론에서발전시킨언문의사회적상상이창출한변동의종합적기폭제였다고할수있다.동학은‘언문담론장’을‘평민담론장’으로확대발전시키는중대한계기였다.그러나그시도는조정의정치세력에의해좌초되면서다시지식인공론장(개화관료,유생,상업부호들)의부활로연결되었다.개화기에출현한지식인은전통적사대부와는질적으로다른집단이었다.이새로운세력에의해인민은신민,국민,동포,민족등낯선개념으로분화되었다.지식인들중평민공론장의중요성을깨달았던최초의사람은유길준(유길준)일것이다.‘개화기근대성’이라는개념이가능하다면,바로이평민공론장의형성과그에따는‘인민의탄생’에서찾아야할합리적근거가여기에있다.<조선의통치질서와국문담론,220쪽중에서>

서양열국들이산업혁명과정치혁명을통해근대라고불리는새로운시대를활짝열어젖혔던19세기에,바다를봉쇄한채중국으로난작은문만열어두었던조선은천주교라는매우낯선문물과조우했다.그것은신기하고낯설어서지적호기심을자극하기에충분했는데그호기심속에는조선사회를붕괴할만한위험천만한힘이숨어있다는사실을처음에는사대부들도인민들도인식하지못했다.17세기와18세기말까지부경사행원(赴京使行員)들이중국에서반입했던한역서학서(漢譯西學書)들은단지새로운서양학문으로간주되어조선의학자들사이에서널리읽혔으며규장각도서목록에차곡차곡정리될정도로신문물의한조각쯤으로여겨지던것이당시의사정이었다.그러던것이최초의세계자인이승훈이명례동소재김범우(金範禹)의집에서주재한일종의교리연구모임이우연히발각되어결국포도청추국으로이어진을사추조적발사건(1785년)을계기로조정의주목을받기시작했다.그때까지만해도조정은중인김범우만유배형에처하고양반들은가벼운경고로봉합했을정도로천주교의존재감을별로느끼지못했다.그러던것이진산사건으로유발된신해박해(1791년)와정조승하이후노론세력의남인탄압결과로빚어진신유박해(1801년)를계기로조선은안개처럼퍼지는천주교와의피비린내나는싸움,그러나결국패배를자인할수밖에없었던헛된싸움으로기력을소진해야했다.그런의미에서조선은미약한천주교와의사소한투쟁으로19세기를시작했고,싹을잘라도끊임없이돋아나는천주교와의전면전으로19세기를보냈으며,피로얼룩진천주교의장엄한종소리가서울한복판에울려퍼지는가운데19세기를마감했다.<종교담론장:유교의균열,224쪽중에서>

천주고의출현과확산이던진충격은세가지로요약된다.

첫째,정교일치를근본으로하는유교의사회적구성원리에틈을만들었다는사실이다.천주교는정교분리를원칙으로정치불개입과종교선택의개인적자유를지향한다.정교일치와정교분리는병존할수없는대립적논리로서종교의의례화를통치의중심축으로구축했던조선사회에는치명적결과를초래할수밖에없었다.왕은대사제,사대부는중사제,가장은소사제로서의위계적의미를무너뜨릴뿐만아니라,그위에만물을주재하는천주를상정함으로써왕-사대부-평민의종적관계를천주를중심으로한개별적관계로바꿀위험을안고있었다.

둘째,그렇다면조선사회를떠받치고있던통치의삼중구조중가장핵심적인것,즉유교의의례화와그것을위한각종기제들이정당성을상실한다는사실이다.왕이지내는종묘와사직단의제례의식이형해화되고,문중과가족에서는봉제사와조상숭배가무너지고,향촌에서는향사례와향음주례,또는사원의기능이약화되는것을뜻한다.명시적인것은아니었더라도,천주교는조선사회를지탱하던통치기제의중심축을공격했던것이다.

셋째,신분체계와수분공역을근간으로한유교사회의수직적질서가천주앞에서는만인이평등하다는수평적질서로바뀐다는사실이다.천주를흠숭하는데에는반상(반상),양천(양천),남녀의차별이없으며,사대부와중서,천민을포함하여모든생명은사람으로통칭되었다.말하자면,‘적자로서의인민’이라는특수개념이보통명사인‘사람’으로바뀌는것이다.천주교가유입된초기단계부터양반신자들은일반평민과천민들의개종을위해천주교의이런평등의심을모범적으로실천하고자하였다.정약종이저술한최초의한글성경교리서인[주교요지],이가환(이가환,1742-1801년)이한글로번역한[성경직해(聖經直解)]등초기교리서에‘인민’,‘백성’이‘사람’,‘인간’개념으로대체되어있는것은놀라운사실이다.<종교담론장:유교의균열,233쪽중에서>

세태가사로불리는언문노래가그러하다.17-18세기에세태가사가국문으로창작되어일반백성들에게확산되었는데,시골유생이지었다는[향산별곡(香山別曲)]이그런것들중의하나이다.

늙은놈은거사되고젊은놈은중이되고

그도저도못된놈은헌누더기짊어지고

계집자식앞세우고유리사방개걸타가

늙은이와어린것은구학송장절로되고

장정들은살아나서목숨도모하려하고

당적으면서절구투,당많으면명화적에

이일은뉘탓이랴제죄뿐도아니로다.

재지사족과관원들의수탈에약한이들은송장이되고,장정들은도적이되는당시의사정을언문으로표현했는데,마음속에고이는비분강개를퍼내는언문문자속에는‘권위의부정’이이미단단하게내재화되어있다.이가사가항간에퍼져스스럼없이노래로불려질때‘권위의부정’이라는극단적비판의식은작변이나반란이함축한특수한개념을벗어나평상적개념으로일상화한다.비판과고발을주요테마로하는세태가사들은19세기민란기에농민의처지를형상화하고농민저항을독려하는가사나노래로진화했으며,때로는한글격문과방문으로나타나기도했다.언문이형상화한‘권위의부정’이유교에대한종교적사상적언어로현실화된것이동학이고,투쟁적조직행동으로발현된것이동학농민전쟁이었다.<문예담론장:언문의사회적상상,314-315쪽중에서>

무엇보다주체의식의리허설을경험한인민들을공중으로만드는데에는시장과교통의발달이필수적이다.시장은가격기제를통해상품교환과정보교환을촉진하며,교통망은멀리떨어진지역들과주민들을연결하고시장교환을가능하게만드는하부구조다.그래서시장과교통망은서로뗄수없는공론장의핵심요건인것이다.그러나조선사회만큼이두개의필수요건을갖추지못한사회를찾아보기힘들다.달리말하면,조선사회만큼이두개의요건이발달하지못하도록억제책을강력하게실행했던사회를찾아보기힘들다.박지원이[열하일기(熱河日記)]에서청의대중교통수단인태평차의도입을강력히권했지만조정대신들은그만한수레가다닐길이없다는것을들어반대했다.박지원은태평차를도입하면저절로길이닦일것이라고반박했으나허사였다.1780년후반의일이었다.서울의관문이었던제물포까지우마차가통행할만한길이닦인것은갑오개혁이후외국회사가조선에진출한때의일이었다.<문예담론장:언문의사회적상상,324-325쪽중에서>

19세기초반순조연간에지식-권력의분리가본격적으로시동을걸었던이유는바로노론세력에의해장악된세도정치때문이다.세도정치는지식과권력의선순환과정을끝장낸권력독점으로서,어느국가,어느시대를막론하고나타날수있는일반적정치현상이것이다.이일반적현상이조선에가한충격은색다른것이었다.지식-권력의선순환과정이중단되었고,지식인들과학파들이권력으로부터떨어져나갔다.중앙과지방간의인적교류와학문적교류도단절되었다.경향분리현상이현저해져서지방유림들은영남,기호,호남,평북등지역별,종파별로개별화되었다.권력은서울권역의경화사족들에의해장악되어척족화(戚族化),벌열화(閥閱化)된세도가(勢道家)내부에서학문논쟁이이뤄졌을뿐이며,겨우기호학파가주변에서거들정도였다.사화는일어나지않았지만,지식-권력의선순환통로를틀어막으면조선의통치원리에본질적변화가발생한다는것을당시의지배세력은인지하지못했다.조선의중세가틀어막히고새로운시간대가느닷없이출발된것이다.조선의근대는그렇게느닷없이왔다.지배층의용의주도한기획의결과도아니고,인민의각성에의한것도아니었다.당쟁을종식시키려감행한권력독점이낳은‘의도하지않은결과’였는데,권력독점에의한지식-권력의분리는사실상오래전부터진행된사회적분화(socialdivision)에의해서서히나타나고있었던것이다.조선의고유한통치원리,지식과권력의선순환과정을중단시킨그우연한권력독점속에새로운시대의씨앗이내재되어있었다는것은역설적이다.<결론:지식과권력의분리와지체된근대,378쪽중에서>

위의도로에대한내용은예전에신문에서도읽은적이있다.로마는약2000년전부터도로건설에매달렸지만우리는근대에들어설때까지지역간연결해주는도로라는개념이없었다.조선의통치제도가강력한것을감안하면새삼스러울것도없지만그런불합리한것을500년견딘인민도이해하기는쉽지않은일이다.만약역사를다시쓴다면어떤일이가능했을까?

이런책을읽으면메모하고싶은내용이많다.읽으면서표시해놓았던내용의반만적었는데도많다.내용을적으면서새삼새롭다.여러날에걸쳐읽은탓도있지만내용이쉽지않은탓도있다.전공이다르지만새로운내용을알게된기쁨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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