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종교 이야기

세종교이야기

유대교,기독교,이슬람교,믿음과분쟁의역사

홍익희지음

IS에의한참수사건,이스라엘과팔레스타인의분쟁소식이계속되는가운데신문에소개된책이다.전에도이슬람교에대한책을읽은적이있었지만이제는가물가물해지던차에제목이시선을끌었다.세종교라고하면여러가지생각해볼수있지만이책에서다룬종교들은유대교’,‘이슬람교’,‘기독교.불교는많은신도가있는종교이기는하지만종교간의분쟁과는거리가있어이런유의책에서는항상열외다.

이책은나같이종교에대해서문외한이면서,종교를종교로보지않는사람에게는최선의선택이었다.세종교에대한뿌리부터시작해서어떻게갈라졌는지,차이점은무엇인지등등.그동안궁금해하던내용들이대부분해소되었다.유대인들이왜옛날부터차별을받아왔으며,나치는이를어떻게이용했는지도알수있었다.

이책을포함해그동안종교와연관된몇권의책들을읽으면서종교의내용을알면알수록종교의의미는무엇인지,종교의역할은무엇인지더궁금해지는것은왜일까?종교에대해뭐라더할말은없고책내용중일부를소개하는것으로대신한다.

책내용중에서

이슬람교의주장에의하면알라와여호와하느님은같은신이다.이슬람교도들은유대인들과기독교도들이아브라함의종교를타락시키고하느님의경전인<성경>을변질시켰기때문에무함마드를통해하늘에있는경전원본을내려보내아브라함의종교를회복시킨것이이슬람교라는주장이다.58쪽중에서

이삭의아들야곱이광야에서돌베개를베고잠이들었다.이때꿈에하느님이나타났다.“나는야훼,네할아버지아브라함의하느님이요,네아버지이삭의하느님이다.나는네가지금누워있는이땅을너와네후손에게주리라.네후손은땅의티끌만큼불어나서동서남북으로멀리퍼질것이다.너에게약속한것을다이루어줄때까지나는네곁을떠나지않으리라…….너의이름은이제더이상야곱이아니라이스라엘이라불릴것이다.”(<창세기>28:13)<성경>에서이스라엘이라는이름이최초로등장하는순간이다.야곱은하느님과씨름했다고이스라엘이란이름을얻었다.이스라엘은하느님과씨름하다는뜻이다.지금이스라엘의국호는여기서유래했다.63쪽중에서

유대교에서는종교를지키는일이기독교처럼신부등성직자의몫이라고생각하지않는다.성직자가없다보니모든사람이종교를지킬의무와책임이있었다.당연히랍비가일반신도들보다높은곳에서서예배를주도하지않는다.이것이바로핵심이다.

유대교에서는누구나종교를지켜야하는책임때문에열세살에성인식을치루고나면의무적으로<성경>을읽어야했다.가톨릭이나개신교에서는<성경>을읽고해석하는것은주로신부나목사의몫이다.신자들은성직자들이읽고해석한내용을그대로받아들이기만하면되는수동적입장이다.이점에서유대교와다르다.유대교에는성직자가없다보니유대인들은스스로<성경>을해석해야했다.단지랍비는더많이공부한사람으로옆에서도울뿐이었다.

같은아브라함을시조로모시는이슬람교에도성직자가따로없다.모든신자가설교자가될수있다.신자는모두신앞에평등하며종교적의무도마찬가지라고믿기때문이다.

기독교도들은오랜기간거의대부분이문맹이었다.성직자들만글을알았다.가톨릭은신자들이<성경>을읽지못하도록오랫동안법으로금했다.이를어기면종교재판에회부되어화형에처해졌다.한쪽은글조차읽을줄모르는문맹이었고다른한쪽은의무적으로열세살부터글을읽었다.십수세기간축적된교육의힘은엄청난에너지를내재한민족의힘이된다.121쪽중에서

그무렵(기원후66-73년무렵)팔레스타인밖의상업도시에서도경쟁관계인유대인과그리스인사이의갈등이커져갔다.복합인종으로구성된그리스인에게유대인은별종으로보였다.자신들을남들로부터유난히구별하는유대인은원래사람을싫어하는민족으로보였다.그리스인은그들문명이지배하는세계를보편적이라는뜻의오이쿠메네oecumene’라고불렀다.보편그저편에펼쳐져있는카오스곧혼돈의세계와구별하기위해서였다.그리고보편적세계는많은인종과많은국가로구성되는세계시민사회로인식하고,이를거부하는자는인류공동의적이라고생각했다.

그리스사회는자신의문화를표준으로간주하고있었다.때문에그리스신들이부정하다는이유로유대인들이그리스문화에동화되기를거절한다는사실은문화적모욕이었다.그로부터최초의반유대주의가시작되었다.유대인들이성전에서몰래인신공양제사를드린다는루머도나돌았다.그리스인들은소문만퍼뜨리는것이아니라로마제국에직접적으로반유대주의를부추기기도했다.167-168쪽중에서

베스파시아누스황제의맏아들인스물아홉살의티투스는작전의최종단계,즉예루살렘의포위와탈환을개시했다.이싸움은704월부터9월까지이어진다.예루살렘성전을지키는유대병력23천여명에비해8만명에달하는로마의월등한군사력에도불구하고전쟁은치열한항쟁으로치달았다.결국티투스는829일성전구역을점령한다음,9월에는예루살렘서북부고지대와해롯왕궁까지점령했다.3년간무더위와갖은어려움속에조롱당한로마군단은처참한살육과학살로앙갚음했다.

티투스는유대인들의폭동을무력으로가혹하게진압하면서도부하들에게는예루살렘성전은파괴하지말라고했다.그러나전쟁중방화되어성전이완전히파괴되었다.함락된예루살렘성안에서는무차별살육과약탈이자행되었다.성전수장고에숨어있던여자들과어린이6천명은산채로불태워졌다.유대인은국가를잃고흩어져세계곳곳에유대인공동체디아스포라시대가본격적으로시작되었다.

전쟁이끝난뒤로마제국은숭자의관용을베풀어유대인들이그들땅에서살며유대교를믿을수있도록허용했다.이때티투스장군이로마의힘을당시유대인들과후대에보이려고교훈적으로남겨둔것이바로통곡의벽TheWailingWall’이다.—중략전쟁의참상은처절하고도비참했다.팔레스타인에살던유대인240만명가운데절반가까운110만명이살육되거나굶어죽었다.엄청난살상이었다.로마인은항복하는자는용서하지만저항하는자는적으로간주한다는원칙을엄격하게실행했다.당시잡혀간전쟁포로노예만도10만명이었다.이때잡혀간유대인노예들이8년간건설한게그유명한콜로세움이다.175-177쪽중에서

유대민족에게고난의역사첫번째가기원전6세기바빌론으로의강제집단이주였다면두번째는로마제국에의해민족이아예사방으로뿔뿔이흩어지게된것이다.이후유대민족은세계각지에서랍비를중심으로하는신앙공동체로살아갔다.이를디아스포라Diaspora’라한다.디아스포라는흩어진사람곧이산이라는뜻이다.2천년이넘는기가긴인고의세월동안민족과신앙공동체의정체성을잃지않고시공을초월해단결해살아갈수있다는그자체가한마디로기적이아닐까?192쪽중에서

유대교는태고때부터메시아가출현해모든인류를구제한다고하는사상을갖고있었다.그런데다세례자요한이나타나멀지않은장래에메시아가출현할것이라고예언했고,그의세례를받은나사렛사람예수가복음을전파하자많은민중이그를따랐다.

하지만바리새파가보기에예수는위험인물이었다.유대인들이생각하기에유대인과이방인의가장큰차이점은하느님으로부터선택을받았는지의여부.바로이구분과증거가율법과할례였다.유대인에게율법과할례는그들의정체성이자종교요목숨이었다.하지만예수는율법과할례없이도그를통해하느님을믿고회개하면누구나하느님의백성이될수있다는새로운복음을전파했다.유대인과이방인의벽을허물고기독교가세계보편의종교가될수있었던원동력을마련한셈이다.이로써하느님이유대인만의하느님이아닌모든인류의하느님이되신것이다.216-217쪽중에서

초기기독교인들이박해를받은원인은예배의식에대한로마인들의오해때문이었다.그들이비밀리에모여예배보는모습에서식인풍습과근친상간그리고무신론이의심된다는이유였다.신자들이서로를향해형제,자매라부르는초대교회관습은로마인들에게기독교인들이성적으로문란하다는인상을주었다.예배후평안의키스를나눈다는표현은상황을더욱악화시켰다.‘예수의몸과피를마신다는성찬식표현은말그대로기독교인들이식인풍습을지난것으로와전되었다.—중략무엇보다도기독교인들이핍박받은가장큰이유는황제숭배를거부했기때문이다.로마인들에게는눈에안보이는신을믿는기독교인들이무신론자로보였다.게다가로마제국의수호신인황제에대한숭배를거부하는것은곧제국의안녕을위협하는반국가적행위였다.자연히로마에재난이발생할때마다기독교인은비난의대상이되어사자밥이되었다.이와같은박해는네로황제때부터313년콘스탄티누스황제에의해기독교가공인되기까지계속되었다.251-252쪽중에서

1184년교황은발도(프랑스리용의부호)파를파문했다.그런데도발도파는많은세력을유지했는데주로중산계급과농민의평신도들로이루어졌다.발도파의득세로<성경>주석에능한평신도가사제들과<성경>을토대로한교리적인마찰을불러일으키자교황청은당황했다.

1229년그레고리우스9세에의해소집된툴루즈공의회에서평신도의<성경>읽기,번역,소지금지조항을채택했다.더나아가그간비공식적이었던종교재판을공식화해서마녀곧이단색출에나섰다.이단심판기준의하나가<성경>을소유하거나번역해서읽은자였다.이들을화형에처했다.

그뒤가톨릭은문맹을권하는종교가되었다.가톨릭신자의90퍼센트이상이문맹이었다.가톨릭의평신도<성경>읽기금지가무려5백년가까이지속되었다.이통에덕본것은유대인들이었다.대부분이문맹이었던중세사회에서글을아는유대인들이상업과교역을주도할수있었던이유였다.280-281쪽중에서

<구약성경>은세종교모두의경전이다.이슬람교는<구약성경><코란>과상충되지않는<모세오경>과다윗의시편을경전으로믿는다.따라서세종교모두예루살렘을성지로여기며유일신에의한창조,종말,최후의심판,영원한내세라는종교관도일치한다.

세종교의모태는유대교다.유대교는기원전2000년경의아브라함에서부터시작해기원전13세기이집트탈출때모세가시나이산에서하느님에게십계명과율법을받아뼈대가정립되었다.그리고기독교는기원후예수의제자들에의해유대교에서분리되었으며,이슬람교는기독교보다약6백년뒤에무함마드에의해생겨났다.364쪽중에서

세종교의가장큰차이는예수에대한관점에있다.기독교는예수를삼위일체설에입각해하느님의아들이자신이라고믿는반면유대교와이슬람교는예수를단지하느님이보낸선지자(예언자)가운데한명으로간주한다.유대교는예수를유대교의일파를이끌다순교한선지자로보고있다.예수에대해유대교는<<탈무드>><산헤드린>에서예수는마술을써서이스라엘을미혹시켜배교하게했으므로유월절전날에처형되었다고기록하고있다.이렇게유대교에서는예수를신의아들,삼위일체하느님의한지체로보지않는다.

예수를이샤라고부르는이슬람교도유대교와마찬가지로예수를신의아들로보지않는다.그러나처녀의몸에서태어난사실과기적을행한사실은믿는다.무슬림들은예수를이스라엘민족을인도하기위해신이보낸중요한예언자들가운데한사람으로존경한다.실제로예수는이슬람교에서중요한위치를차지하고있다.—중략하지만<코란>에보면예수는십자가에죽은사실이없다고되어있다.“그들이예수를죽이지도,십자가에못박지도않았으나그들에게는그렇게보였을뿐이다.”(<수라>4:147-158).이렇게<코란>은단적으로예수의십자가죽음을부인하고있다.대부분의무슬림들은예수가십자가에못박히기직전하느님께서천국으로데리고가셨으며가롯유다가대신십자가에못박혔다고보고있다.그리고심판의날이가까워오면예수는다시지구로재림한다는것이예수에관한이슬람교의믿음이다.368-369쪽중에서

로마제국내에서우려했던유대인에대한박해가시작되었다.기독교세력이걷잡을수없이늘어나자로마제국은그동안왜기독교를박해했는지에대한해명의필요성을느꼈다.그래서찾은희생양이유대인이었다.로마당국은유대인은하느님의독생자예수를죽게만든하늘의죄인이자기독교의적이다.하늘에대역죄를지은유대인들은앞으로거룩한땅예루살렘의하늘을바로쳐다보아서는안되며그신성한하늘과마주한땅위에어떠한씨앗도뿌려서는안된다.또한하늘에죄를지은유대인들은검과창을쓰는무사가되어서도안된다고못박았다.

이로써유대인들은농사를지을수없게됐다.고대농업사회에서이는기본적인생존권의위협을뜻했다.전쟁에군인으로참가할수도없게되었다.전쟁에참가할수없다는것은시민자격이없음을의미했다.392-393쪽중에서

인노첸시오3세는1215년에열렸던4차라테라노공의회에서일련의반유대칙령을제정해유대인식별마크착용을의무화했다.노란마크를유대인가슴에붙이게한것이다.모든유대인은열등한종족이어서가슴에부끄러움의표지를달아야한다는의미였다.그시대사람들은유대인을신의저주를받은종족으로취급했고기독교들과구분되어야한다고믿었던까닭이다.—중략—1215년의공의회와관련해덧붙여야할것은,이때처음으로의복을통해유대인을일반주민과구분해야한다는논지에따라유대인식별규정이도입되었다는점이다.중세에는노랑이멸시를받는자의색으로1445년의함부르크복식규정에따르면창녀들은노란수건을머리에써야했다.미혼모들역시이노랑의수치를견뎌야했다.독일남부도시프라이브르크에서는미혼모들에게노란모자를쓰도록강요했다.이교도들에게도처형장에서노란십자가를목에걸어주었다빚을진채무자들은노란원을옷에다달고다녀야했다.이같은노란의복과노란장식은말그대로치욕의징표였다.407-408쪽중에서

반유대감정이고조된또다른이유의하나가경제적요인이다.유대교는이자수취를허용하는한편기독교는금했다.이러한상반된종교원칙속에서도유대인들은많은기독교도들에게돈을빌려주었다.따라서사회적으로빚에대한압력이커지면빚을준유대인들은잔인한고리대금업자로몰리며박해당하고추방되는전형적인모습이수세기를두고반복되었다.이때권력자들은기다렸다는듯이유대인의보호를위해엄청난보호비와채무탕감을요구했다.414쪽중에서

스페인을통일하던해인1492331일에스페인왕국은유대인추방령을발표했다.정부가전쟁으로이반된민심을추스르고바닥난국고를재정비하는데는이단으로치부되는유대인의재산몰수와추방이일거양득의제격이었다.—중략4개월이내에추방을선포한칙령에의하면,유대인들은재산을처분해가지고나가는것은허용하되화폐와금,은등당시의돈은가져갈수없다고발표했다.발각되면처형이었다.한마디로억지였다.재산은놔두고몸만빠져나가라는소리였다.1492331일칙령이발표되자개종을거부한유대인은팔수있는모든것을몇달이내에헐값으로팔아치웠다.집을주고당나귀를얻었고포도원이몇필의포목과교환되었다.

이렇게재산을급하게처분할수밖에없었지만불행중다행인것은신변의위험을안고사는유대인들은모든재산을평상시에도나누어놓은습관이있었다.삼분의일은현찰로,삼분의일은보석이나골동품같은값나가는재화로,삼분의일은부동산으로부를분산시켜관리했다.안정적인재산관리방식인포트폴리오Porfolio는여기서유래했다.그와중에도유대인들은담보대출시저당잡은보석류를챙겼다.당시유대인의토지소유는법으로금했기때문에대부분의저당물이보석류였다.이는후에유대인들이이주해간앤트워프와암스테르담이다이아몬드보석시장으로자리잡게된이유다.416-418쪽중에서

유럽에서직접혹은간접적으로나치의통제아래있던유대인은약9백만명이었다.나치는이들가운데6백여만명을학살했다.나치는자신의손아귀에있었던유대인의67퍼센트를죽였다.—중략눈앞에서벌어지는이런비극을뻔히보면서도유럽사회는침묵했다.교회도침묵했다.당시바티칸은유대인학살에대해한마디발언도하지않았다.19439월부터19446월까지독일이로마를점령하는기간동안,독일은교황이보는앞에서약2천명의유대인들을아우슈비츠등으로실어갔다.이들중십여명만제외하고모두살해됐다.물론교황이바티칸에477명의유대인을대피시키긴했지만,이는지극히소극적인태도였다.

이러한무관심속에서폴란드유대인의90퍼센트이상이살해됐다.이때폴란드의랍비바이스만델은로마교황청에도움을요청하는편지를썼다.무고한유대인특히어린아이들만이라도구해달라는내용이었다.나치치하에서학살된6백만유대인가운데백오십만명이어린이였다.때문에그의간구는절규에가까운호소였다.그러나그가교황청으로부터받은답변은매몰차다못해소름끼쳤다.“이세상에무고한유대인피란없다.모든유대인의피는죄악이다당신들은죽어야한다.(예수를십자가에못박은죄)때문에당신들은이러한형벌을받는것이다.”447-450쪽중에서

종교는무엇인가?

Leave a Reply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