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지 유신은 어떻게 가능했는가

메이지유신은어떻게가능했는가?

박훈지음

2015년의마지막일요일.올해마지막산행을하려다그만두고읽던책을펼쳤다.<메이지유신은어떻게가능했는가?>예전부터궁금했던질문이다.임진왜란때조총으로무장하고조선을침범했지만17세기나18세기까지외형적으로별차이가없어보이던일본이아시아에서는유일하게서구화에성공하면서일찍이아시아의패권국가로일어선것은어떻게가능했는가?더욱이그렇게일어선일본에덜미를잡힌상태로중요한20세기의전반기를보낸아쉬움에이질문은우리와밀접할수밖에없다.

책을받자마자자세히보지도않고서류봉투로책겉장을싸놓고읽는습관때문에책을다읽고정리하느라겉장을벗기면서이책이일본저자의책이겠거니생각했는데<서울대인문강의>06으로저자는박훈서울대교수이다.그래서인지강의를듣는것같은느낌이들기도한책이다.

고등학생때역사배울때생각을하면대원군의쇄국정치가일본에의한조선합병의주원인이라는생각을했던것으로기억이난다.그후이런저런책을읽으면서그원인이복합적일것이라는생각을했는데,이책은이를잘정리하고있다.이책내용중에는간혹조선에대한이야기도있지만대부분일본에대한이야기인데읽으면서조선과다른점을잘이해할수있도록기술하고있다.

흔히생각하듯이조선말기대원군이나아니면고종이나조선말기권력을잡고세도정치를주도한권세가들만의문제는아니다.역사적으로한왕조가500년을유지한것이대단하다고이야기하지만그유지가오히려우물안개구리신세를깨닫지못하게한이유가될수도있을것이다.병자호란의그치욕적인경험을하고서도세상의변화에대해적극적인대응이부족할수밖에없는,절대변할수없었던조선통치체제의약점이누적된결과로보인다.그에비해변화를주기쉬운체제를가지고있던일본은외부의영향에민감하게반응할수밖에없었고섬이라는독특한위치학적인변수도도움이되었다.

조선을건국하고서중국으로부터국명을허락받아야하는처지로시작하여500년을가면서이런관계에대해개선해야겠다는깊은성찰이없었던것이아쉽고,유학을적절한시기에적절하게이용한일본에비해유학에매몰되어헤어나지못한것도아쉽다.

조선,대한제국,대한민국의입장에서역사는돌아다보면아쉬운점이많은부분이다.역사를되돌아보는이유는앞으로펼쳐지는미래에는더잘해보자는의미가있을것이다.당시에살고있는사람은그당시의입장에서무엇이최선이었는지알수가없을것이다.조선의어느시점에서,어떤결정이중요한역사적인키가되었는지알수는없지만분명있을것이다.현재를살고있는이시점에서앞으로의미래에중요한키의역할이되는부분도있을것이다.그에대한평가는후대가할것이지만그후대가읽으면서우리의지난100년처럼아쉬운일이많지않은역사가이루어졌으면좋겠다.

책내용중에서

이처럼막부는교묘한통제장치로번들을장악하는데성공했고,260여년동안단한번의다이묘반란도없었다.그러나번과다이묘의자율성도꽤존재했다는점역시놓쳐서는안된다.각번이막부의종주권을인정하는대신막부는번의행정권,징세권,경찰권을인정해주었다.이때문에각번은막부의강한규제를받기는하지만흡사별개의국가같은성격을띠었다.그래서도쿠가와체제를복합국가라고말하기도한다.—중략이처럼반()독립적인번이다수존재했다는점은막말기의변혁과정에서중요한의미를지닌다.첫째,각번들간의경쟁의식이강했다.태평시대에는이것이사치경쟁,체면경쟁으로나타났다.참근교대행렬을화려하게꾸미기위한번들의경쟁이심각해지자막부가일일이제한규정을두어야할정도였고,번주들의에도번저생활도경쟁적으로화려해져갔다.번주들은더높은관위(官位)를받기위해막부와조정에치열하게공작했다.또막부로부터보조금을타내기위한,혹은쇼군의자식을양자나처로얻기위한각종공작도치열해졌다.

한편에서는인정(仁政)’경쟁도있었다.에도에는수많은다이묘들과각번에서올라온번사(藩士:다이묘에게속한무사)들이모여살고있었기때문에그들사이에각번의통치상황은늘화제였고비교대상이었다.어느번의다이묘가선정을베풀었다는소문은그번관계자들의어깨를으쓱하게만들었고,그반대의경우는체면이깎이는일이었다.33-34쪽중에서

한편하급사무라이들은신분이나지위상승의길이여의치않았다.청이나조선의경우과거제를통해지배신분내에서사회적이동이어느정도가능했던데비하여과거제가없었던일본에서는가문의일을세습할수밖에없었다.전국시대같은전시라면신분이낮더라도무공을세워일약출세하는길이있었으나200년이넘는태평시대에그런기회는흔치않았다.—중략이처럼사무라이사회는사회적유동성도약한데다계층차별까지강하게존재했던것이니하급사무라이들이느낀좌절감은대단한것이었다.

물론불만인구가많더라도이들이흩어져있다면변혁세력으로조직되기어려울수도있다.그러나하급사무라이들은한도시에,그것도같은구역에집단거주하고있었다.비록현실은누추하지만이들은지배층으로서의자긍심을가지고있었다.도시인구의약40%가이처럼현실에대한불만을품으며도시의한구역에밀집해있는상황이었으니,객관적으로이미혼란의싹은있었던것이다.이렇게본다면도쿠가와체제유지의최대관건은농민이나도시빈민의피폐보다는바로이계층에있었다고볼수있을것이다.아니나다를까19세기중반의정치소요의중심에는바로이들이있었다.41-42쪽중에서

에도는이미18세기전반기에인구100만의대도시가되어있었다.당시그정도규모에이른도시는청나라의베이징정도였다.이시기에도를방문한조선통신사들이한결같이사람이많다면놀란것도당연한일이다.막부의군사요충지이며최대상업도시였던오사카,천황과조정관리들이거주한교토도30만을훌떡넘었다.같은시기유럽의파리나런던은50-60만정도였고,조선의서울은20만정도였다.이처럼수만명의인구를갖고있는도시들이전국적으로산재해있었고,도시인구의반이상은사무라이였다.그리고태반은하급사무라이였다.메이지유신은어떻게보면도시인사무라이들이일으킨도시혁명이라고도할수있을것이다.50쪽중에서

서양선박출몰에대해동시대의조선과청이보였던반응과비교해보면,일본은아주이른시기부터그것을위기로인식했고,그것도매우절박했다.그원인에대해서는몇가지를생각해볼수있다.

첫째,일본은약200년이나군사적위기상황이거의없었다는점이다.군사적무경험은나태한사회에는평화지속에대한환상을심어주지만,18새기말의일본처럼외부정보에촉각을곤두세우고있던사회에는곧닫칠지모르는미지의사태에대한과잉반응을일으키기쉬웠다.—중략일본은17세기초이래로외국과의군사적,외교적긴장이나영토분쟁을전혀겪지않았기때문에러시아의등장에필요이상으로과민하게반응했던것이다.

둘째,이같은위기감을배경으로일본열도에대한안보개념의전환이일어났고,이것이위기의식을더욱부채질했다.

셋째,안보상의고립감이다.지역안보체제가존재한다면이상과같은상황에서라도국방에대한위기감에서어느정도벗어날수있을것이다.조선이그러했다.조선역시많은면에서일본과마찬가지로국방위기를느낄수있는상황에있었다.—중략그러나일본과결정적으로다른것은중국에안보를의존할수있다는점이었다.—중략그러나일본은조공책봉질서(朝貢冊封秩序)에편입되어있지않았기때문에중국의안보우산을기대할수없었다.이점은조선과두드러진대조를이룬다.일본의전략가들에게는유사시중국에원군을청한다는발상자체가없었다.도쿠가와막부성립이후한번도중국과정부사절을교환한적이없었으므로당연한것이었다.

넷째,당시일본인들은서양에대한정보를풍부하게갖고있었다.—중략이같은풍부한정보를갖고강력한소수파는서양열강의세계진출을사실이상으로공격적으로묘사하여제시했다.실제로서양열강의세계각지를무차별적으로침략하기시작한것은산업혁명의성과가쌓이고증기선과신형무기들이발명된이후,19세기중반이후부터인데,이들은18세기말,19세기초에이미서양을무자비한세계정복자로보고있었다.

다섯째,이시기에강해진일본인의정체성(identity)과관련이있었다.즉자기인식의변화와위기의식의고양이연동되었다.18세기에는중국이나조선,서양과는구별되는일본과일본인의정체성에대한담론이활성화되었다.이른바()민족주의(proto-nationalism)’의성립인데,그중에서중요한것들이천황의혈통이만세일계(萬歲一系:혈통이한번도바뀌지않았다는것)로이어져역성혁명(易姓革命)이발생하지않았다는것,그리고외국군대에국토가유린된적이없고지금까지독립을보존하고있다는것이었다.—중략이것은일본이다른나라들과달리순결하다는이미지를만들어내었고따라서자칫하면이순결을더럽힐수도있다는강한공포감,경계심을조장했던것이다.다시말하면자기국가나민족에대한자의식이강해질수록그것의훼손과상실에대한위기감도커질수밖에없었던것이다.60-70쪽중에서

미일통상조약체결문제를계기로주요정치세력으로부상한양이론자들의주장에대해검토해보자.양이론(攘夷論)은문자그대로오랑캐를몰아내자는것으로,청에도조선에도있었다.물론말로안되면전쟁도불사한다는것이다.일본은사무라이국가이므로주전론(主戰論)은더욱호소력이있었다.그러나잘살펴보면일본의양이론은조선이나청의양이론과는사뭇다르다는것을알수있다.먼저양이론의대표주자인미토번주도쿠가와나리아키의주장을살펴보자.1853년페리가내항하자일본의조야는큰위기감에휩싸였고,그동안정치적으로소외되어왔던나리아키가급히등용되었다.페리를어떻게대할것인가를놓고논의가분분하던때나리아키는다음과같은의견서를내밀히막부에제출했다.

태평이계속되어왔으므로지금상태로는전쟁은어렵고화친이쉬울것입니다.그러나일단전쟁이방침을정하여천하가모두전쟁할각오가돼있는상태에서화친을맺는다면괜찮겠지만,화친을위주로하다가전쟁이나면어떻게할방법이없을겁니다.그러므로지난번에화친의가능성에대해말씀드린것은해방(海防:국방)담당자들만의극비로하고,이번에는실로전쟁할각오를천명해야할것입니다.배꼽아래에()’라는글자를내놓고다녀서는자연히밖으로새어나가게되므로,일단자는봉해두고해방담당자만알고있었으면합니다.92-93쪽중에서

이시기일본인이보여준특징중하나는서양정보에대한왕성한호기심과흡수노력일것이다.이미도쿠가와시대에도일부난학자(네덜란드관련)들은나가사키라는좁은통로를통해서양정보를쌓아나갔다.그러다가개항이되자서양을직접알고자하는관심이폭발적으로증가했다.페리가내항했을때그배에뛰어들어서양에데려가달라고한요시다쇼인은이런시대적분위기를상징하는인물일것이다.—중략이중에는이토히로부미(伊藤博文),그리고메이지정부의원로이자조선공사로서조선의내정에도깊숙이개입하게되는이노우에가오루(井上馨)가있었고,메이지정부문부대신을지내는모리아리노리(삼유례)도있었다.—중략이렇게해서1862년부터5년간막부와각번이보낸해외유학생수는막부62,각번58,기타15명으로실로135명에달했다.1860년대조선과청의서양유학생이거의없었던것과대조적이다.100-101쪽중에서

그렇다면이시기에이처럼학교설립이급증한이유는무엇일까.도쿠가와사회는초기이래유례를찾아볼수없는장기간의평화를경험하고있었다.국제전쟁이나대규모의내전은물론사무라이군대가출동할정도의대규모민중봉기도드물었다.사무라이사회에서말이다.이렇게되니사무라이들은점점군인으로서의존재증명을하기가어려워졌다.대신행정능력과정치역량이점점중요해졌다.무도장(武道場)은여전히사라지지않았지만사무라이들은이제학교에서배울것이점점많아진것이다.154쪽중에서

그러나사대부적정치문화의지나친활성화는극단적인당쟁(환국정치)을만성화시켰다.복수당파의공존이라는정치관습은17세기에일시적으로형성되는듯이보였으나,곧상대방당을절멸시키려는시도로인해무너져버렸다.영조,정조의탕평책은이를견제하려는것이었다.그러나정조사후조선에서사대부적정치문화를대체한것은소수문벌가문에의한독재정치,즉세도정치였다.세도정치하에서사대부적정치문화는크게위축되었다.상서는제한되었고,올라온상서도제대로처리되지않았다.당파는위축되고몇몇거대가문에의한정권의과점이계속되었다.언관도크게위축되었고,성균관생들의정치참여도시들해졌다.중요한것은이런움직임이전국정치를크게약화시켰다는점이다.세도정치의주역가문들은대체로서울,경기지역에근거지를갖고있는가문들이었다.서울,경기외의다른지역은거의정치에참여할기회를잃거나참여하려고도하지않았다.흔히조선은당쟁으로망했다고하지만,조선이무기력해진19세기는오히려상서,붕당정치,당쟁등이크게위축되었던시기였다.필자의용어로말하자면사대부적정치문화가크게위축,또는실종된시기에조선은쇠퇴했던것이다.169-170쪽중에서

이처럼18세기말부터시작되어서서히진행된정치적,사상적면에서의일본사회의유학화는도쿠가와체제를무너뜨리고메이지유신직후정점을맞은듯이보였다.그러나전성기는짧았다.대외적위기감속에서,특히1871년폐번치현(廢藩置縣)쿠데타이후일본사회는급속히서구화,즉문명개화,부국강병노선으로달려갔다.유학화의흐름은서서히제압되었다.

중요한것은이과정에서사대부적정치문화와유학적정치사상은서구화에장애물이라기보다는가교역할을했다는점이다.앞에서본대로정당정치는학적네트워크와당파정치에그게의존했다.유학지식인들은서양민주주의에저항감을보이는사람들을익숙한유학용어로안심시키며설득했다.의회제도는현군(賢君)들이공론을존중하는것과무엇이다르냐고,통치자를선출하는공화정은바로요순시대의선양(禪讓)과같은것이라고,고등문관시험은바로과거제와같은거라고.

조선이나청과달리유학이이처럼서구화에장애물이되지않고오히려가교역할을했던것은지금까지우리가보아왔듯이,일본에서는유학이체제이데올로기가아니고오히려신흥사상의측면이있었던점,또그것을받아들인사람들도유학을우주론이나내면화된신념으로서보다는다분히도구적인것으로받아들여졌던점등이작용한것으로생각된다.어쨌든메이지유신의성공배경에는우리가잘알고있는서구의충격만이아니라,지금까지간과해왔던유학적영향이적지않은역할을했던것이다.217-218쪽중에서

책을덮으면서궁금했던것이많이해소된것을느낀다.물론저자의해석이짙게깔려있지만좋은책을골랐다는생각이든다.도서관에서빌려다놓은몇권의책이옆에있지만올해남은시간으로보아이책이올해마지막책이될것이다.예년에비해적은책을읽었지만이책을읽은것이그아쉬움을달래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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