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비록
BY t2star ON 5. 9, 2015
지옥의전쟁그리고반성의기록
유성룡지음,김흥식옮김
요즘TV에서징비록이방영되고있다.TV방영사실이이책을찾아보게하였지만TV는한편도보지않았다.사극드라마대부분이역사적사실에바탕을두고만들어지는데다큐도아니고,그렇다고완전픽션도아닌것이편하게보기가쉽지않다.남아있는역사적기록이라는것이사실에대한언급이라고는하지만기득권을가진자의입장에서기록된내용이고,너무많은공백을갖고있어하루하루를구성한다는것은결국창작으로메울수밖에없는데이는작가가담당하는몫이다.언젠가TV사극내용을가지고역사를논하는사람들을본적도있는데역사와사극에서다룬내용을혼동하는일은지금도계속진행중일것이다.
2009년에읽은[임진란의기록:루이스프로이스가본임진왜란]이란책에서쓰시마의실력자야카타의간청으로임진왜란발발일년전일본으로두명의사절을파견하는것으로나온다.쓰시마도주는중국을정복하기위해조선을치고들어가는것이무모하다는판단하에조선에그러한정보를제공하고사전에막고자하는노력을하였으나조선은그러한기회를살리지못하게된다.잘알려져있는바와같이사절두사람은정반대의의견을내놓는다.[징비록]앞부분에이에대한이야기가나온다.이부분에서전쟁이일어나지않을것이라는입장을내놓은김성일은그리이야기한것에대해유성룡에게나라안인심이동요될까봐일부러그렇게말한것이라고했다고적어놓았다.유성룡과같은정파인김성일에대한배려라고볼수있는부분이다.인심동요라는표현이어설프게느껴지는것은그후의사후준비가없지는않았지만그리절박하지는않았다는점에서면피성표현이라고볼수밖에없는부분이다.
명나라는명대로정세가불안정한터라틈만나면철군하기위해왜와강화조약을맺기위해노력하고,그틈바구니속에서고민하는선조와유성룡을포함한조정대신들.남의손으로나라를지키는일은스스로하는것보다결코쉽지않음을보여주고있다.
만약두사람모두전쟁의가능성이임박했다는보고를했다면어찌진행되었을까?
과연선조와조정에서전쟁에대비해준비를시작하였을까?
만약조선이떠들썩하게군비를증강시키고있다는소문이났다면도요토미히데요시는그럼에도전쟁을일으켰을까?역사와관련된책을읽게되면끊임없이가정을하게된다.소용없다는것을알면서도.
7년간의왜란이끝나고채40년이안된1636년조선은병자호란을맞게된다.왕이미쳐강화로피난갈시간도없이밀고내려와남한산성으로들어간것을보면군사적인대비가안되었다고볼수있다.경험했다고다준비할수있는것은아닌것을우리는그후에도반복했고,반복하고있다.
책내용중에서
부산에도착한황윤길은먼저사신일행이겪은내용을기록한글을올리면서머지않아전쟁이일어날것이라고보고했다.
이후임금께결과를보고하는자리에서도황윤길은똑같은보고를했다.그러나김성일은전혀다른보고를올렸다.
“신은그런기색을느끼지못했나이다.”
계속해서김성일은말했다.
“윤길이공연히인심을현혹시키고있사옵니다.”
이렇게되자조정의의견또한둘로나뉘게되었다.김성일을만나내가물었다.
“그대의견이상사와전혀다르니,만일전쟁이일어나면어쩌려고그러오?”
그러자김성일이이렇게답했다.
“저역시일본이절대쳐들어오지않으리라고생각하지않습니다.그렇지만윤길의말이너무도강경해잘못하면나라안인심이동요될까봐일부러그렇게말한것입니다.”
34-35쪽중에서
1592년4월13일,왜적이국경을침범해부산포가함락되고첨사僉使정발鄭撥이죽었다.
사신일행과함께온일본의야나가와시게노부,승려겐소등이동평관에머무를때의일이다.비변사에서는황윤길과김성일등으로하여금그들을초대,술자리를마련하면서일본의내정을살피자는계략을내놓았다.이에대해임금께서도흔쾌히허락하셨다.
김성일과대화하던중겐소가말했다.
“명나라와우리일본사이의국교가끊긴지오래되었습니다.결국조공도사라졌는데,히데요시는명나라의이러한처사에상당히화가나있습니다.곧전쟁이라도일으킬것같습니다.만일조선에서명나라에이러한상황을전하고조공을재개할수있도록해준다면조선도평안하고일본의온백성도평안할것입니다.”
이말을들은김성일은명분에어긋나는행동이라며호통도치고한편으로는달래기도했다.그러나겐소의뜻은단호했다.
“예전에원나라군사를우리나라까지인도해침략에나서도록한것이바로고려였습니다.이번일로인해전쟁이벌어진다해도우리로서는고려의원수를갚는것에불과합니다.도리에어긋나는일은아니라고봅니다.”
시간이갈수록그의말투는점점무례해졌고,우리일행은더이상논의하는것이무의미하다고여겼다.
시게노부와겐소가돌아간뒤1591년에요시토시가다시부산에들어왔다.
그는국경을지키고있던우리장수들에게협박조로말했다.
“지금우리는명나라와통신하고자하오,조선이이뜻을전한다면아무일도없겠지만,만일그렇게못한다면두나라사이에더이상평화를기대하기는어려울것이오.귀국을생각해특별히전하는바이니심사숙고하시오.”
이말을들은장수는그대로보고했다.그러나조정은태평했다.우리통신사만탓하고그들의무례함을탓할뿐답도주지않고대수롭지않게넘겨버렸다.
열흘이넘도록배에서답을기다리던요시토시는우리조정으로부터아무대꾸가없자얼굴을붉히며돌아갔다.그뒤로는일본인들이들어오지않았다.부산포에머물고있던자들조차하나둘자취를감추더니이윽고한사람도찾아볼수없게되었다.그곳사람들은참으로이상하다고여겼다.
그리고이날왜적들이몰려온것이다.
48-50쪽중에서
“나라님이우리를버리시면우린누구를믿고살아간단말입니까?”
임진강에이를때까지비가멈추지않았다.배에오르신임금께서수상과나를부르셔뵙고나왔다.
강을건넜을때는이미날이저물어길을찾기도쉽지않았다.임진강남쪽기슭에옛날승청이있었는데적들이그나무를이용해서뗏목을만들어강을건널까두려워나무에불을붙였다.그러자불빛이강북쪽까지비춰길을찾을수있었다.
오후8시경이되어동파역에닿자파주목사허진과장단부사구효연이임금접대를위해파견되어와서음식준비에한창이었다.하루종일아무것도먹지못한호위병들이이모습을보더니주방으로들어가닥치는대로먹어치우기시작했다.나중에는임금께드릴음식마저모자랄지경이되자허진과구효연은그대로도망치고말았다.
78쪽중에서
부원수신각신각이양주에서적을무찌르고적병60명의머리를베었다.그런데도조정에서는선전관선전관을보내신각을죽였다.
신각은김명원의부장이었다.그런데한강싸움에서패하자김명원을따라가지않고이양원을따라양주로들어갔다.그리고마침그곳에온함경우도병사이혼과함께한양으로들어가민가를약탈하던적을격퇴시켰다.이야말로왜적이우리나라에침략한후처음으로승리한싸움이었으므로백성들이감격해모두나와환호했다.
그럼에도김명원은임진강에서올린장계에이렇게썼다.
‘신각이제멋대로다른곳으로가는등명령에복종하지않았습니다.’
우의정유홍이글을읽은대로임금께보고했다.결국조정에서는신각을처형하기위해선전관을파견했는데,마침그때신각의승리소식이전해진것이다.조정에서는부랴부랴사람을뒤쫓도록했으나이미선전관의손에신각이죽은후였다.85-86쪽중에서
임진왜란이발발한이후끊임없이문제가된것은당연히식량조달이었다.20만가까운왜군은당연히군량을조선땅에서조달하기위해최소한의양식만을싣고왔고,10만이넘는명나라군사의군량미도당연히조선에서조달해야했다그뿐인가,20만명에가까운조선군사의군량미역시부담해야했으니백성들의기근에관심을갖기를바라는것자체가무리일것이다.게다가전쟁으로조선경작지의3분의2가까이파괴되었으니백성들입장에서는살아남는것자체가기적이라고할정도였다.277쪽해설중에서
계사년10월,거가가환도하니불타고남은것들만이성안에가득하고,거기에더해전염병과기근으로죽은자들이길에겹쳐있으며,동대문밖에쌓인시체는성의높이에맞먹을정도였다.그냄새가너무더러워가까이갈수조차없었다.사람들은서로잡아먹어,죽은시신이보이면순식간에가르고배어피와살이낭자했다.288쪽중에서
임진왜란은조선뿐아니라명나라에도커다란부담이었다.그무렵명나라는훗날후금을거쳐청나라로성장하는여진족,그가운데서도특히세력이일취월장하던건주여진의위협을겪고있었다.이런상황에서조선에10만명이넘는군사를파견하는일은큰부담이었고,결국이는임진왜란이끝난후후금의공격을받아속절없이무너져내리는계기가되고말았다.
그런까닭에명나라는기회만있으면일본과강화를맺고조선에서철수하려했다.이러한명나라의움직임은조선조정으로서는참으로답답한일이었음이분명하다.그러나조선조정으로서는어떻게해서든명나라를구슬려왜군을소탕할때까지머무르도록하는방법외에별다른수가없었다.한편명나라로서도틈만나면철수하고자했으나조선의사정이여의치않아이러지도저러지도못하는상황이었다.
위내용을보면명나라관리들가운데조선문제로골머리를썩은이들이적지않음을알수있다.오죽하면조선을몇나라로나눠번국藩國,즉제후국으로만든후분할통치하도록하자는의견을내기에이르겠는가.
다른한편으로는선조를왕위에서물러나게하자는의견도분분했던것으로보인다.이러한소식이선조의귀에까지들어갔으니이무렵부터선조는끊임없이퇴위하겠다는뜻을표한다.이무렵<조선왕조실록>을보면,거의매일선조는퇴위를표하고신하들은만류했다는내용이기록되어있을정도니선조또한참으로고통스러운하루하루를보냈음을알수있다.그런왕을곁에서보필해야했던유성룡을포함한고위관리또한괴로웠을것은두말할필요가없다.299쪽해설중에서
통제사統制使이순신을애도함무술년11월19일(1598년,선조31년)
한산도고금도
넓은바다속두어점푸르구나
그때백전노장이장군이
한손으로친히하늘한쪽벽을버티었네
고래를다죽이니피가파도에번지고
맹렬한불길은오랑캐소굴다태웠구나
공이높아지니시샘과모함면하지못했으나
기러기털같은목숨아끼지않았네
그대는보지않았는가
현산峴山동편머리위한조각돌에
양공羊公떠나간뒤후세사람들눈물흘린것을
쓸쓸하다두어칸민충사여
비바람에해마다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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