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움 받을 용기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위한 아들러의 가르침
기시미 이치로, 고가 후미타케 지음
전경아 옮김
김정운 감수
이 책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시작하며
과거 1000년의 도읍으로 번성을 누리던 옛 도시 외곽에 철학자가 한 명 살았다. 그 철학자는 세계는 아주 단순하며, 인간은 오늘이라도 당장 행복해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납득이 가지 않는 청년은 철학자를 찾아가 진의를 따져 묻기로 했다. 번뇌로 가득한 그의 눈에는, 세계는 혼돈과 모순으로 가득한 곳이었다. 그런데 행복이라니? 터무니없는 얘기였다.
청년 : 그러면 다시 묻겠습니다. 세계는 아주 단순하다는 것이 선생님의 지론입니까?
철학자 : 그렇네. 세계는 믿기 힘들 정도로 단순한 곳이고, 인생 역시 그러하다네.
이 책은 세상의 모든 것이 어렵기 만한 청년이 인간은 변할 수 있고, 세계는 단순하며, 누구나 행복해 질 수 있다는 철학자를 만나 대화를 나누는 형식으로 기술되어 있다. 대화 중 일부는 다른 색과 크기로 표시되어 있는데 서로 상대방의 이야기를 언급한 것도 있어 전체를 옮기지 않으면 청년의 말인지, 철학자의 말인지 알기 어려워 구별하지 않고 적어본다. 이 글들이 이 책의 요지라는 생각이 든다.
살면서 고민하는 단어가 몇 개 있다.
’열등감, ‘행복’, ‘인간관계’ 등등. 길을 지나가는 젊은이들을 보면 한창 즐거운 것 같으면서도 어딘가 불안한 느낌이 드는 것을 종종 느낀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좋은 점 중의 하나는 남과 비교하는 일이 적어지는 것이다. 흰 머리와 주름살이 늘면서 남 눈치 보는 일이 적어졌다. 출근 때 전에는 머리 스타일이 신경 쓰여 모자를 잘 쓰지 않았지만 이번 겨울 들어서는 모자는 필수품이 되었다. 모자가 이렇게 몸을 따뜻하게 해 주는 것을 새삼 느낀다.
전에도 종종 과 전공의들에게 ‘남과 비교하지 마라’라는 말을 하곤 했다. 비교하는 순간 진다고. 누구나 남과 비교를 할 것이다.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비교해서 좋은 느낌을 받은 적은 별로 없다.
한 사람을 대상으로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키는 얼마 이상, 얼굴은 잘 생겼다고 알려진 탤런트, 몸매는 요즘 대세라는 아이돌 스타와 비교하니 열 번이면 열 번 모두 패배감을 느낄 뿐이다. 내가 잘하는 것은 하찮은 것 같이 느껴질 뿐이다. 인사 잘하는 것, 청소 잘하는 것, 김치찌개 잘 끓이는 것 등등 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이런 세상에서는 남(세상의 탑들과)과 비교해서는 자존감을 지킬 수가 없다. 비교가 매사 부정적인 것은 아니지만 손해다 싶으면 하지 말 일이다.
젊었을 때에는 행복이 저 너머 있다고 생각을 하였다. 어젠가 행복해 지겠지. 그러나 나이 들면서 느껴진다. 지금 내 옆에 행복이 있음을. 옆에 다가서 있는 ‘행복을 느끼느냐, 느끼지 못하느냐’의 차이라는 것을. 전에는 자리 잡히고 먹고 살만 해 지면 행복해 질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학생 때는 면허를 받으면, 전공의 때는 전문의가 되면, 전임강사 때는 정교수가 되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것은 행복이 아니라 순간순간의 기쁨이었다. 지금은 옆의 행복을 자주 느낀다. 저 너머에 큰 행복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이제 하지 않는다. 내 옆의 조그마한 행복은 풍선 같아서 느끼면 느낄수록 커질 수도 있다. 풍선하고 다른 점은 터지지 않는 다는 것이다.
인간관계는 어렵다. 예전에 사랑에 대한 이야기 중에 ‘주는 것’이 사랑이라는 이야기가 있었다. 인간관계가 어려운 것은 계산이 포함되어 있어서이다.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무한의 신뢰를 가지고 베푼다면 고민할 일이 없어질 것이다. 그러나 쉽지 않은 일임은 누구나 알고 있다. 손해 보는 것 같은 생각이 든 일이 나중에 가서는 잘한 일임을 느낀 적이 종종 있다. 전부는 아니더라도 종종 손해 보며 살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편해 질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책 내용 중에서
‘세계는 아주 단순하다.’
‘인간은 변할 수 있다, 세계는 단순하다, 누구나 행복해질 수 있다.’
‘스스로 의미를 부여한 주관적인 세계에 살고 있지. 객관적인 세계에 사는 것이 아니라네.’
‘자네에게 그런 ‘용기’가 있을까?‘
‘인간은 변할 수 있어. 그뿐 아니라 행복해 질 수도 있지.’
첫 번째 밤
트라우마를 부정하라
“자네가 불행한 것은 과거의 환경 탓이 아니네.
그렇다고 능력이 부족해서도 아니고,
자네에게는 그저 ‘용기’가 부족한 것뿐이야.“
서재로 간 청년은 구부정한 자세로 서재에 놓여 있는 의자에 앉았다. 그는 왜 그토록 철학자의 지론에 거부반응을 보이는 것일까? 분명한 이유가 있다. 청년은 어린 시절부터 스스로에게 자신이 없었다. 출신이나 학력, 외모에 관해서도 심한 열등감을 느꼈다. 그래서일까? 남의 시선을 지나치게 의식하는 면이 있었다. 그리고 남의 행복을 진심으로 축복하지 못해 늘 자기혐오에 빠졌다. 청년에게는 철학자의 주장이 모두 허황된 소리로 들렸다. 26쪽 중에서
아들러 심리학은 고루한 학문이 아니라 인간 이해의 진리이자 도달점이라고 할 수 있지.
경험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경험에 부여한 의미에 따라 자신을 결정하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어떠한 ‘목적’을 따라 살고 있네.
“중요한 것은 무엇이 주어졌느냐가 아니라 주어진 것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교환이 아니라 고쳐나가는 것이야.
생활양식이 선천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한 것이라고 한다면 다시 선택하는 것도 가능할 테지.
변하지 않는 것은, 스스로 ‘변하지 않겠다’고 결심했기 때문이네.
아들러 심리학은 용기의 심리학일세.
지금의 생활양식을 버리겠다고 결심하는 걸세.
자네는 ‘자네’인 채로 그저 생활양식을 고르기만 하면 되는 걸세.
철학자 : 내가 아는 젊은 친구 중에 소설가를 꿈꾸면서도 도무지 글을 한 줄도 쓰지 못하는 이가 있네. 그의 말에 따르면, 일하느라 바빠서 소설 쓸 시간이 없고 그러다 보니 원고를 완성하지 못해서 문학상에 응모할 여력도 없다는 거야. 과연 그럴까? 사실은 응모하지 않음으로써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남겨두고 싶은 거라네. 남의 평가를 받고 싶지도 않고, 더욱이 졸작을 써서 냈다가 낙선하게 되는 현실에 마주치고 싶지 않은 거지. 시간만 있으면 할 수 있다, 환경만 허락된다면 쓸 수 있다, 나는 그런 재능이 있다는 가능성 속에서 살고 싶은 걸세. 아마 그는 앞으로 5년, 10년이 지나면 “이제는 젊지 않으니까” 혹은 “가정이 있어서”라는 다른 핑계를 대기 시작하겠지. 65-66쪽 중에서
두 번째 밤
모든 고민은 인간관계에서 비롯된다.
“아무리 어려워 보이는 관계일지라도
마주하는 것을 회피하고 뒤로 미뤄서는 안 돼.
가장 해서는 안 되는 것이 이 상황.
‘이대로’에 멈춰 서 있는 것이라네.“
청년은 약속한 대로 정확히 일주일 후에 철학자의 서재를 방문했다. 사실은 2-3일 후에라도 쳐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생각을 거듭하는 동안에 청년의 의심은 확신으로 변했다. 즉 목적론은 궤변이고 트라우마는 확실히 존재한다. 인간은 과거를 잊을 수 없거니와 과거에서 해방될 수도 없다. 오늘이야말로 괴짜 철학자의 지론을 깨뜨리고 모든 논란의 종지부를 찍으리라. 72쪽 중에서
단점만 눈에 들어오는 것은 자네가 ‘나 자신을 좋아하지 말자’라고 결심했기 때문이야.
철학자는 말했다. 자네는 대인관계를 두려워한 나머지 자기 자신을 싫어하게 된 것이라고. 자신을 싫어함으로써 인간관계로부터 도망친 것이라고. 그 지적은 청년을 크게 동요시켰다.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심장을 꿰뚫는 듯한 말이었다. 하지만 인간의 고민이 전부 인간관계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주장에는 절대 동의할 수 없었다. 아들러는 인간이 안고 있는 문제를 사소한 것으로 치부했다. 하지만 나는 그런 세속적인 고민으로 괴로워하는 것이 아니다! 84쪽 중에서
우리를 괴롭히는 열등감은 ‘객관적 사실’이 아니라 ‘주관적 해석’이라는 건가요?
열등 콤플렉스는 자신의 열등감을 변명거리로 삼기 시작한 상태를 가리킨다네.
원래는 어떤 인과관계도 없는 것을, 마치 중대한 인과관계가 있는 것처럼 스스로에게 설명하고 납득한다고 말이야.
건전한 열등감이란 타인과 비교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이상적인 나’와 비교해서 생기는 것이라네.
지금의 나보다 앞서 나가려는 것이야말로 가치가 있다네.
인간관계의 중심에 ‘경쟁’이 있으면 인간은 영영 인간관계에 대한 고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불행에서 벗어날 수가 없어.
인간관계를 경쟁으로 바라보고 타인의 행복을 ‘나의 패배’로 여기기 때문에 축복하지 못한 걸세.
잘못을 인정하는 것, 사과하는 것, 권력투쟁에서 물러나는 것. 이런 것들이 전부 패배는 아니야.
개인이 사회적인 존재로 살고자 할 때 직면할 수밖에 없는 인간관계. 그것이 인생의 과제네.
아들러 심리학은 타인을 바꾸기 위한 심리학이 아니라 자신을 바꾸기 위한 심리학일세.
인간은 ‘이 사람과 함께 있으면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사랑을 실감할 수 있네.
인간이 혼자 사는 것은 원칙적으로 불가능하며, 사회적인 맥락 속에서만 ‘개인’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아들러 심리학에서는 개인으로서의 ‘자립’과 사회에서의 ‘협조’를 목표로 내걸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그런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까? 여기서 ‘일’, ‘교우’, ‘사랑’이라는 세 가지 과제를 넘어서라고 말한다. 인간이 살아가면서 직면할 수밖에 없는 인간관계의 과제를. 청년은 여전히 그 진정한 의미를 이해할 수 없었다. 135쪽 중에서
여러 가지 구실을 만들어서 인생의 과제를 회피하려는 사태를 가리켜 ‘인생의 거짓말’이라고 했어.
세 번째 밤
타인의 과제를 버리라
“행복해지려면 ‘미움받을 용기’도 있어야 하네.
그런 용기가 생겼을 때, 자네의 인간관계는 한순간에 달라질 걸세.“
고민을 거듭한 끝에 2주일 후 청년은 다시 철학자의 서재를 찾았다. 자유란 무엇인가. 인간은, 나는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인가. 나를 속박하고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청년에게 주어진 숙제는 너무도 무거웠다. 납득할 수 있는 해답은 나오지 않았다. 생각하면 할수록 청년은 자신이 부자유스럽다는 것을 깨달을 뿐이었다. 146쪽 중에서
아들러 심리학에서는 타인에게 인정받기 원하는 마음을 부정한다네.
타인의 기대 같은 것은 만족시킬 필요가 없다는 말일세.
청년의 분노는 최고조에 달했다. 인정욕구를 부정하라고? 타인의 기대를 만족시키지 말라고? 더 자기 마음대로 살라고? 대체 이 철학자는 무슨 말을 하고 있단 말인가. 인정욕구야말로 인간이 다른 사람과 교류하고 사회를 형성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가장 큰 동기가 아니던가. 청년은 생각했다. 만약 ‘과제의 분리’라는 개념이 나를 납득시키지 못한다면…… 나는 이 사람을, 그리고 아들러를 평생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 158쪽 중에서
‘이것은 누구의 과제인가?’라는 관점에서 자신의 과제와 타인의 과제를 분리할 필요가 있네.
자신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은 자신밖에 없네.
누구도 내 과제에 개입시키지 말고, 나도 타인의 과제에 개입하지 않는다.
과제의 분리는 인간관계의 최종 목표가 아니야. 오히려 입구라고 할 수 있지.
철학자가 설명한 ‘과제의 분리’는 매우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확실히 모든 고민이 인간관계에서 비롯된다고 여긴다면 과제의 분리는 유용하다. 이런 관점을 가진다면 세계는 더할 나위 없이 단순해질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찔러도 피 한 방울 통하지 않는다. 사람다운 따뜻함도 느껴지지 않는다. 이런 철학을 받아들일 수 있단 말인가! 청년은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 크게 소리쳤다. 178쪽 중에서
타인의 과제에 개입하는 것이야말로 자기중심적인 발상이지.
“자유란 타인에게 미움을 받는 것”
남이 나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리든 마음에 두지 않고, 남이 나를 싫어해도 두려워하지 않고, 인정받지 못한다는 대가를 치르지 않는 한 자신의 뜻대로 살 수 없어.
인간관계의 카드는 언제나 ‘내’가 쥐고 있다는 말일세.
네 번째 밤
세계의 중심은 어디에 있는가
“자네도 나도 세계의 중심이 아니야. 내 발로 인간관계의 과제에 다가가지 않으면 안 되네. ‘내가 이 사람에게 무엇을 줄 수 있을까?’를 생각해야지.”
하마터면 속아 넘어갈 뻔했다! 그 다음 주, 청년은 결의에 찬 얼굴로 문을 두드렸다. 확실히 과제를 분리한다는 발상은 유용하다. 지난번에는 너무 쉽게 납득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렇게 사는 인생은 너무 고독하지 않은가. 과제를 분리하고 인간관계의 짐을 던지는 것은, 사람 사이의 인연을 끊으라는 소리나 진배없다. 심지어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으라고? 만약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는 것이 자유라고 한다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부자유를 택하리라! 200쪽 중에서
타인을 친구로 여기고, 거기서 ‘내가 있을 곳은 여기’라고 느낄 수 있는 것이 ‘공동체 감각’일세.
‘남에게 어떻게 보이느냐’에만 집착하는 삶이야말로 ‘나’ 이외에는 관심이 없는 자기중심적인 생활양식이라는 것을.
소속감이란 태아나면서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획득하는 것일세.
아들러 심리학의 핵심 개념이자 가장 평가가 갈리는 이론이라는 공동체 감각. 확실히 그 개념은 청년이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너는 자기중심적이다”라고 지적받은 것도 불만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해할 수 없던 것은 우주와 무생물까지 포함하는 공동체의 범위다. 대체 아들러는, 그리고 이 철학자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일까? 청년은 얼굴을 찡그리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216쪽 중에서
관계가 깨질까 봐 전전긍긍하며 사는 것은 타인을 위해 사는 부자유스러운 삶이야.
아들러 심리학에서는 온갖 ‘수직관계’를 반대하고 모든 인간관계를 ‘수평관계’로 만들자고 주장하네.
인간관계를 수직으로 받아들이면, 상대를 자신보다 아래라고 보고 개입을 하네.
수평관계에 근거한 지원을 아들러 심리학에서는 ‘용기 부여’라고 하지.
타인을 ‘평가’하지 않는 것이네.
자신의 주관에 따라 ‘나는 다른 사람에게 공헌하고 있다’고 느끼는 것.
공동체 감각에 대한 논의는 점점 혼돈으로 빠져들었다. 칭찬하지 마라. 야단쳐서도 안 된다. 남을 평가하는 말은 전부 ‘수직관계’로부터 비롯되니 삼가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내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고 느낄 때에만 자신의 가치를 실감한다. ……이러한 논리에는 어딘가 큰 구멍이 있다. 청년은 그렇게 느꼈다. 뜨거운 커피를 마시는데 그의 뇌리에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으니, 자신의 할아버지였다. 237쪽 중에서
타인을 ‘행위’의 차원이 아닌 ‘존재’의 차원에서 살펴야지.
“누군가가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다른 사람이 협력하지 않더라도 그것은 당신과는 관계없습니다. 내 조언은 이래요. 당신부터 시작하세요. 다른 사람이 협력하든 안 하든 상관하지 말고.”
다른 사람과, 한 명이라도 좋으니 수평관계를 맺을 것.
의식상에서 대등할 것, 그리고 주장할 것은 당당하게 주장하는 것이 중요하단 말이지.
다섯 번째 밤
‘지금, 여기’를 진지하게 살아간다
“우리 인생에도, ‘길잡이 별’이 필요하네.
그 별은 이 방향으로 쭉 가다 보면 행복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믿음을 주는 절대적인 이상향이라네.“
청년은 생각했다. 아들러 심리학은 철저히 인간관계에 초점을 맞춘다. 그리고 인간관계의 최종 목적지는 공동체 감각에 있다. 하지만 정말 그것만으로도 좋은 걸까? 우리는 차원이 더 높은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아닐까? 나는 어디로 향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 걸까? 생각할수록 청년은 스스로가 하찮은 존재로 여겨졌다. 254쪽 중에서
‘변할 수 있는 것과 변할 수 없는 것’을 구별해야 하네.
우리는 능력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네. 그저 ‘용기’가 부족한 거지.
‘내가 어떻게 할 것인가’ 만 생각하면 되네.
신뢰하는 것을 두려워하면 결국은 누구와도 깊은 관계를 맺을 수 없다네.
타자공헌이란 ‘나’를 버리고 누군가에게 최선을 다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의 가치를 실감하기 위한 행위인 셈이지.
교환 불가능한 ‘이런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자기수용. 인간관계에 회의를 품지 말고 무조건 신뢰하라는 타자신뢰. 청년에게 이 두 가지는 나름대로 납득이 되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타자공헌에 관해서는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만약 그 공헌이 ‘타인을 위한 것’이라면, 그건 고통에 찬 자기희생에 지난지 않는다. 반대로 만약 그 공헌이 ‘나를 위한 것’이라면, 그건 완벽한 위선이다. 이쯤에서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 한다. 청년은 의연한 표정으로 말문을 열었다. 274쪽 중에서
남이 내개 무엇을 해주느냐가 아니라, 내가 남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생각하고 실천해보라는 걸세.
어떤 경우라도 공격하는 ‘그 사람’이 문제이지 결코 ‘모두’가 나쁜 것은 아니란 사실일세.
일을 구실로 다른 책임을 회피하려는 것에 불과하거든.
인정욕구를 통해 얻은 공헌감에는 자유가 없지. 우리는 자유를 선택하면서 더불어 행복을 추구하는 존재라네.
평범해질 용기. 이 얼마나 두려운 말인가. 아들러는, 그리고 이 철학자는 내게 그런 길을 선택하라는 건가? 아무런 변화도 없이, 그저 수많은 사람 중의 한 명으로 살아가란 말인가? 물론 나는 천재가 아니다. ‘보통 사람’으로 사는 것을 선택해야 할 지도 모른다. 평범하기 짝이 없는 나를 받아들이고, 평범하기 짝이 없는 일상에 몸을 맡겨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싸우련다. 결과가 어찌되든, 마지막까지 이 사람한테 반기를 들겠다. 틀림없이, 지금 우리의 논의는 핵심에 다가가고 있다. 청년의 심장박동은 빨라지고, 꽉 쥔 손에는 땀이 흥건했다. 298-299쪽 중에서
우리는 ‘지금, 여기’를 살아갈 수밖에 없어.
춤을 추고 있는 ‘지금, 여기’에 충실하면 그걸로 충분하니까.
‘지금, 여기’에 강렬한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면 과거도 미래도 보이지 않게 되네.
‘지금, 여기’를 진지하게 사는 것, 그 자체가 춤일세.
‘타인에게 공헌한다’는 길잡이 별만 놓치지 않는다면 헤맬 일도 없고 뭘 해도 상관없어.
세계란 다른 누군가가 바꿔주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나’의 힘으로만 바뀔 수 있다는 뜻이지.
청년은 천천히 신발 끈을 매고 철학자의 집을 나섰다. 언제 내렸는지 문 너머는 온통 하얀 눈으로 가득했다. 하늘에 둥실 떠오른 보름달은 부옇게 빛을 발하며 발치에 쌓인 눈을 비추고 있다. 어쩌면 공기가 이렇게 맑을까. 달빛은 또 얼마나 아름답고, 나는 이 새로운 눈을 밟고 힘차게 한 걸음 내딛을 것이다. 청년은 크게 심호흡을 하고 밤새 듬성듬성 난 수염을 쓰다듬으며 나지막이 말했다. 세계는 단순하다, 인생 또한 그러하다, 라고. 321쪽 중에서
2015년에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었던 책이다. 읽어볼 만한 좋은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