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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_constru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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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수석 합격생’들의 그 후(끝)…

‘뺑뺑이’로 불리우던 고교 평준화제도는 1974년 서울과 부산에서 처음으로 도입되게 됩니다.
당시 표면적 명분은 암기식-주입식 고교 교육의 폐단을 정상화하여 입시과열을 해소하고 고교간 학력차와 명문고의 집중현상을 막아보자는 취지였다고 합니다. 하지만고교 진학을 앞둔 대통령의 영식 박지만씨를 염두하여 평준화제도가 도입됐다는 말이 ‘정설’처럼 알려지고 있지요. 박지만씨는 74년 그 해 ‘뺑뺑이’로 중앙고에 진학하게 됩니다.

평준화 제도는 서울-부산에 이어, 그 이듬해인 75년 대구-인천-광주로, 그리고 79년에는 대전-전주-마산-청주-춘천-제주-수원 등 전국 대도시 대부분으로 확대됩니다.주지하듯 1975년까지는 서울대 전체수석 합격자 대부분이 경기고, 서울고 등 서울의 전통 명문고생 ‘판’이었던 반면, 첫 평준화 세대가 시험을 치루는 77년도 부터는 서울 명문고 ‘싹쓸이 현상’이 사그라들게 됩니다.

그럼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1970년대 후반기 서울대 전체수석 열전을 계속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사실 지난번 포스팅에 관심이 별로 없었더라면 나머지는 그 포스팅에 덧붙여 정리해 놓으려고 생각 했드랬는데, 지난번 내용에 무려 연인원 1만 3천여명(‘제블’ 신기록^^)이 넘는 분들께서 방문하여 제게 즐거움을 주셨기에별도의 포스팅으로 한번 더 올려보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지난번 방문해 주신 분들께 감사드리며 70년대 후반 서울대 전체수석자 열전을 마저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대체적으로 1956년생부터 1960년생들이 여기 해당될 것입니다.

76학년도 서울대 전체수석 합격자는 인문사회계열에 지원한 경북고생 한위수씨 였습니다.
대구 출생의 한위수씨는 단칸 셋방의 어려운 가정형편에스스로 학비를 벌며 공부하여 고교 3년간 1등을 독차지한 수재로 알려졌습니다. 682점 만점에 577점으로 서울대 전체수석의 영예를 안게 됩니다. 한위수씨는 그후 서울대와 미 펜실베니아대 석사학위를 수료하고 부산고법과 서울고법 판사를 거쳐, 현재는 서울고법 부장판사를 지내고 있습니다.

또 그 해 자연계열 수석합격자로 의예과를 지망한 이동수씨(경기고, 562.5점)는 서울 의대에서 석사, 박사학위 수료 후, 현재서울대 의과대 핵의학교실 교수로 있습니다.
아주대 경영학부 구형건 교수(경남고)가 자연대 이공대에 수석합격한 동기생 입니다.

한위수피.jpg한위수.jpg 이동수피.jpg이동수.jpg구형건.jpg

/한위수 서울고법 부장판사/이동수 서울의대 교수/구형건 아주대 교수

이듬해인 1977년.
자연계열의 김대중(만점 566점중 494.4점)씨와 인문사회계열 한문영씨(485점)가 서울대 계열별 수석을 차지합니다. 자연계열 수석 김대중씨는 서울 대신고를 수석으로 입학하여 수석으로 졸업하고,고교 재학중에는 전국수학경연대회에서도 1등을 차지한 수재 였습니다.수석 소감을 통해서울대 의예과에 지망하여 교수가 되는 것이 꿈이라고 밝혔던 바, 서울대 석-박사 과정을 거쳐, 현재 삼성 서울병원 심장내과 과장, 성균관대 의대 교수직에 있습니다.
서울 대일고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인문사회계열에 수석으로 합격한 한문영씨는 전편에서 소개드렸던 한태숙씨(72년 서울대 전체수석 합격)의 동생으로 ‘수재집안’ 답게 5년 간격으로 형과 동생이 서울대 전체수석의 영광을 차지한 드믄 케이스 입니다.’가문의 영광’이 바로 이런 경우 겠지요.
한문영씨는 법대를 지망하여 법관이 되겠다고 밝혔으나 인물정보에 수록되지 않아근황을 알 수 없었으나, 그후 임경윤님께서근황을 전달해 주셨기에추가하겠습니다.

77학번의 한문영은 23회 사법시험 합격 후 연수원 13기로 수료하였고, 미국 유학후 미국변호사자격도 취득하여 그곳 로펌에 있다가 최근에 김앤장으로 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임경윤님 제보-

강범모(제물포고) 고려대 언어과학과 교수, 이광수(계성고) 숙명여대 정보과학부 컴퓨터과학전공 교수 등이 그 해 서울대 단과대별 수석 합격생들 입니다.

한문영피.jpg김대중피.jpg김대중.jpg강범모.jpg이광수.jpg

/한문영군과 김대중군 /김대중 교수/강범모 교수 /이광수 교수

(*당시 신문표기에는 왼쪽이 한문영군, 오른쪽이 김대중군으로 표기되어 있지만 김대중 교수의 지금 사진과 비교해보면 당시 신문의 이름 표기가 뒤바뀐 것으로 생각됨)

78년 서울대 전체수석은 성동고를 졸업하고 자연계열 이공계에 지망한 차국린씨(566점 만점에 490점)와 인문사회계열에 수석합격한 대구 계성고의 김동욱씨(488.6점)였습니다. 차국린씨는 미 캘리포니아대 물리학 석사, 스탠포드대 물리학 박사과정을 이수하고 현재 서울대 자연과학부 물리학부 교수로 있습니다. 그의 한살 터울의 형 차국헌씨 또한 서울대 공과대 응용화학부 교수로 형제가 서울대 교수로 재직중입니다.

인문사회계열 수석합격자 김동욱씨는 서울대 행정학 석사, 미 오하이오 주립대 행정학 박사후, 현재는 서울대 행정대학원 행정학과 부교수로 있습니다.

차국린피.jpg차국린.jpg김동욱피.jpg김동욱.jpg

/차국린 서울대 물리학부 교수 /김동욱 서울대 행정학과 교수

문제의 1979년. 궁정동에서 총성이 울렸던 그 해 입니다.
79년 입시에서는 고교 평준화 지역과 비평준화 지역간 합격차가 크게 벌어져 주목을 받았습니다.
비평준화 지역의 지방 명문고인 전주고, 대전고, 마산고, 진주고, 춘천고 등이 서울의 전통 명문고를 제치고 압도적으로 많은 서울대 합격자를 내는 현상이 두드러졌던 것이지요.평준화 지역 서울의 경우 서라벌고가 92명지원에 47명이 합격자를 배출하여 최다 합격자를 배출했고, 중동고 43명, 대성고 39명, 명지고 30명, 마포고 28명, 경동고 25명, 경신고 27명, 대광고가 14명으로50명을 채 넘기지 못했습니다. 반면 비평준화의 지방 명문고는 전주고 157명, 마산고 107명, 대전고 102명등 1백명 이상의 합격생을 배출하여 지방 명문고가 초강세를 드러낸 특징을 보였던 해입니다.

1979년 서울대 전체수석은 650점 만점에 583점을 얻은 김시홍씨 였습니다.
중대부속국민학교-중대부중-장훈고에서 한번도 1등을 놓치지 않은 수재로서, 예비고사에서는 2점이 모자라 아깝게 전국수석을 놓쳤다고 합니다. 물리학을 전공하여 학자가 되는 것이 꿈이라고 밝혔으나, 이분 또한 인물정보에는 수록되어 있지 않아 그 꿈을 실현했는지 확인하기 어려웠습니다.
유치원때부터 한글을 익혀 많은 동화집을 읽었고(그땐 이런것도 뉴스밸류?), 국민학교 때는 중학생 누나의 틀린 한자를 고쳐줄 만큼 머리가 뛰어나 동네 어른들을 놀래켰다고 합니다.

광성고 출신 김시현 변호사(법대 수석), 대성고를 졸업한 정웅 동국대 반도체과학 교수(공대 수석), 홍대부고 출신의 김호중 삼성서울병원 호흡기내과 과장(의대 수석), 황익주 서울대 사회과학대 인류학과 부교수(사회대 수석)등이 그의 수석 동기생들 입니다.

김시홍피.jpg 김시현.jpg정웅.jpg김호중.jpg 황익주.jpg

/’79년 전체수석 김시홍씨 /김시현 변호사, 정웅 교수, 김호중 교수, 황익주 교수

뒤숭숭하던 1980년도 팔공학번. 신입생으로 ‘서울의 봄’을 캠퍼스에서 맞은세대입니다.
그 해 서울대 자연계열 수석합격은 송홍식씨.
서울 상대 출신의 공인회계사 송성순씨의 2남 1녀중 2남으로 태어나 청운중과 충암고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684점 만점에 580.3점을 받아 자연계열 수석을 차지했습니다. 이 분 역시 역시 인물정보에 수록되지 않아 근황을 파악하기 어려웠습니다.

80년 서울대 인문사회계열 수석합격자 박병무씨.
대일고를 졸업하고 650점 만점에 557점(예시 330점 포함)을 받아 인문계열 수석으로 법과대에 진학하였습니다.
수석 소감에서 ‘유능하고 진보적인 법관’이 되는 것이 꿈이라고 밝혔던 바, 대학 재학중에 제24회 사법시험에 최연소 합격, 서울 법대 수석졸업, 김&장 법률사무소 변호사, 로커스홀딩스와 플레너스엔터테인먼트 사장직을 거쳐 지금은 뉴브릿지 캐피털코리아와 하나로텔레콤 대표이사 사장직을 맡고 있습니다.이 분 또한 국민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단 한번도 1등을 놓치지 않은 수재중의 수재였다고 합니다.19세의 나이에 ‘진보적인 법관’이 되겠다고 밝힌 점이 매우 이채롭습니다.

송홍식피.jpg박병무피.jpg 박병무.jpg 이선민.jpg

/송홍식(좌측)과 박병무(우측) /박병무사장/이선민 기자

80년도에도입시에서도 비평준화 지방 명문고의 초강세가 그대로 이어졌습니다.
특수지 학교로 지정돼 비평준화고로 남았던 서울 우신고가 160명, 전주고 155명, 대전고 131명, 마산고 109명의 합격자를 배출, 비평준화 지역의 명문고가 100명 이상의 합격자를 냈습니다.
반면 평준화 지역인 서울에서는 서울고(59명), 서라벌고(53명)만이 50여명을 넘었을뿐, 대일고(49명), 보성고(43명)등이 40명을 넘기는 선에 그쳐, 청주고(60명), 춘천고(65명)보다도 적었습니다.

한가지 덧붙이자면 80년 그 해 수험생중조선일보 현직기자 중에도수석 합격생이 한 분 계십니다.
숭문고를 졸업하고 그해 서울대 인문계열 인문대에 수석을 차지한 이선민(550점 득점) 문화부 차장이 그 주인공.

현재 조선일보 문화면 Books섹션 편집장을 맡아, 매주 토요일자 ‘편집자 레터’를 고정 집필하고있습니다. 서울대 국사학과에 진학하여 박사과정을 수료했고 사내에서는 학구파형 ‘선비기자’로 알려져 있기도 합니다.

이쯤에서 서울대 전체수석자 열전을 마무리 하겠습니다.

아무튼 서울대 전체수석자 자료를 정리하면서 느낀 것은 ”수재 집안’의 내력은 분명 있다’라는 점과, 또 그들의 천재성은 어릴때 부터 뭔가 다른 ‘싹수’를 보이는 공통점이 있다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인생에서 ‘부와 명예’가 전부가 아니듯, ‘공부 혹은 성적’ 또한 인생의 전부는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평생을 치열한 경쟁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우리네 사회에서,’공부 혹은 성적’은 주요한 개인의경쟁력이며’성공으로 가는 길’의 ‘보조 열쇠’ 정도는 되지 않을까생각해 보네요. 세상이다원화되고 시대가빠르게 바뀌고는 있습니다만….

P.S)포스팅 후 추가 제보내용
### ‘69년 서울대 전체수석 한석군은 한글 이름을 딴 별명 ‘한 돌(Ein Stein)’로 불리며 머리 좋은 아인쉬타인(Einstein)이라고 들었던 것 같습니다. 69년도에 수석 입학 후, 법대를 졸업하고 당시 (주)대우에서 임원으로 근무중, 중동에서 마유미의 KAL 폭발사건으로 추락하는 사건에 희생되어 사망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서울대 수석 입학생의 영재로서 흔히, 법조계나 학계가 아니라, 산업역군으로 참여 기여하다가 희생을 한, 한 석 군에게 조의를 다시 표합니다. 아마, 상세 정보는 서울고21회 동기회로 부터 알 수 있으리라 생각됨 (저는 이과생이라 문과생들이 더 상세한 정보를 알고 있으리라 추정)
-동기생 박승규님 제보-

### 77학번의 한문영은 23회 사법시험 합격 후 연수원 13기로 수료하였고, 미국 유학후 미국변호사자격도 취득하여 그곳 로펌에 있다가 최근에 김앤장으로 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임경윤님 제보-


### 수석합격자 얘기중 인물사전에 올라 있지 않다고 한 강영석씨(물리학과 73학번)의 소식을 알고 있어 오현기씨에게 알려 드리려고 합니다. 강씨는 서울대 재학중 도미하여 UC Berkeley 에서 물리학 박사를 받고 이어 Yale 대학 Medical School 을 졸업하고 지금 미국 Palo Alto(California) 에서 방사선 전문 의사로 살고 있습니다. 유명한 violinist 강동석씨가 그의 형입니다.
– 박정수님 제공-
세분께 감사드립니다. ^^

18 Comments

  1. noonoo

    2006년 4월 30일 at 1:38 오전

    오…이선민 기자님…
    아…역시 그랬구만요…^^

    재밌는데 벌써 마무리 하시나요??
    근황을 알 수 없는 몇몇 분들이 진짜 궁금하네요…
    나머지분들이야 예상됐던 코스대로 살아오신분들이니 그러려니 하는데…

    에… 서울대 나오고 인생 영 찌그러진 잉간들도 꽤 있을 거 같은데여…ㅋ

    동창회 안나오는 사람들만 추적해서 기사화해도 재밌을 거 같더군요…ㅜ.ㅜ
    참 재밌는 케이스…종종 봤씀당…ㅋㅋ
       

  2. 권희숙

    2006년 4월 30일 at 2:41 오전

    조카는학원도아이가,서울대합격..잉.고대가취업1등이라네..2006,학벌무슨머니1천억이..1등.,,다다.머니머니,,디지면,돈1원도다다두고가,,우리어르신도재물많아도개뿔.,,다다현대만위세노름야..   

  3. 권희숙

    2006년 4월 30일 at 2:45 오전

    전혜린여사도,울대,,우리딸,조기졸업해..이사회는….백빽소리,움메기죽어,,,지상에학벌문화..물러가라,,애말,,빽,연줄로..,,마마,덕좀보자..마집,덕좀,속으롬ㅁㅁ년아,..징그러워..문화참,,   

  4. 권희숙

    2006년 4월 30일 at 2:49 오전

    갈길먼국,,,선택된삶도거부.애말,아버지가돈많아..애들….애말,,게꺼야..애비꺼지..,,누굴닮아가지고..국,,국,,의식구조란…머니방말,,,,머니위에,인간이,,,,,…동소리같은인간들아,,,똥똥인간이모..뒷간인간들소리는..   

  5. 권희숙

    2006년 4월 30일 at 2:53 오전

    새벽.2,50분.사이버..내취향.노노.사이버생활야2006…알아야해서
    왜왜…
    인간들..뇌를주셔.
    잉,,잉.
    기자님건강,,,내내좋은일만..   

  6. ○ minuette.○

    2006년 4월 30일 at 7:35 오전

    그렇군요..? 이선민 기자님 그런 훌륭한 S – N – U. 수석생이시군요..? 뒤늦게나마 열렬한 축하드립니다..ㅉㅉㅉ..ㅎㅎ 조선일보 독자로서 반갑습니다..그동안 오현기님의 <서울대 수석생들의 그후> 흥미있는 리포트 참 재미있었구요 특히 오늘 대단원의 에필로그 부분이 무척 인상적입니다..동감입니다..그리고 noonoo님..? 역시 오늘 의미있는 대단원의 1등 골인 성공하셨네요..ㅎㅎ 그렇죠..? 클리프 리차드의 congratulations..!! 빵빠레라도 울려야 되지않을까요..ㅎㅎ ? 즐거운 일요일입니다.. 모두모두 행복한 시간 보내시기 바랍니다.. Merci..A bien tot..   

  7. 퓰리처

    2006년 4월 30일 at 2:20 오후

    서울대는 인간성 보다는 실력위주로만 사람을 뽑았기에 황우석, 안규리 같은 조작의 대가들도 배출하였지요!   

  8. 푸른하늘

    2006년 4월 30일 at 5:33 오후

    인간성보다는 실력위주라… 글쎄요. 실력조차 확신할수있을까요? 사지선다문제를 제한된 시간내에 출제자의 의도대로 풀어내는 능력은 분명 하나의 기술임에는 틀림없겠으나… 역시 바둑이나 장기처럼 특정기술일 뿐입니다. 물론 암기력 이외에 상당한 두뇌의 효율성이 요구되기에 머리가 나쁘면 고득점이 어렵겠지만 그 "짓"을 가장 잘했다고 해서 수재다, 천재다 부르는 것은 좀 우습다는 말이지요. 그저 다재다능하고 (무수한 과목을 골고루 일정수준이상 해야하므로) 성실하며 (백프로 인정) 이해력과 암기력이 특출나게 우수하다고 해야겠지요. 진정한 수재나 천재는 대입성적이 아니라 노벨상 (평화상 제외), 필즈상, 클라크상, 퓰리처상 뭐 이런 수상여부로 판가름하는것이 더 정확하리라 봅니다. 대입성적은 물론 유치원 졸업성적보다야 더 정확하겠으나 그 연장선상에 있을 따름이라는 거죠.

    옛날 한때 어릴때는 장학퀴즈 장원이 어마어마하게 보여서 저 사람들 나중 재벌/대통령 자리는 따놓은 당상이겠구나 생각했었는데… 커서보니 참 별거 아니더군요. 남이 출제한 문제를 잘 푸는 사람은 암만 잘 풀어봤자 출제자보다 못하거나 비슷한 수준일 뿐 그이상 증명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스스로 문제를 발견하는 능력에 비하면 한참 뒤지는 능력이죠.    

  9. 종이등불

    2006년 4월 30일 at 5:45 오후

    이 나라의 최고 수재들의 과거의 현재의 모습을
    무척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수재였던 만큼,
    열심히 노력했던 만큼
    다들 빛나는 삶을 살고 있군요.

    수고하셨습니다.   

  10. 심재현

    2006년 4월 30일 at 7:59 오후

    오현기씨 당신생각에 과연 당시의 권력의 박정희가 박지만의 고교를위해 뺑뺑이를 만들어냈다 이말이해가 가나요 당신 몇살인지 참으로 어리석군요    

  11. 오현기

    2006년 5월 1일 at 12:37 오전

    ^^…    

  12. 김의순

    2006년 5월 1일 at 6:55 오전

    그 많은 수재를 키워내던 내 고등학교의 영화여…
       

  13. 술한잔

    2006년 5월 1일 at 9:54 오전

    서울의대간 송홍식선생같은 경우는 동기생들에게 한번만 전화해봐도 간단하게 알수 있는데 인물정보만 가지고 기사를 쓰셨나보네요. 옥의티라고나할까요? 흠미위주의 기사라 유감입니다   

  14. Hansa

    2006년 5월 1일 at 11:20 오전

    서울대 수석합격자중에 ‘악인’이 없음에 유의합니다.
    수재, 영재는 역시 국가의 자산입니다.
    이분들의 재능을 국가를 위해 발휘할 토대를 마련해줘야 하는디..

    오현기님 연이어 재밌게 읽었습니다.
    애쓰셨습니다. 하하
    고맙습니다.

       

  15. 임경윤

    2006년 5월 1일 at 1:26 오후

    77학번의 한문영은 23회 사법시험 합격 후 연수원 13기로 수료하였고, 미국 유학후 미국변호사자격도 취득하여 그곳 로펌에 있다가 최근에 김앤장으로 간 것으로 알고 있음   

  16. 이은주

    2006년 10월 5일 at 2:46 오후

    1970년대의 서울대 본고사 입시는 가히 입시의 지존였습니다. 국-영-수에서 50%를 골고루 맞으면 거의 합격였습니다. 특히 이과이든 문과이든 수학 점수에서의 편차가 당락을 결정하는 결정적인 변수 일때가 많았는데 그것은 문항수가 불과 5~7개였기 때문입니다. 즉 100점 만점에 개당 15~20점씩이 걸린 수학문제를 어떻게 푸느냐의 문제는 일면 "운"도 작용하는 것였습니다.
    즉 총 단원이 약 20여개가 되는 고등학교 수학 전범위에서 출제되는 5~7개의 문제 중 내가 ‘좋아하는’ 문제가 포함되느냐 아니냐의 문제인 것입니다. 따라서 70년대의 서울대 입시에서 특히 당락을 넘어 수석여부까지를 가늠하는 척도가 이러한 수학문항간의 큰 "gap"요인이 있었음을 감안한다면 다소의 "운적" 요소의 우연성이 있었음을 부정할수 없을 것입니다(물론 영어나 국어 등에서 차별성이 나타날수도 있으나 적어도 선두경쟁자들간의 차이는 불과 3~5점였을 것입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구태여 "서울대 수석입학자"들을 나름대로 분석하고자 한 본 시도는, 그러나 불과 0.001% 미만 정도의 "우연적" 차별 속에서 수석이라는 영광을 차지한 분들과 그렇지 못했던 무명의 (더 출중할수도 있는) 대다수들을 공통적으로 소외시킬수도 있는 측면이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17. 이은주

    2006년 10월 5일 at 3:13 오후

    그리고 또 하나는, 당시의 입시전형 상 예비고사 반영비율이 40%를 적용하였다는 것입니다. 즉 예비고사(1980년대에는 학력고사)는 340점 만점기준 얻은 점수에다가 0.4를 곱하고, 본고사에서 얻은(국어 100, 영어 100, 수학 100, 사회 또는 과학 130점 만점) 총 430점 만점 기준의 취득점수를 합하여 입학성적을 계산하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비고사 성적으로서 이것은 변별력이 매우 떨어진 시험으로서 사실상 정말 실력있는 (서울대 지망) 수험생들은 거의 이 공부를 따로 준비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같은 합격생들 간에도 예비고사 점수가 30~40점 정도가 날수도 있었는데(즉 본고사 반영상으로는 12~16점) 결국 수석을 논하는 입장에서는 그 차이가 매우 결정적일 때가 있었습니다.
    이러저러한 요인들 때문인지 몰라도 사실상 당시 전국의 수험생 어느 누구도 서울대 수석을 기대하거나 바라고 공부한 사람이 거의 없었고 다만 "운"이 좋으면 수석까지 혹시 바라볼 수도 있을 것이라는 것이 솔직한 최고수 수험생들의 입장였던 것으로 기억납니다.
    즉 본고사에서는 수석였으나 예비고사 점수가 안좋은 경우 불과 1점 이내로 수석을 놓칠수도 있었고, 반대로 본고사는 별로였으나 평소에 기본에 충실한데다 문제상의 운 등으로 엉겹결에 수석을 차지한 경우 등등이 있었습니다.
    말그대로 백지 한장차이로…….    

    • kevin park

      2015년 4월 6일 at 3:19 오후

      77학번 한 문영씨는 대학 제학중 사법,행정,외무고시 3개를 전부 합격하여 당시 일간지 사회면을 크게 장식했습니다 또 이은주씨의 수학시험에 대한 설명은 정확한 사실이며 학원가의 유명 수학선생님 또는 학교 입시반 수학선생님께서 강조한 유형에 문제가 하나만 본고사에 출제되면 일약 스타 선생님으로 등극되었고 (한문제 정답이면 합격선 이므로) 하지만 많은 문제들이 일본 유명대학 시험문제에서 따온다는 설이 거의 정설로 받아 들여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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