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니의 초상

<<화가의 우연한 시선>> 이라는책을 보다 들라크루아의 그림 한 점에 시선이 머물렀다. ‘제니의 초상’이라는 작품인데 평생 독신으로 살아온 화가의 충실한 하녀였던 제니 르 귀유의모습을 마치 기숙사의 사감처럼 근엄하게 그려 놓은 것이다.정숙함의 상징같이 목까지 올라온검은복장에다 주름이 오글오글 잡힌보닛(머리 뒤에서 덮어 쓰는 형태로 턱에서 묶는 형태의 모자)을 쓴 그녀의 모습은 딱딱한 표정만으로도 주인공의 성격이 바로 드러났다. 모자가 인상적인데 중세 때 기사들이 목에 두르는 아코디언처럼 주름잡힌 딱딱한 칼라가 연상되었다. 상반신만 그려진 그 작품은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지만보자마자 너무나 닮은 한 여자가 떠올랐다.

들라크루아(1798~1863)의 작품은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으로 우리에게 널리 알려졌다. 낭만주의 시대 화가로서 고전주의에 기초를 둔 그의 작품은 순수한 환상이나 부드럽고 생생한 표현형식을 바탕으로 한다. 보들레르는 그를 일컬어 "여인을 그리는데 천부적 재능을 지녔다" 고 평했다. 벌거벗은 여성을 주로 그린 그의작품들은 완만한 육체의 선이라든가 눈부신 피부 등이 대부분이었다. 거기에 비해 고전적이기도 한 ‘제니의 초상’은 엄격함 그 자체이다. 어쩌면 그리도 완고하며, 고지식과 충실함까지도섬세하게 잘 표현했는지.

여성의 매력에는 분방함이나 정숙함, 또는 섹시함과고귀함 같은 것이 있지만 고집스런 완고함에서 풍기는 또 다른 매력이 있을 수 있다. 단박에 사람을 끌지는 않아도 두고두고 푸근하게 믿을 수 있는 고향 같은 여자. 구수한 누룽지 같은 친구. 동네 친구 중에 이 그림속의 제니와 흡사하게 생긴 인물이 있으니 이름 하여 덕이이다.

울퉁불퉁한 고집스러움과 검소한 느낌, 절대 통하지 않을 것 같은 외골수 할머니들의 강한 인상. 어울리지 않는 한물 간농담을 하곤 무안해 하지도 않으며 혼자 깔깔대는 그 여자. 퉁명하게 내뱉아버리는 말투, 소박하지만 나름대로 공들여 입은 티가 나는의상하며 그녀의 모든 면은 고집과 아직은 여과가 덜된 매너로 뭉쳐 있다.

매사가 신토불이식의 취향이다보니 그녀가 좋아하는 먹을거리는 노란 찐쌀과 고구마 말린 것, 노가리를 꾸덕꾸덕 말려선 연탄 불에 구운 것과 보리밥, 그리고 참게장이다. 손톱에 봉숭아물들이기를 매년 거르지 않으며 거제도에서 배를 더 타고 나가는 지심도의 핏빛 동백꽃을 퍽 좋아라 한다.

항상 미간에는 지워지지 않는 주름이 떡하니 버티고 있으며, 말 걸기는 철의 장막 뚫기랑 비슷할 정도이다. 말 한 번 잘못하면 "꽥" 하고 고함을 지른다. 웃는 게 예쁘다며 아무리 웃으래도 거의 웃는 법이 없이 항시 찡그리고 있다. 어쩌다 말을 걸어도 퉁명스럽기는 상대를 무안하게 할 정도이다. ‘제니의 초상’을 보노라니 여간 똑같은 게 아니다. 정말천재적인 화가이긴 한 것이 어쩌면 그 인상에서 그 여자의 성격이 모두 보이는지. 제니가 들라크루아를 위해 일생을 헌신했다면 덕이도 친구를 선택함에 있어 한 번 친해지면 영원하다고 할 수있을만치 의리가 있으며 딴 사람과는 친해지지도 않는다.

그러다보니 다른 사람의 성격조차 잘 이해를 못할 적이 많다. 남의 유쾌함을 위선으로, 남을 배려하는 친절함을 가식으로 받아들이기 일쑤라 이왕이면 상대방의 장점만을 보는 나와는 달리 편협할 뿐 아니라 매사에부정적인 것이 생활화되어 있다. 그녀가 생각하는 순수란 덜 세련된 모습과 약간은 고집스런침묵을 뜻한다. 타인의 취향에는 일말의 관심조차 두지 않는 면도 있다. 그래서인지 취향이 다른 사람과는융화되기 어렵기만 하다. 가끔 말이 통하지 않을 만치의 답답함과 무식하다 할만치의 고지식이 있지만 계산기보다 주판이 좋거나 그리울 때가 있는 것처럼 그녀가 항상 답답한 것만은 아니다.

남성 무용수의 근육이 환상적인 매튜 본의 <백조의 호수>라든가, 남자의 전라가 나오는 <영 아담> 같은 영화가 있다고 하면 배시시 웃으며 “이럴 때 봐야지 언제 보노” 하면서 보러 가자고 재촉이 심하다. 분위기 있거나 고전적 진부함이 있는 영화를 보자 하면 “지겹게 뭘 그런 걸 보노?” 하며 어깃장을 놓고 만다.

어느 날 그녀에게서 전화가 왔다.

"나 취직했다 아이가"

"어디 취직했는데?"

"유치원 버스 조수야 ! 한 달 월급은 40만원이다. 월급 모아서 그리스로 여행가려구."

유치원 애들이 승하차시에 손잡고 다치지 않게 잡아주는 역할이다. 얼마나 중요한 역할인가? 그녀가 퍽 대견스러웠다. 근무시간은 2시에서 6시까지 4시간이라며 좋아했다. 그리고 그녀는 말대로 그 돈을 모아서 그리스가 아닌, 스페인과 포르투칼을다녀 왔다. 그것도 보무도 당당하게. 한 달에 40만원이 적은 돈은 아니지만 그 돈을 벌지 않아도 충분히 여행 갈 수 있는데 직접 애써 모은 돈으로 자기 필요한 곳에 쓰니 괜히 내가 부끄러워지면서 미안했다.

“아니 네가 왜 그런 고생을 하니?”

“야, 우리 신랑이 사업이 잘 안 돼! 그래서 나라도 용돈은 벌어서 쓸 끼다.”

3년이 넘도록 짜증도 없이그녀는 그 일을 하고 있다. 기사 아저씨들과자주 다투면서도말이다. 그 특유의 퉁명스러움과 어느 누구도 얕보지 않는 대등함으로.

언제 기회가 되면’제니의 초상’ 복사판이라도 하나 사서 선물하고싶다. 그녀가 자기의 모습을 쏙 빼어 닮은 제니를 보면 뭐라고 말할까? 모르긴 해도

“나 하녀 싫다, 나하고 하나도 안 닮았구만.”

하며 화를 낼까? 아니면

"아니 주인 허락도 없이 누가 그린거야? 그것도 실물보다 훨씬 못생기게 말야."

라고 할까.

6 Comments

  1. ariel

    2006년 1월 20일 at 11:38 오후

    ^^   

  2. Hansa

    2006년 1월 21일 at 2:53 오전

    친구분 ‘덕이’씨의 행복한 그리스 여행을 기원합니다. 하하

       

  3. Lisa♡

    2006년 1월 21일 at 4:38 오전

    그러잖아도 스페인갔다 오더니 돈 모아서 그리스로 간대요. 히히
    목표가 있으니 이루겠죠. 헤헤   

  4. Lisa♡

    2006년 1월 21일 at 5:14 오전

    ariel님..방문 감사해용~~~^.^~~~~~♣   

  5. 슬비

    2006년 1월 22일 at 12:06 오후

    덕이란분 진국입니다. 요즘같은 세상에..
    좋은 친네요.^^   

  6. Lisa♡

    2006년 1월 22일 at 1:31 오후

    슬비씨도 그리 생각하시나요?
    저도 그리 생각하고 있는데 말이죠.
    진국 만나기 힘든 세상인 건 맞는 말씀입니다.
    진국을 맘나러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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