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나의 스토커

현옥이는 끔찍히도 날 사랑하는 친구이다. 그리 눈에 띄지 않는 외모에 언뜻 보면 순하게 보이나 자세히 보면 엄청 사람을 피곤하게 만드는 집요한 빛깔의 얼굴로 꼭 고등학교 생물 선생님 같은 인상을 갖고 있다.무 장아찌 같은 꼬들꼬들한 토종의 맛을 연상시키는 그녀는 얄팍하고 작은 입술을 앙 다물고 조그맣고 예리한 눈을 예사롭지 않게 뜨고는 이것 저것에 다 참견하며 세상의 고민을 다 지고 살아간다.

흐린 날에도 우산인지 양산인지 모를 것을 쓰고는 자외선을 가려 보겠다고 하얀 팔을 내저으며 필사적으로 햇볕 가리기에 나선다.

생긴 것과는 다르게 얼굴에도 관심이 많아서 눈가의 자글자글한 주름에도 매일 스트레스를 받으며 깊고 무겁게 한숨을 쉰다. 노래방을 가도 알지도 못하는 50년대 노래를 부르질 않나, 반잔만 먹어도 취하는 술을 먹고 "술 한 잔 하니 기분 조오타"며 혼자 술 다 먹은 것처럼 군다.

어찌나 별난지 여행을 가도 베개가 더럽다고 두루마리 휴지를 베고 자질 않나, 깨끗하게 씻어 나온 식당의 숟가락도 컵의 물에 한번 더 씻어야 직성이 풀리는 결벽성까지 겸비한 친구이다. 옷을 하나 사도 몇번씩 교환해야 손해를 덜 본다고 여기는지 매번바꾸러 다닌다. 게다가 별나다 보니 사는 물건마다 하자가 있거나 금방 고장이 나곤 한다. 지겹고 피곤해서 이제 좀 떨어지자고 해도 절대 불가라며

자초지종을 구석구석 다 캐물어 보고야 만족해하는 그녀.

10년전 쯤인가? 재경 여고 동창회에서 숨죽이고 구석에 앉아있는 그녀를 본 것이. 여고 때도 보이지 않게 잘 숨어있던 현옥이는 그날, 시시껄렁한 내 이야기를 가장 재밌게 경청하는 태도를 진지하게 보이며 그 시간부터 나의 스토커로 자리를 잡았다.

회장인 내가 은행원처럼 생긴 그녀를 총무로 지명하면서 두 사람의 우정은시작되었는데 어찌나 믿을 만 하던지 서서히 나도 모르게 그녀가 없는동창회는 있을 수 없다고 여기게 되었다.

오래되서 좋은 것은포도주와 친구라고 했던가.

친하게 지낸지 10년도 안되지만그 어떤친구보다 편하고 어떤 말을 해도창피하거나 부끄럽지 않다.유행에는 약간 뒤떨어진 현옥과 나 사이에는 흔히 말하는 코드가 2% 부족할 수도 있다. 하지만 더 오래되었다해서 꼭 좋은 친구라고만은 할 수 없겠다. 게다가 나는 그녀의 스토커적 기질까지 즐기고 있지않는가?

나를 만나지 않았으면 세상이 재미 없었을 법한 그녀를 내가 좋아하는 이유는무슨 얘기를 해도 내 얘긴 다 이해하는가 하면,나의 잘난 척도 무리없이 다 받아주며, 언제나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는 것이다. 그런 그녀에게 사랑받고 있으니 내가 만나는 사람들과 어딜 가서 무얼 했는지 시시콜콜 말하지 않으면 간이 덜 된듯 심심해서 의무처럼 죄다 고스란히 까발려야 한다.

게다가현옥일 좋아하지 않을수 없는또 한가지 이유는엄마에게 어찌나 효녀인지 운전 실력도 없으면서 연일 먼거리를 마다 않고 음식을 해다 나르는 것이다. 내게도 툭하면 얼린 식혜라든가 자잘한 고구마나 다 터져가는 지저분해 보이는 홍시같은 것을 봉투에 담아주기도 하고 자길 닮은 단양 육쪽 마늘을 갖고와선 " 된장 찍어서 생으로 꼭꼭 씹어무라"며 친정엄마가 딸에게 권하듯 주는 것이다.

TV나 신문에 한심한 기사라도 나는 날엔 정의파인 그녀의 열변은 끝간데 없이 청산유수고 정치, 경제, 교육을 총망라해그냥 넘어가는 게없다. 그러다가도 내가 "시끄럽다"고 한마디라도 하면 씩 웃고 만다.

한번은 같이 태국 여행을 갔다. 어디서 목회 활동을 하시는지 모르나 자칭 목사님이라는 할아버지가 일행이었는데 하시는 짓이 꽤나 밉살스러웠다. 가이드가 설명 중에 "배낭족이 자는 곳이 싸고 좋은 데가 있다."고 하자 이 할아버지가 노발대발 하시며 "어디 욕을 하느냐"며 "배낭족이라니… 족이라니?"하시며 가이드를 무안하게 몰아부치는 것이었다. 사태가 이쯤되니 버스 안은 쥐죽은 듯 조용해 지고 무섭기까지 한데 이 영감님이 계속 물만난듯 떠들어 대는 것이었다. 가이드의 얼굴이 뻘겋다 못해 폭발하려는데 어디선가 짱짱한 목소리로 "이것봐요. 할아버지! 왜이러세요. ‘족(族)이란 말이 어때서 그러세요? 할아버진 귀족, 가족, 왕족, 민족도 모르세요? 그럼 그게 다 욕이란 말이예요? 배낭족은 하나의 문화가 된 단어란 말이예욧." 얌전하게 보이기로 소문난 현옥양이 칼날 선 목소리로 내뱉었다.

내가 깜짝 놀라서 쳐다 봤더니 얼굴색 하나 안 변하고 더 해줄 말이 없나 안경너머 눈을 반짝이며 고민하고 있었다.

어찌나 존경스럽고 속이 뻥 뚫리던지 뽀뽀해줄 뻔 했다. 이쯤되면 스토커 한명쯤은 든든하게 둔것 같다.

그녀에게 나는 그녀의 남편을 능가하는 영순위에 꼽힌다.여행을 가도, 쇼핑을 해도 나랑 가길 젤 즐겨서 귀찮을 정도이다.

귀한 공연 티켓이 생겨도 나 아닌 다른 동행은 상상할 수 없다. 우리 가족이 얼마전 중국으로 발령이나서 갈까 고민하는데 안된다고, 내가 가면 자기도 따라 간다고 바락바락우기면서 밥도 안먹고 농성을 하는데 마음이 약해서 못가고 말았다.

사실 한국을 떠나기싫었던다른 사정이 있었지만 어찌나 결사반대를 하던지.그리곤 없는 애교 부리면서 하는 말

"넌 나의 엔돌핀이거든"

이렇게 날 사랑하는 영원 불멸의 스토커가 있는 한 나는 외롭지 않다.

9 Comments

  1. 히말라야

    2006년 1월 25일 at 12:42 오후

    생각보단 예리하시고 느낌이 많네요… 대충…..   

  2. 히말라야

    2006년 1월 25일 at 12:43 오후

    내가 약간 취중이라 이해 ……(있쟎아요 알콜…)   

  3. ariel

    2006년 1월 25일 at 1:12 오후

    저도 비슷한 친구 있어요.. 그런데 lisa님 친구는 못 따라가네요..
    제 잘난척 다 받아주고, 먹는 것 해서 챙겨주고, 같이 울고, 웃고..
    요새 3주 못봐서 무척 보고싶네요.. 저도 그런 친구가 있다는게
    행복해요.. 내일 전화 해야겠네요.. goodnight~   

  4. Lisa♡

    2006년 1월 25일 at 2:02 오후

    히말리아씨…"생각보단.." 이라는 말 저–엄청 듣고 살아요.
    보기엔 밥도 못하게 생겼다 그래요.
    후훗..실은 요리사 저리 가라인데 말이죠.
    반갑습니다.
    취중진담***좋잖아요.   

  5. Lisa♡

    2006년 1월 25일 at 2:04 오후

    ariel님..잊지 않고 죄다 읽어 주시니 황공 무지로소이다.
    친구 좋죠?
    뭐든 얘기할 수 있는 친구가 몇인가 세어 보세요.
    그러다가도 마음이 자주 변하긴 해요. 제가요.
    의리있는 거 그거 아무나 가진 거 아닌 거 같아요.
    내일 꼭 전화하세요. 친구에게—   

  6. 부산갈매기

    2006년 1월 25일 at 3:23 오후

    하하하,
    스토커…그런 날들이 있었지요….
    그때는 스토커라구 생각도 못했지만…
    고맙습니다.
    찾아 주시고 글 내려 주심에 감사 드립니다.
    조블에서도 욕 먹을까 노심초사하지만 좋은 님들이 많겠지요.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길…
    감사합니다.   

  7. Lisa♡

    2006년 1월 25일 at 3:25 오후

    그럼요..조흔 님들 많지요.
    저도 첨엔 좋은 글들 스크랩만 했는데
    지금은 욕먹더라도 용감하게
    진행시키는 중입니다.   

  8. 백의민족

    2006년 1월 27일 at 10:58 오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좋은 친구분을 두신 것 같습니다.
    좀 결벽증이 있지만 사리를 분명히 따질 줄 아는 용기있는 여성이기두 하구요…
    설날 복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회창님에 대한 애정과 사랑을 보여주셔서 감사합니다.
    시간이 나시면 이회창님에 대한 관심의 글도 읽을 수 있었으면 합니다.
    …   

  9. Lisa♡

    2006년 1월 27일 at 12:47 오후

    저 ‘창사랑’에 이위의 스토커랑 같이 가입할려했거든요.
    이리저리 정치에 왕~관심많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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