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남자 친구의 엄마

처음 본 순간부터그녀가 마음에 들었다. 그야말로 나의 이상형이었다. 내 연하 남자친구의 엄마였고 미래의 내 시어머니였다.그 날 나는 그녀의 며느리가 되기로 결심했다.

연상의 여자와 연하의 남자가 결혼 한다는 게 쉽지는 않았다. 양쪽 집에서 모두 반대를 했기 때문이다. 어디로 보나 내가 불리한 입장이었다. 그러나 그녀만은 우리를 밀어 주고 멋진 선물로 나의 마음을 더 확실하게 붙들어 매주곤 했다. 소설속의 여주인공처럼 늘 나타나서 떨리는 나를 만족시켜 주었으며 불안감을 진정시켜 주기도 했다.

데미안의 엄마에게 사랑을 느낀 싱클레어처럼 그녀 앞에만 서면 늘 두근거리기만 했다. 어떻게 하면 더 잘보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밤새 고민도 해 보았다. 누구 앞에서나 자랑을 하고픈 여자였다. 미모가 뛰어나 지나가는 사람이 다 쳐다보는 수준에 우아한 매너와 교양있는 태도로 많은 사람들의 화제에 오르는 사교계의 여왕. 남을 배려하길 잘해 불쌍한 이들을 그냥 못지나치는 박애주의자이자 화려하기 그지없는 최고의 일류 멋쟁이 신여성이었다.

그렇다면 멋만 부리며 이슬만 먹고 사느냐 하면 절대 아니올시다. 그녀는 요리의 절대가인이었고 남편 앞에서 흐트러진 모습을 한 번도 보인 적이 없는 여성이었다. 옆으로 스쳐 지나만 가도 향긋한 냄새가 풍겨 절로 기분이 좋아지는 여자다운 여자였다. 마음은 어지간한 사내 대장부가 따라 올 수 없을만치 넓어서 주변에 따르는 무리만 해도 수십명은 이를 것이다. 아파서 입원하면 사우나 동기생들까지 방문을 해서 병원측에서 입장 제한을 둘 정도였다.

결혼 후에 기념일만 되면 전망좋은 호텔예약을 해서는 100송이의 장미와 금일봉까지 챙겨서 주며 축하의 말까지 따스하게 해주던 여자였다. 애가 늦게 까지 없자아이를 좋아하는 나는 조바심이 나서 견디기 힘들었다. 그 때 아이없이 둘이만 잘 살아보는 것도 괜찮은 인생이라며 마음 고생하지 말라며 진심어린 충고를 해 주었다. 그것도 외아들에게 하는 말이었다.

명절 때 막히는 도로를 보면 절대 내려오지말고 다른 한적한 곳으로 놀러나 가라면서 고생하지 않게 앞서서 배려를 해주었다. 나이 많은 내 친정엄마에게는 마치 친딸처럼이것저것 챙겨 주던 그녀였다. 한 번은 사소한 일인데 오해를 해서 나에게 화를 내신 적이 있었다. 뒤에 사실을알고는 어른도 잘못한 건 용서를 빌어야 한다며 어리석게 굴어서 미안하다시며 다시는 실수없게 하겠노라셨다.

서로에게 호감을 느꼈던 우리는무슨 말이든 아들을 젖히고 둘이서만 수다를 떨었다. 어디가서도 예쁘고 적당한 물건만 보면 여자는 이런 거 갖고 싶어 한다면서 꼭 챙겨 오시던 어머니. 난 참 시어른 복이 많았다. 멋쟁이 아버님은 깐깐하시지만 어머니라면 꼼짝도 못하는 애처가였다. 워낙 그녀를 따라갈 여성이 드물었으니 남편으로서는 복받은 격이었다.

자태를 뽐내던 꽃도 시들고 영원한 것은 없듯이어느 날그녀는 새로운 세계를 향해 훌쩍 떠났다.미인박명이라 했던가? 몸을 가눌 수 없을만큼 슬퍼서 얼마나 통곡을 했는지 모른다. 60대 초반에 사랑하는 식구들을 마지못해 놓으시고가신 것이다. 일주일간 울어서 부은 눈을 한 나는 도저히믿어지지가 않았다. 친정 아버지 돌아가셨을 때도 이러진 않았다. 너무나 슬펐다.

그녀는 의사인 사위가 소개한 병원서 대장검사를 받았는데 조그만 폴립을 그가 놓치는 바람에 방치해 두어 대장암이 되어 버린 것이었다. 항암치료를 거부하고 깨끗이 살다 가셨다. 지나고서 보니 문외한인 우리의 눈에도 보일 정도의 크기였는데 운명이란 게 그리되는 건지 그 때 그 의사가 못본 채 지났다는 게 말도 안되는 거였다.

아버님은 칫솔, 잠옷, 신발까지 그대로 두고 엄마가 살아있는 듯 사셨다. 혼자서 지내지만 두분이 사는 거나 진배없었다. 말이 일체 없으셨으나 굉장히 그리워하신다는 걸 안봐도 알 수 있었다. 일년이 지난 어느 날 아버님이 졸지에 주무시다가 돌아가셨다. 믿어지지 않았다. 건강에 너무나 철두철미하셔서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거였다. 부부가 금슬이 좋으면 그리 따라 간다던데 그 일이 우리집안에 일어난 것이다. 외며느리로서 나에겐 더 이상 할 일이 없다. 그리고 갈 곳도 없다. 언니들은 날더러 편하겠다지만 오히려 외롭기만 하다.

불교 신자였는데 나를 위해 가시기 한 달전에 카톨릭으로 개종까지 하신 분이다. 권하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그리 하신 것이다.

누구보다도 날 이해해주었으며 사랑해 주고 같이 여행도 다니며 쇼핑이라면 서로 질세라 조잘대며 새로 산 걸 맞추어 보곤 하던 모녀같은 고부사이. 나는 그녀를 엄마라 불렀다. 그녀도 그리 부르는 걸 무척 좋아했다. 속상하게 하는 딸년 욕도 우리둘이 박자 맞춰가며 하곤 했는데 이제 그녀는 없다.

유산이라고 할 만한것은 남기지않았지만 그간 나를 사랑해 주고 베풀어 주었으며 마음 고생 한 번 안시킨 걸로 만족한다. 워낙 아끼지 않고 즐기며 사셨으니 자신을 위해서는 잘 하신 일인 것같다. 원없이 살다가 가니 서러워 하지 말라며 우리들을 위로 해 주기도 했다. 죽음의 문턱에서 두려워하는 듯 해서 나는 <티벳 사자의 서>라는 책에 있는 편안한 문장을 몇 개 발췌해서 읽어 주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마음을 안정시키던 모습이 떠오른다.

지금도 기일이 되면 저절로 눈시울이 붉어진다. 그 만큼 사랑했기에 잊혀지지가 않는다. 즐기던 커피와 맥주를장바구니에 담으며 나는 아직도 그녀가 그립기만 하다.

4 Comments

  1. ariel

    2006년 1월 27일 at 3:34 오후

    ㅠ.ㅠ   

  2. Lisa♡

    2006년 1월 31일 at 5:46 오전

    ariel님, ^.^   

  3. brightmoon

    2006년 2월 11일 at 11:42 오전

    한참을 멍하게 먼곳 바라보게 하시네요   

  4. Lisa♡

    2006년 2월 11일 at 2:54 오후

    무슨 사연이라도…?
    죄송해요. 멍하게 만든 거….
    우리 엄니 정말 존 사람이었거들랑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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