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때 갑자기 스타박스의 모든 손님이 우리를 기억할만한 큰 소리로 승주가 소리를 질렀다. “안 먹겠다는데 너 네가 뭔데 자꾸 이래라, 저래라 그래? 뭐가 잘났어? 이것들이 보자보자 하니까 웃겨 죽겠어. 먹기 싫다는데 돼지처럼 뭘 자꾸 먹으라고 해? 엉? 그리고 내가 딸에 대해 말하는데 너네는 얼마나 애 잘 키우는데? 같잖아 죽겠네. 뭐 이따위가 다 있어, 나중에 누가 잘 되는지 두고 보자구” 하며 무섭게 씩씩거렸다. 나는 부끄러워서 먼저 주변을 살펴보았다. 모든 손님과 직원들이 우리 테이블을 쳐다보며 할 말을 잃은 표정들이었다. 그 맑고 지적인 목소리가 어찌나 크던지. 맞다. 내가 뭐 잘났다고 남에게 이래라, 저래라 지시를 하고 나보다 더 나은 그녀를 측은하게 바라본 건지. 승주의 얼굴은 시뻘게 져서 분을 죽이느라 빈약한 가슴까지 씰룩거렸다. 뭘 잘못한 거야? 친구끼리 못 할 말 했나? 그러더니 그녀는 움푹한 다리를 덜덜 떨며 나를 죽일 듯 노려봤다. 급기야는 내게 삿대질을 하며 “너 왜 늦게 왔어? 이 인간이 보자보자 하니까 어디 남의 시간을 뺏고 있는 거야? 너가 그리 잘났어?” 뭐라 해야 하는데 말이 목구멍 너머로 나오질 않았다.
사태를 수습해야지 하는 생각밖에 없었다. 잠깐 뭘 사겠다고 일어나서는 카운터로 가서 고개를 숙인 채 서성거렸다. 아르바이트 학생들이 공범으로 모는시선을 내게 보내며 이상한 여자들이 들어왔다고 생각하는 눈치였다. 에어콘이 추울 정도였지만 덥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하는 수없이 스타박스에 진열된 커피랑 컵이랑 두서없이 몇 가지를 샀다. 이성적인 판단- 그것이 필요했다. 여기서 어디로 물러 날 것인지, 아님 달래야 하는지.
흐려진 나의 이성으로는 분간이 안 되는 시간이었다. 휘청거리는 더운 여름날의 오후였다. 물건을 계산한 나는 조용히 돌아서서 천천히 그녀들에게로 다가갔다.
“숙희야, 이 거 네 선물이야. 내가 바빠서 이만가야겠네. 깜빡하고 동네에서 약속한 걸 잊었어. 그리고 승주야, 늦게 온 거 미안해. 정말 죽을죄를 지었어. 너네 둘이 먼저 애기 좀 하라고 그랬는데 미안해. 내가 본래 너보다 머리가 나쁘잖아. 뭘 잘 몰라서 그래. 용서해…정말 미안하다”
그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 곳을 빠져 나왔다. 숙희에게는 미안했지만 나조차 정신이 이상해지는 중이라 도저히 견디기 힘들었다. 심장박동 소리가 남에게 들리기나 할까봐 걱정이 되는 순간이었다. 내가 잘했는지는 뒤에 알겠지만 당시에는 피하는 게 상책이다 싶었다. 내 뒤에서 더욱 커다란 목소리가 들렸지만 그냥 무시했다.
“ 너 거기 못 서?” 승주는 벼락같이 소리를 쳤던 것이다.
방향감각을 잃는 일은 내게는 흔치 않는 일이다. 난 방향감각을 상실했다. 아무데로나 마구 걸었다. 일단은 큰 길을 피해 골목길로 숨듯이 파고 들어갔다. 무서웠다. 뒤에서 나타나서 소리를 지를까봐. 정말이지 내가 왜 이런 곳에서 이래야하는지 정신이 없었다. 얼마나 헤매었을까, 온 몸에 땀이 범벅이었다. 힘이 다 빠지고 걸을 수조차 없었다. 지하철을 타기도 힘에 부쳐 평소에는 거들떠보지도 않던 택시에 몸을 던지듯 올라탔다.
이상하게 잠이 왔다.
주름이 자글자글하니 실처럼 나있는 승주의 얼굴이 공포처럼 나타났다 사라지곤 했다. 나는 그녀의 몰락을 즐겼던 건 아닌지, 그 대가를 치루는 건지도 몰랐다. 알게 모르게 나도 그녀의 거식증을 알면서 흉보기만 했고 편집증을 들으며 남편이나 식구에게 알려 고쳐 줄 생각은 아예 하지도 않았는지 뒤늦은 후회가 몰려왔다. 무심한 남편보다 어쩌면 모든 걸 다 털어놓은 내가 더 방심죄인지도 모르는 일이다. 나는 진저리나게 그녀를 잊고 싶었다. 아니 삭제시키고 싶었다. 그리고 다시는 승주를 만나는 일은 없었다. 숙희가 불쌍하다고 그러지 말라고 했지만 단호하게 거절했다. 숙희는 언제나 물에 물탄 듯, 술에 술탄 듯 했다. 그렇다고 나는 그녀가 아니었다. 바람에 실려 숙희로부터 승주의 소식을 들었다. 대인 기피증까지 걸려 집에만 쳐 박혀 아예 나오질 않으며 남편이 아이의 일거수일투족을 챙긴다는 말과 그녀의 몸무게가 38키로 정도라는 소리를 아프게 들었다. 이상하게 눈물이 절로 났다. 알게 모르게 나도 그녀를 그렇게 몰고 간 동조자는 아닌지. 공범의식이라는 말이 실감나면서 죄책감이 들었다. 병원은 다니는 걸까? 그렇게 쓸쓸해하더니 어쩌면 자기 자신 하나 제어를 못해 저 지경까지 갔는지 나도 쓸쓸해졌다. 누가 누구를 불쌍해하고 우습게 여기겠는가? 산다는 게 전쟁이고 고통인 걸. 가슴 한 쪽이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그녀로 인해 나는 언제 풀릴지 모를 돌덩이 하나 내 가슴에 안고 살아간다.
이 쓸쓸함의 끝은 어디인지 모르는 채.
(끝)
김진아
2007년 12월 15일 at 3:25 오전
울분을 토해낼곳이 없었나보아요..
찾으려 했는데, 엉뚱한 곳에서만 찾으려 했거나,
도움을 요청하고 싶었는데, 자꾸 어긋나 버리기만 했을거고,
그냥 그렇게 느껴지네요..
승주…
글을 쭈욱 읽으면서…한국인에게만 있다는 ‘화’병이 생각납니다.
아프면 아프다고,
슬프면 슬프다고,
보고 싶으면 보고 싶다고,
할줄 알아야 하고,
들어주어야할수 있어야 하는데요..
겪는이도, 보는 이도 모두가 다 아프네요..
리사님…
좋은 글..고맙습니다.
정말 잘 읽었어요..*^^*
Lisa♡
2007년 12월 15일 at 3:29 오전
이 글을 쓰면서 진아님처럼 이 주인공을
이해하는 분들이 많은 거라는 생각을 했어요.
누구든 이해하는 부분이 있잖아요?
진아님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격식이나 어떤 작법에 맞춰 쓴게 아니라 서툴지만
정말 보람이 있었네요.
진아님 같은 분이 계시니까요.
눈이 녹고 있네요.
어젯밤에 한강변에서 눈을 감상했어요.
가로등에 비쳐 날리는 눈발이 아름답더군요.
어제 동생들과 망년회했거든요.
& moon
2007년 12월 15일 at 3:44 오전
이 정도 분량이 호락호락 하지 않다는 거 알아요.
읽는 사람이야 재미있게 읽긴 했지만 내친김에 하나 더 써 보시죠?
토닥토닥 등 두드려 드립니다.
Lisa♡
2007년 12월 15일 at 3:59 오전
계속
써볼께요~~
감사합니다, 앤문님.
색연필
2007년 12월 15일 at 4:29 오전
끝~~^^
긴 글 잘 안 읽는데…ㅋㅋ
고들빼기…김치군요^^
들어 본 것 같기도 하고, 먹어 본것 같기도 하고..ㅋ
좀 쌉살한 뿌리? 김치?
저는 새끼 고등어 말린게 고들빼긴줄 알았어여..ㅎ
정말 가련하기도 하고, 한편 무서운 친구네여…
리사님 땀 흘리며 방향감각 잃은 부분에서…
저도 식은땀 좀 나더군여…ㅋㅋ
커피 한잔 드세여…한숨 돌리시구여~^^
粹霞
2007년 12월 15일 at 4:50 오전
리사님, 잘 읽었습니다.
계속 써 보셔요.
조용히 읽기만 하는 독자가 되겠습니다.
ㅎㅎ
빨리 끝나 아쉽네요.
순이
2007년 12월 15일 at 7:53 오전
아쉽게 끝이군요.
사람에 대한 표현이 놀랍도록 리얼합니다.
특히 "나"에 대한 것은 더욱 그렀습니다.
너무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Lisa♡
2007년 12월 15일 at 9:42 오전
색연필님.
새끼 고등어—ㅋㅋㅋ
그렇게 생각하기가 쉽겠군요.
고들빼기 김치는 아마 민들레 뿌리 김친가
그렇게 생각되네요.
약간 쌉쌀한 거요.
ㅎㅎㅎ—식은 땀 흘리지 마세요.
진짜 저런 경우가 생기면 어쩔까를
한 번 상상해보세요~~나라면…..그런 거.
Lisa♡
2007년 12월 15일 at 9:44 오전
소하님.
잘 생각해보겠습니다.
계속 쓸 거리는 많지만
자질이 있을런지…
시시해지지나 않을런지.
하여간 끝까지 읽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Lisa♡
2007년 12월 15일 at 9:45 오전
순이님.
ㅎㅎㅎ…
나에 대한 부분요?
그렇지요?
그렇다면 나는
나를 표현 잘 하는건가요?
^^*
cecilia
2007년 12월 15일 at 2:34 오후
무의식적으로 자기가 최고로 잘 나고 잘 살고 싶은 욕망이 있나 봅니다.
그래서 쓸쓸한 거죠.
다른 사람들의 삶을 잘났으면 잘난대로 못났으면 못난대로
그들만의 의미가 있다고 인정해 줄 수 있게되면 쓸쓸할 이유가 없죠.
이은우
2007년 12월 15일 at 9:46 오후
리사님이 쓰신 ‘끄적그적’ 소설 정말 잘 읽어 보았습니다.
말이 끄적끄적이지 그야말로 일필휘지였습니다~
실제 존재했던 사실을 머리 속에 그려서 그것을 다시 문장으로 엮어나가기도
쉽지 않는 일인데,
픽션 반, 넌픽션 반을 조합했다지만 무려 11편까지 소설로 완성하기란
타고난 천부적인 글 재주가 있지 않고서는 보통사람으로서 거의 불가능에 가깝겠지요.^^
경험에서 마음으로, 마음에서 글로… 원고료라도 드리고픈 마음…
그만큼 글쓰기가 쉽지 않다는 얘기가 되겠군요.
이해와 공감이 충분히 가기에 숨 죽이며 읽었답니다.
언제 풀릴지 모르는 가슴에 돌덩이를 안고 살아간다는 말에
덩달아 자다가 벌떡 일어나 봅니다.
거참,,, 안타깝습니다…해피엔딩이었으면 좋았을텐데…ㅜㅜ
천왕
2007년 12월 16일 at 12:29 오전
(끝)…을 위해 수고한 리사님….
마지막으로 승주씨를 살려주셨으면…..좋겠어요….
Lisa♡
2007년 12월 16일 at 12:56 오전
세실리아님.
최고로 살아온 경험이 있는 사람이
아래로 떨어지기는 쉽지 않지요.
하지만 최고라는게 없다고 마음을 비우면
편해지는데..그걸 못하는 거지요.
Lisa♡
2007년 12월 16일 at 1:00 오전
은우님.
숨죽이며 읽으셨다니 정말 감사합니다.
계속 다른 이야기를 써봐도 되겠어요?
일필휘지….으쓱으쓱~~하지만 누가 욕할까봐
겁이 납니다.
픽션반, 넌픽션 반–맞습니다.
빙고~~~
살다보니 특이한 성격이 많더라구요.
특히 제 주위에 많은 걸 보면 글쓰라는 뜻인가..ㅋㅋ
한없이 올라가려는 저를 제제해야겠어요.
자꾸 연습하다보면 정말 잘 써지려나?
이 번에 써보면서 느낀 점은 제가 잘 쓰던 못 쓰던
글을 써내려가는데 재미를 갖고 있다는 것이었어요.
은우님.
고맙습니다.
격려해주셔서.
Lisa♡
2007년 12월 16일 at 1:02 오전
천왕님.
승주요?
나아지겠지요.
똑똑한 주인공이니까요.
자기 덫에 걸려서 그러니
머리 좋은 여자라 잘 빠져 나오겠지요.
히히히…
다른 편에서 다시 생기있게 만들어 놓을까요?
님프
2007년 12월 17일 at 3:12 오전
지난 주 아이들 학예회에다 딸 셤기간이라 잠시 자세히 읽지 못해 오늘 다 읽었어요.
이런일 여자들 가끔 겪는 일인것 같아요. 어제도 친구가 와서 비슷한 이야기를 했는데
쌓였던 감정이 어떤 일로인해 촉발이 되어 터져 버린다고..
서로 불편하게 지내느니 먼저 손을 내밀어 가끔 안부라도 주고받는 사이가
되면 좋을것 같네요.
단편소설…어디 공모에 내 보셔요,,..
쉬운말 놔두고 어려운단어로 나열해 이야기에 집중 안되는 중견작가 소설보다
흡인력이 있어요..^^
雨淵
2007년 12월 21일 at 8:39 오전
역시 명품리사에 걸맞는 작품이군요. (글이 아니라 작품)
전체적인 짜임새와 마지막의 클라이막스와 여운까지…..
대단하십니다.
명.품.리.사
Lisa♡
2007년 12월 22일 at 1:11 오전
님프님.
감사하구요.
진짜로 현재에 사는 인물이라고 생각하세요?
근데
사실은 비슷한 친구가 있긴해요.
저는 그럴 경우에 전화하는 스타일이지요.
후후후….
중견작가보다 제 글이 쉬운 건 아는 게 없어서입니다.
그리고 제 자신이 쉬운 글을 좋아하거든요.
Lisa♡
2007년 12월 22일 at 1:12 오전
우연님.
명품리사!!! ㅋㅋㅋ
어쨌든 듣기에 좋은 말이군요.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불러주삼…
동서남북님이 늘 그렇게 불렀는데~
박산
2007년 12월 26일 at 5:41 오전
주위에 이와 비슷한 누군가가 있었나 합니다
다 그럴수 있는 이야기이고
누구에나 올 수 있는 상황이지요
Lisa♡
2008년 2월 14일 at 12:54 오전
박산님.
분명히 비슷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고운새깔(Gose)
2010년 4월 23일 at 1:28 오전
처음엔 영원히 변치 않을것같은것이 사랑 우정 …….
그러나 세상의 모든것이 변한다는 진리의 범주에서 끄집어 내려할때에
고통이 시작되지요
Lisa님 오래된예기니까 지금은 예전처럼 삼총사로 돌아 가셨으리라 짐작됩니다
건강하세요
Lisa♡
2010년 4월 23일 at 2:23 오전
고운새깔님.
저는 아직도 그녀를..연락을 계속하는데
연락이 아무에게도 안된다고 하네요.
걱정이 됩니다.
하도 내성적이고 특이해서 말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