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철을 타고 광화문에서 집으로 들어오는 시간이 9시 이후였다.
그 시간에 벌겋게 오른 남자들로 가득 찬 실내에서는 풀풀 술냄새가 배여있었다.
예전같으면 싫었을 그 냄새가 왠지 힘든 세상의 고단함을 잠시라도 늦추는
보배같아 따스한 감정으로 돌변해진다.
옆자리에 뚱띵한 남자 하나가 이마를 옆 팔걸이에 얹은 손으로 가리고 졸더니
계속 팔을 미끄러뜨리며 앉아서도 비틀거린다.
급기야는 지그시 왼쪽 어깨에 힘이 실리더니 나의 오른쪽 팔방향으로 기대어 온다.
이걸 피해, 어째?
그냥 참았다.
얼마나 살아가는 게 힘들까? 싶기도 하고 가장으로 피곤하겠다 싶어서다.
이쯤되면 나도 어른스러워지는 모양이다.
어디선가 청학동에서 까꿍~하고나타난 이상한 두건과 때묻은 도포를 입은
할아버지도 아닌 것이 아저씨는 더욱 아닌행색을 한 꺼꾸정한 수염쟁이가
나타나 바람을 일으킨다.
어느 짜리몽땅한 여자가 얼른 일어나 자리를 양보한다.
휭하니 도포자락 펄럭이며 앉는다.
옆눈으로 힐끗 보니 꼬장한 자세로 사방을 훑어보며 어깨에 힘주고 있다.
별 사람 다 사는 세상이니 구경하는 재미도 만만찮다.
밤 9시경의 전철 안의 풍경은 낮보다는 남자수가 많고, 냄새가 복잡하며
다들 고단한 표정들이다.
가끔 철없는 고딩 계집애들이 노래를 부르며 껌을 씹거나 핸드폰을 열심히 째려보며 지나간다.
터어키를 다녀 온 다음 날 피곤해 죽겠는데 난데없이 오빠가 나오란다.
반항하기도 그렇고 눈 내려깔고 잠시 나갔더니 자기 몽벨 등산복 산다고
좀 봐달란다.
날더러 넌 안사니? 하길래 약간의 것을 고르고 그 중에 하나만 살까말까
하는 중에 영국산 MONTANE 이란 브랜드가 눈에 띄였다.
디자인이 내게 어울렸고 마음에 들어 하나를 고르니 가격이 만만찮다.
오빠 누가 돈을 내는데?
그랬더니 그냥 골라보란다.
눈치라는 게 있다.
몬태인 걸로 4개를 골랐다.
어제, 오늘 무지 입고 싶었는데 입고 나갈 자리가 없다.
하는 수없이 밤에 세종에 강의 들으러 가면서 하나를 입고갔다.
오는 길에 등산은 아니지만 기분이 좋고 발걸음이 가벼워지길래
전철역에서 집까지 30분을 걸어왔다.
빨리 겨울이 와야한다//등산가게..
가야할때가 언제인가 분명히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 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이형기의 시 앞부분이다.
벗꽃은 가야 할 때를 알고 분명하게 가고있다.
양양으로 떠난 친구에게서 문자가 왔다.
설악쪽은 벗꽃이 만개란다.
떠남도 장소에 따라 뜨거움에 따라 다른 시간으로 가나보다.
시간이라는 게 무섭다.
하지만 시간이 간다는 걸 알고 있기에 충분히 행복할 수도 있다.
가는 시간을 웃으며 보내는 여유를 가지려면 삶은 영원히 내 것이
아니라 잠시 왔다가는 것이라는 무소유를 기억하면 되려나.
지고 가는 뒤로 철쭉들이 삐죽거린다.
다른 시간이 오고 있는 것이다.
터어키에서 사온 커다란 건포도를 입 안에 굴려가며 무심히 씹어보기.
누군가 건네 준 성가곡집을 아무 생각없이 틀어놓기.
아랫집에서 들려오는 이삿짐 싸는 소리도 편안하게 들어보다가
하늘에 걸려있는 구름에 산할아버지 생각도 느닷없이 하는 오후.
연두를 그리워하다가
언젠가 마주친 정신나간 여자를 떠올리기도 하지.
불현듯 핸드크림을 듬뿍 짜서 손등끼리 비벼보다가 컴퓨터를 멋없이
응시하다가 찬밥 끓여서 명이잎 수저에 올려서 입천장 디어가며 먹다.
그리곤 다시 한 번 나를 다 잡는다.
또 하나, 안도현의 시 흉내내기.
색연필
2009년 4월 16일 at 4:03 오후
한국의 지하철 모습은 정말 다양한 삶의 모습을
갖가지 채집이라도 해 놓은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때로는 무섭기도 하지만,
때로는 정겹기도 하고, 안스럽기도 하고 속상하기도 하고…
그래서 저는 지하철 잘 타지 않는답니다…에고…
광화문 다녀 가셨네요~^^
오늘은 모처럼 여유롭게
광화문 목욕탕 다녀 왔어요..아무 생각 없이…
그리고..
저도 울릉도에서 사온 명이를 맛나게 먹었던 적 있어요^^~ㅋ
명이 괜찮죠!?
명이라는 이름은
울릉도 사람들이 먹을 것 없을때, 그것을 먹고 명을 이어 나갔다고 해서
명이라고 하더군요…참…마음 짠해지는 이름의 먹거리죠…ㅋ
Lisa♡
2009년 4월 16일 at 10:42 오후
색연필님.
그렇군요.
울릉도에서만 난다고 하네요.
그 내용은 저도 지난 번에 어디 적었던 기억이..
제가 명이 참 좋아해요, 남편도 물론.
광화문은 일주일에 한 두 번은 꼭 나가지요.
광화문이 좋아요.
지하철이 왜 무섭나요?
저는 지하철이 다정하던데~~ㅎㅎ
이상한 사람들이 간혹있기는 하지요?ㅋㅋ
산성
2009년 4월 16일 at 11:32 오후
설악 벚꽃 만개 소식^^
어제 오랜만에 대학로엘 다녀왔어요.
너무 복잡해서 지나가는 것도 부담이었는데…
골목길로 들어서니
의외로 조용한 찻집들이 오밀조밀…
리사님 일기 읽노라면
읽는 사람도…머리 속,혹은 마음속으로
순간… 일기를 쓰게 된다는…^^
왕소금
2009년 4월 17일 at 12:06 오전
뚱띵이 자리에 왕소금이 앉았다면
리사님이 조는 척하면서 어깨에 머리를 기댔을텐데…
아깝당^^
Lisa♡
2009년 4월 17일 at 12:07 오전
산성님.
그렇습니까?
그럼 저를 일컬어 읽기쓰는 여자?
영화제목으로 어때요?
^^*
대학로는 저도 가면 정신이 없더라구요.
이미 구시대로 접어드는건지.
골목이 참 좋아지는 느낌은 누구나 마찬가지인가봐요.
Lisa♡
2009년 4월 17일 at 12:08 오전
왕소금님.
어캐 알앆때요?
오호~~놀라워라.
그게 저의 비밀병기수법인데.
언젠가…지하철에서 보게되면 눈치주세요.
김진아
2009년 4월 17일 at 5:19 오전
지하철 ..그러면..
둘째 동생의 유도생각이 나서 ㅎㅎ
군대가기전에도 유단자였기에,또 한성격하는 가시나라..
이상한 행동 하는 아자씨들을 무참히..꺽어버리는 일들이 부지기수였거든요
그래서..매번 누구누구 동생 맞냐고, 신원확인전화도 받았어요 ㅎㅎ
버스보단, 지하철이..전 아이들 데리고 다니기엔 더 편해요..^^
Lisa♡
2009년 4월 17일 at 7:32 오전
진아님.
여동생 멋지네요.
그런데 그런 남자 별로 없던데..
하긴 한 번 정도..
재미있네요.
여동생도요.
버스보다야 지하철이 아이들 데리고
다니기엔 딱이지요.
겨울비
2009년 4월 18일 at 1:35 오전
가는 시간, 다가오는 시간…
저처럼 멍하니 흘려보내지 않고
격정적으로 살아내는 리사님 페이지에서
연두 지나 초록도
벚꽃 지고 난 후 철쭉도 만나요.
Lisa♡
2009년 4월 18일 at 8:24 오전
겨울비님.
공연히 왜 이러세요?
격정적이면 베토벤 생각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