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틴다리(사라예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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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다리.

보잘 것 없고 조그만 다리가 세계적으로 유명한 다리로

이름이 난 것은 1914년 6월 28일 그 당시 가장 강대국의 하나였고

유명세를 더하던 오스트리아 황태자부부 암살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세계 제 1차 대전을 일으켰고 그 이유로 이 다리는

지금껏 많은 관광객이 찾는 다리이다.

실제로 보니 상상했던 것보다 작고 볼품없는 다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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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는 점령하고 있던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를 합치게 된다.

본래 이 땅은 슬라브민족이 많이 사는 땅으로 세르비아는 이 땅을 노리고

있었고 합병을 하자 오스트리아를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19세기였던 당시는 오스트리아의 세력이 전 유럽에 막강했다.

그때 가장 유명한 인기를 가진 황태자부부가 점령지인 이 땅을 방문한다는

뉴스가 들어오자 세르비아 민족청년당원들은 계획을 세운다.

자기네 민족청년당과 세르비아를 전세계에 알릴 기회가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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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다리 위에서 황태자부부를 암살하려고 했다가 많은 군중들로 인해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게 되고 이에 실망한 민족청년당원들은 당황하게 되는데

그때 황태자부부가 가브리엘로 프린치프가 서 있던저 사진의뮤지움 모퉁이로

오게 되었고 바로 앞에 있던 가브리엘로는 총을 발사한다.

황태자부부는 그 자리에 즉사한다.

바로 병원으로이송했으나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되었다.

이에 분노한오스트리아는 바로 세르비아를 침공한다.

그때 오스트리아는 이탈리아, 독일과 헝가리제국과 동맹관계였고 프랑스를

고립시키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프랑스는 러시아와 동맹관계였고 세르비아는 러시아에 구원을 요청하게 된다.

러시아가 세르비아 편을 들게 되면서 전쟁은 커지게 되고 이탈리아는 동맹국인

독일을 저버리고 연합군 편에 서게된다.

결국 많은 희생과 피비린내를 남기고 전쟁은 미국의 연합군 참전으로 연합군의

승리로 끝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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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비아 민족청년당은 열혈청년당이었다고 한다.

이 당원 중에는 나중에 복역 후 소설을 써서 노벨문학상을 받은

이드 안드라비치가 있었다.

그는 <드리나강의 다리>로 노벨문학상을 받게 된다.

여러 단편들로 구성된 이 책은 주인공이’다리’로수많은 사람들의

사연들을 듣고 역사를 만들어가는 다리의 이야기다.

세르비아의 민족적인 정서를 잘 나타낸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가장 민족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는 말을 다시 실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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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 현장을 찍은 이 사진들은뮤지움 벽에 몇 장 걸려있고

그 역사적인 건물은 박물관으로 공개하고 있다.

세계를 피로 물들인 전쟁의 도화선치고는 너무 조그맣고 고요하다.

저 사진 속에 누가 이드안드로비치일까가 궁금했다.

가브리엘로의 수염이 자란 모습이 수척하나 눈빛들만은 대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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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는 아주가난하다.

도시전체가 날씨탓인지 을씨년스럽다.

우리교민은 단 한가족이 살고 있는데 NGO활동을 하는 분이다.

관광객들이 요청을 할 경우 반가워서라도 나오는데

마음이 짠하다.

그렇게 역사와 모든 설명을 조리있게 잘 할 수 없다.

그 분은 아이가 4명인데 부유함과는 거리가 멀지만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없다고 한다.

교육비는 거의 무료이고 병원비도 무료이지만 거기에 따르는

고충도 만만치 않다고 한다.

그는 현재 고교를 돌며 에이즈예방운동과 의료봉사활동 지원을

하고 있다고 했다.

그 쪽으로 여행하실 계획이 있는 분들은 믹스커피나 한국과자나

밀봉반찬등을 좀 사가서 현지의 교포들에게 주면 아주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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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는 그 후 유고연방으로 합병되었다가

1992년 3월에 다시 분리독립했다.

이슬람교도가 40% 이상이며 세르비아인인 슬라브족이 많이 살고있다.

특이한 건 대통령이 3인이다.

공동으로 돌아가며 직을 맡으며 대외적인 행사에는 같이 참석한다.

8개월씩 맡는데 서로 필요할 때는 기꺼이 참여한다고 한다.

인구는 약 450만명이고 발칸의 서부에 속한다.

수도는 사라예보로 우리의 정현숙과 이예리사 선수의 탁구경기로 유명하다.

그 사라예보경기장은 우중충하고 눈에 띄지도 않는다.

사라예보에서 베오그라드로 넘어가는 길은 정말 아름답다.

스위스인가 할 정도이다.

2 Comments

  1. 순이

    2010년 11월 3일 at 2:23 오전

    사라예보는
    이에리사 선수의 탁구 승전보가
    라디오 전파를 타고 날아오던 곳이라
    명소로 기억되고 있는데 낙후된 도시가 되었군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2. Lisa♡

    2010년 11월 3일 at 10:04 오전

    순이님.

    탁구경기가 그때 대단해었죠?
    저는 어릴 때인데 그래도 기억이 납니다.
    낙후되었다기 보다는 좀 못살지요.
    전쟁이 잦다보니…아무래도..
    그래도 멋쟁이들은 엄청 많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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