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인열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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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비록 환쟁이로 불릴지라도

2001년에 역사 비평사에서 출간되었다.

일찍 이 책을 사두고도 미리 읽어보지

못함이 아쉽다.

그 이후 열린 겸재의 전시회나 초상화전

등을 가면서도 이 책을 보지 않고 갔다는

점이 영 껄끄럽고 부끄럽다.

저자-유홍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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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담 김명국.

아무도 구속할 수 없었던 신필.

그를 대표하는 달마도.

일필휘지의 속도감으로 그려낸 그림이다.

옛사람들은 이런 작품을 두고 신품이라 했고

그런 화가를 신필이라 했다.

김명국 이전의 그 누구도 신필이라는 평을

듣지 못했고 그 이후에는 오로지 장승업만이

신필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김명국은 인조 때 사람으로 술을 좋아했다.

술이 취해야만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그에게서 그림을 구하고자 하면 술독을 지고

가야했다. 약간 덜 취한 상태의 그림이 가장

좋은 작품이었다고 한다.

노년에는 스스로 아호를 취옹이라 부르니 그야말로

술 취한 늙은이였다.

술은 그에게 창작 촉매제였다.

거칠고 호방한 그림 탓에 일본에서는 그의 그림을

얻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고 한다.

달마도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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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제 윤두서.

자화상 속에 어린 고뇌의 노력

초상화하면 자화상으로 가장 유명한 윤두서가

떠오르는 건 사실이다. 그는해남의 명문 윤씨

종손으로 고산 윤선도가 증조부이며 지봉 이수광의

증손녀가 그의 처이다.

공제는 일찌기 과거를 포기하고 관직에 나가지 않았

으나 그의 학문은 文, 史, 哲, 詩, 書, 畵에 능하고

천문, 천체, 병법, 병서, 병검 등의 학문에도 도를

텄다고 한다.

동국여지지도까지 만든 공제를 그의 외증손인 정약용

이 집대성하기에 이른다고 봐도 틀리지않다.

사람들은 그를 재상에 버금가는 인물로 여길만큼 대단한

학자이나 그는 주로 해남을 떠나지 않고 야인으로 살았다.

공제는 따로 그림 스승이 없이 혼자 터득한 그림을 주로

그렸는데 서민들의 삶을 실제로 보고 그대로 그린 면에서

실학적인 그의 사상을 엿볼 수 있다. 그의 그림을 청하는

이가 많았으나 자기 예술에 대한 자존심이 높아 그리 자주

그림을 그려주진 않았다고 한다. 그의 글씨 또한 뛰어났으나

그림에 가려져 그 공이 드러나지 않았는데 동국진체라는

글씨체는 아름답기가 이루 말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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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아재 조영석.

선비 정신과 사실정신의 만남.

조영석은인물화의 대가이다.

아래 그림은 형 조영복을 그린 그림으로

도포자락 사이로 나온 두 손을 살포시 무릎에

얹은 그림으로 당시의 그림에는 손은 보이지 않게

그리던 것과는 달리 과감하게 그린 명작이다.

조영석은 자기관리에 철저했는데 관아재(觀我齋)

라는 호만 보더라도 알 수 있다.

환쟁이로서의 자신을 남에게 드러남을 싫어해서

두 번이나 왕의 초상화를 그리는 어진모사에 초대를

받았으나 거부하거나 집필은 하지않는 감동으로만

참여했다. 말년에는 당대의 뛰어난 시인 이병연과

겸재 정선과 가까운 벗으로 인왕산 기슭에서 지냈다.

관아재 그림에는 사실성과 함께 현실성이 흠뻑 베여있고

조선적인 것을 추구하는 화풍이라고 유홍준은 전한다.

조선의 인물화는 관아재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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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권으로 된 화인열전은 1권에

김명국, 윤두서, 조영석, 정선

이렇게 4사람의 생애와 작품과 역사에

관한 글을 실었다.

화가라 칭하지 않고 화인이라 함은

그림에만 뛰어난 게 아닌 書와 학식에도

능통한 이들이라 사람 人을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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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재 정선.

내 비록 환쟁이라 불릴지라도

필자는 앞의 세 사람 분량의 글을 겸재에게

양보했다. 1권 책의 1/3은 겸재에 대한 글이다.

겸재하면 뭐니뭐니해도 진경산수화이다.

"조선3백년 역사 속에서 조선적인 산수는 겸재에서

비롯되었다고 해야한다" 라고 관아재는 말했다.

<금강전도><인왕산제색도><박연폭포> 에 이르면

그 평가를 하기 어려울 정도로 대단하다.

겸재는 60 가까이 되면서 그림에 완전 신기를 더한다.

겸재가 화원이었나, 양반가문인가는 중요치 않다.

그가 우리에게 남긴 작품들은 실로 대단한 가치를

지닌 까닭에 그의 출생이 그리 중요한 건 아니다.

겸재로 부터 시작한 남종화법이 후대의 단원 김홍도에

이르러 남종화가 번성하게 만든다.

겸재는 유머까지 갖춘 인물로 금강전도만 보더라도

숨은 그림처럼 그려진 여러 절과 부처상이나 사람을

볼 수 있는데 그런 여유를 보려면 그의 그림을 세밀하게

관찰해야만 그림 속의 에피소드를 찾을 수 있다.

겸재의 집 앞엔 그림을 부탁하는 이들이 문전성시를

이루었는데 그는 마다않고 일일이 시간이 되면 다 허락하여

그려주었다고 한다. 이름 난 효자인 겸재는 마흔이 되도록

되도록 관직에 나가지 못해 노모의 끼니걱정에 이르자

스승의 형인 좌의정 김창집에게 부탁해 종6품직을 얻는다.

나중에 겸재는 그림으로 동지중추부사까지 오른다.

뿐만 아니라 조상들의 벼술까지 올려주는 가문의 영광 노릇을 한다.

자화상을 보면 겸재는 왜소한 몸집에 동안의 얼굴을 한

사람으로 당시로서는 장수한 84세까지 살았다.

…인생과 예술에는 준엄함이 있어 만년의 원숙한 경지란 반드시 중

년의 치말함과 성실성을 경험한 자만이 도달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만약

중년 시절에 만년의 작업을 시도했다면 그것은 불성실이고 일시 성공한다고

해도 조로(早老)하고 마는 법이다. 겸재로 말할 것 같으면 60대를 다 보내는

노년에 이르기까지도 그런 중년의 치밀함과 성실성을 버리지 않았다. 때문

에 겸재의 만년은 더욱 원숙했고 남들은 노년의 경지에 머물고 만 것을 만

년에 이르러 한번 더 높이 꿀어올렸던 것이다. 더욱이 겸재는 84세까지 장

수하는 천복을 누렸다. 단원 김홍도를 겸재 정선과 비교할 때 아쉬운 것은

단원은 나이 60세 무렵에 세상을 떠나 겸재가 70대에 보여준 만년의 원숙함

같은 것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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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Comments

  1. 안영일

    2012년 4월 14일 at 12:59 오후

    좋은 책과 작가를 소개해주셨읍니다, 열우당시절 의 문화재청장으로 많은 질시와 질

    투를 받은 작가이나 이나라의 문화재부흥의 한장을 열은사람으로 생각함니다, 식구에

    게 얼마전에 유흥준의 신간을 주문하라고햇으니 저의집경우 얼마있으면 도착이 돼겠

    읍니다, **전해오는 신필*의 내력 그림을그린다하며는 대접을받던 그런시절에 어떤

    백수가 대같집에서 평풍을받아놓고서 3달인가를 대접받으며 그림을 차일피일 미루

    며 호식 하다병풍을 그려놓고서 죽었담니다, 평풍의그림은 일필휘지의 긴 검은묵선 한

    줄 그런데 그병풍을 피고서 방안에앉으면 좔좔좔 흐르는 냇물소리가, 병풍에서 난

    다는 후세에 냇물을 한줄 혼신의힘으로 그려넣고서죽었다는 ** 신필의내력입니다,

    내일은 저희 6식구 디즈니랜드인지 월드인지 킴덤하우스호텔에 5-6일의 여정으로 온

    가족이 손주와 (5.8살 ) 프로리다여행을 떠남니다, 주인장 항상 건강하시고 독후감 그

    리고 자랑을 해보았읍니다,    

  2. Lisa♡

    2012년 4월 15일 at 12:17 오전

    네—–플로리다 잘 다녀오세요.

    신필이 쉬운 건 아니니 그 병풍 잘 모셔두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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