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인열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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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의 나날속에서도 붓을 놓지않고

1권에 이어 2권에서는

현재 심사정

능호관 이인상

호생관 최북

단원 김홍도

를 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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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심사정

고독한 나날 속에서도 붓을 놓지않고

..당시에 어떤 사람은 현재의 그림이제일이라고 추앙하였고, 어떤

사람은 겸재의 그림이 제일이라고 추승하였는데, 그림이 온 나라에

알려진 것도 비슷하였다.

-이규상의 <일몽고> 중에 ‘화주록’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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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로 부터 철저히 소외되었던 심사정은 겸재처럼

사생의 현장인 천하명승을 둘러보며 그림을 그릴 처지가

못되었다. 그리하여 명화와 화본에서 자기예술을 실현시킬

수 있는 계기를찾아 그것을 고수하게 된다.

국제적 지평은 넓혔다는 평은 있으나 겸재처럼 자기만의

개성이 부족하다는 평을 또한 갖고 있다.

그러나 완벽한 <딱따구리>를 비롯 화조도와 <하마선인도>

같은 도석인물화라는 새로운 경지의 그림을 그린 것으로

그의 작품세계는 이미 선의 경지를 넘어섰다.

도석인물화의 경우는 지두화(손가락으로 그린 그림)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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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재의 진경산수가 박진감을표현하는 것에 머무른 것이 아니라

그 실경의 개별적 성격을 조선산수의 보편적 차원으로 끌어올리려고

노력할 때 반드시 보완했어야만 했던 그 무엇이 있었다. 현재가 보여준

보편성,관념성이라는 것도 당대적 정서와 저선적 서정에 뿌리를 두지

않으면 공허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겸재도 관념적 남종문인화풍의

그림을 그렸고, 현재도 금강산같은 진경산수를 그렸다는 사실은 양자의

대척적 측면 못지 않게 상호보완적 측면이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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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호관 이인상

오직 아는 자만은 알리라

…그의 그림은 보통 화가들의 좁은 오솔길을 훌쩍 뛰어넘어 곧바로

꼿꼿한 자태와 파리하면서도 강단 있는 정신으로 화가의 상승별품의

최고경지에 이르렀다고 한다.(이규상의 일몽고 中 화주록에서)

이인상 그림의 필획은 그윽한 맛이 있는 가운데 깍아지른 듯 삼엄하며,

화법이 독특하면서도 막힘 없이 산뜻하고 시원하여 고금 화가들의 뛰어난

경지를 넘나들고 있다. 그의 전서와 팔분의 획은 비록 옛날의 명수라

하더라도 그와 대적할 만한 이가 많지 않을 것이며, 도장은 힘주는 것이

가지런하여 천기가 흐르고 있다. 따라서 전서와 팔분, 회화와 전각 모두

신품의 경지라고 할 수 있다.(이규상의 일몽고 中 서가록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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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송도>

눈 덮힌 낙락장송을 그리면서 대담하게 윗줄기를

생략하여 구도상 긴장감이 감돌고 그 꿋꿋한 기상이

더욱 강하게 다가온다. 화면전체에 은은한 번지기를

능숙하게 구사하여 청신하면서도 삼엄한 분위기가 서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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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상은 아버지가 서출인 관계로 자신도 관직에

나가지 못한채 서출의 운명을 평생 지고 살았다.

하지만 그의 고고한 성품은 은일자로서의 삶을

살면서 기품을 잃지 않았고, 누구보다 뛰어난 문인화의

세계를 보여주었다.

능호관을 안다는 자체가 그 사람의 안목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었다고 하니 그의 강직한 성품과 더불어

고담하고 격조있는 작품이능호관 삶 그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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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미학, 서양미술사에서는 하나의 작품세계에서 그 작가의

인품을 말하는 일이 절대로 없다. 화가의 성격이 작품에 나타

난다는 것은 개성을 말할 때 곧잘 거론하면서 인품을 작품과

연관시키는 일은없다. 이것은 동양미술사와 동양미학의 독특한

미적 가치론이다. 서양미학의 입장에서는 비과학적인 설명이라고

외면할지 모르지만 동양미학에서는 모두가 심적으로 동의하고있는

지고의 미적 덕목인 것이다.

능호관의 시는 봄 숲의 외로운 꽃이요, 가을 밭의 선명한 백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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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생관 최북

붓으로 먹고살다 간 칠칠이의 이야기

…한 귀인이 최북에게 그림을 요구했는데 최북은 이를 거절하였다.

이에 귀인이 최북을 협박했다. 그러자 최죽은 분노하여 "남이 나를 저버리느니

차라리 내 눈이 나를 저버린다" 라고 하며, 송곳으로 한쪽 눈을 찔러 애꾸가

되고 말았다. 늙어서는 한쪽에만 안경을 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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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칠칠이라 부르며 살았던 최북은 오기, 기개, 고집,

자만심, 불같은 성미였고 숱한 일화로 많은 세인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그림보다 값을적게 쳐주면 그림을 찢어버렸고

그린 그림보다 나은 값을 주면 받은 돈을 돌려주기도 했다.

작은 일에 스스로 구속되지 않았고 웬만해서는 꿈쩍도 하지 않은

인물이다.버림받은 신분으로 태어났지만 양반 앞에서도 기 하나

죽지 않는 자유인의 모습으로 살았다.

그런 그의 성격처럼 그림도 "노끈처럼 힘있는" 필치였고 호쾌하고

기운이 넘치며 주로 호방한 작품들이 많다.

최순, 최메추라기라고 불릴만큼 메추라기를 잘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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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보지못했는가, 최북이 눈 속에서 죽은 것을

담비가죽 옷에 백마를 탄 이는 뉘집 자손이더냐.

너희들은 어찌 그의 죽음을 애도하지 아니하고 득의양양하는가.

최북은 비천하고 미미했으니 진실로 애닮도다.

최북은 사람됨이 참으로 굳세었다.

스스로 말하기를 붓으로 먹고사는 화사라 하였네.

체구는 작달막하고 눈은 외눈이었다네만

술 석 잔 들어가면 두려울 것도 거칠 것도 없었다네.

최북은 북으로 숙신(만주)까지들어가 흑삭(흑룡강)에이르렀고

동쪽으로는 일본으로 건너가 적안까지 갔었다네.

귀한 집 병풍으로 산수도를 치는데

그 옛날 대가라던 안견, 이징의 작품을 모두쓸어버리고

술에 취해 미친듯 붓을 휘두를 요량이면

큰 집 대낮에 산수 풍경이 생겼다네.

그림 한 폭 팔고는 열흘을 굶더니

어느 날 크게 취해 한밤중 돌아오던 길에

성곽 모퉁이에 쓰러졌다네.

묻노니 북망산 흙 속에 만골이 묻혔건만.

어짜하여 최북은 삼장설에 묻혔단 말인가.

오호라! 최북은 몸은 비록 얼어죽었어도

이 이름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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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원 김홍도

조선적인, 가장 조선적인 불세출의 화가.

…고금의 화가들은 각기 한 가지만 잘하고 여러 가지를

다 잘하지는 못하였다. 김 단원은 우리나라 근대에 출생했는데

어릴 적부터 그림을 공부하여 못하는 것이 없었다. 인물, 산수,

신선, 불화, 꽃과 과일, 새와 벌레, 물고기와 게 등에 이르기까지

모두 묘품에 해당되어 옛 사람과 비교할지라도 그와 대동할 사람이

거의 없었다. 특히 신선과화조를 잘하여 그것만 가지고도 한 세대를

울리며후데에까지 전하기에 충분했다.

..단원은 독창적으로 알아내어 교묘하게 자연의 조화를 빼앗을 수 있는

데까지 이르렀으니, 이는 천부적인 소질이 보통 사람보다 훨씬 뛰어나지

않고서는 될 수 없는 일이다.

-표암 강세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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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원이 그린<서직수>초상화이다.

얼굴은 이명기가 몸과 옷은 단원이 그렸다.

임금의 어진을 그릴 때도 그는 몸을 맡곤 했는데

도포를 사실적으로 너무나 잘 그려 오히려 얼굴보다

옷이 더눈에 들게그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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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원과 그의 평생 스승인 표암 강세황의 합작품.

<송호도>

소나무는 표암이 호랑이는 단원이 그렸다.

검게 보이는 줄무늬조차 세필로 털 하나하나를

그려 가히 놀라운 작품으로 사제 간의 정이 흠뻑

묻어나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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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자 유홍준은 화인열전 2권에서도 앞의 겸재처럼

단원에게 책의 1/3 이상을 할애했다.

시대의 천재였던 단원에게 그만한 예의와 거기에

따르는 설명이 그 정도로도 모자랄 뿐이다.

단원은 신선도가 뛰어나 많은 이들의 그가 그린 신선도를

갖길 원했으며속화를 리얼하게 그려 그가 그린 속화는

너무나 유명하다. 용주사에 그려 준 불교탱화는 서양의

기법으로 그린 뛰어난 탱화로 유명하고 그의 나이 50세

쯤 그린 모든 그림들은 거의 다 명작으로 인생의 연륜과

원숙한 경지로 절제의 미가 돋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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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원의 인품을 보면 얼굴이 청수하고 정신이 깨끗하여 보는 사람들은

모두 고상하고 세속을 초월하여 아무 데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사람이

아님을 다 알 수 있을 것이다. 성품 또한 거문고와 피리의 청아한 음악을

좋아하여 꽃피고 달 맑은 밤이면 간혹 두어 곡조를 연주하여 스스로 즐긴다.

그의 기예가 옛 사람을 따를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풍채가 헌출하고 우뚝

하여 진나라 송나라의 고상한 인물 가운데서나 이와 같은 사람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니, 이유방(명나라 최고화가)같은 사람에 비교한다면 벌써 그보다

훨씬 나을지언정 그만 못한 것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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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천의 신이 있다면 그 모습을 그대로 꼭 닮게 그려준 걸 즐거워했을 것이다"

라고 표암은 단원이 그린 금강산 세밀도를 보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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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원 김홍도는 어릴 적 부터 일찌기 표암 강세황을

스승으로 모시는 행운을 얻었는데 표암은 단원을

한 눈에 알아보고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단원의 이름이 높아지면서 사람들이 단원의 그림을

받아와 표암에게 당신의 글을 써달라고 하면 더욱 감화로워했다.

단원과의 만남과 교류에 관해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내가 단원과 사귄 것은 전후하여 모두 세 번 변하였다. 처음에는

내 문하에 다닐 때 그의 재능을 칭찬하기도 했고 그림 그리는 법을

가르치기도 했다. 중간에는 관청에 같이 있으면서 아침저녁으로 함께

거처했다. 그리고 나중에는 예술계에 있으면서 지기다운 느낌을 가졌다"

나이 차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표암은 단원을 지기 대하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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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소불능의 신필.

근대의 명수.

우리나라 4백년 역사상 파천왕적인 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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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도의 예술은 조선 4백 년 역사 속에 축적되어온 모든 예술적

업적을 한 몸으로 끌어안아 하나의 전형을 창조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은 마치 모든 냇물이 호수로 모여들고 그 호수에서 발원한

냇물이 다시 여러 갈래로 흘러가는 모습이니, 앞시대의 예술은 단원이라는

호수 속에서 종합되고 이후의 화가들은 단원이라는 호수로부터 흘러나와

너나없이 단원을 본받는 형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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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모시에 그린 <염불서승도>

몹시 아름답고 단원의 솜씨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솜씨이다.유홍준은 어쩌면 이는 단원 자신이 죽음을

예감하고 자신의 죽음을 상징한 ‘죽음의 자화상’이 아닐

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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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Comments

  1. Hansa

    2012년 4월 24일 at 1:14 오전

    저는 단원의 팬이랍니다.
    특별히 금강산 기행 화첩에 실린 산수그림이 좋더군요..

       

  2. Lisa♡

    2012년 4월 24일 at 2:17 오전

    한사님.

    단원을 알고 그의 그림을 보면
    팬이 아니될 수 없지요.
    저는 송호도를 보는 순간 오래 전에
    완전 사로잡혔지요.   

  3. 벤조

    2012년 4월 27일 at 2:57 오전

    수고하셨다는 말 하고싶어서…ㅎ
    유홍준님의 책이니까 재미있으셨을 거예요.

       

  4. Lisa♡

    2012년 4월 27일 at 3:50 오전

    벤조님.

    재미있어요.
    우리나라 3대 구라쟁이 아닙니까.
    비가 많이 오는 날 경복궁에 가려구요.
    그가 말한 거 보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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