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리오 영감’은 많은 생각할 거리를 불러 일으킨다.
현재 아이들에게 올인하고 있는 나 자신부터 돌아
보게 만드는 소설이다.
고리오는 두 딸을 위해 인생에서 벌어들인 모든
재산을 투자하고 결국 비참하게 죽어간다.
죽기 전 나타나지 않는 두 딸을 향해 푸념도 하고
애원도 하고 저주도 퍼붓지만 결국 고독하게 죽어간다.
19세기 파리는 사치와 허영과 혼란과 타락이
판치고 있는 사회이다.
발자크는 그 속에서 부르조아들의 생활상을
예리하게 파헤치고 탈옥자인 보트랭을 통해 이런
사회적인 기반을 통렬하게 비판하기도 한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바로 앞에 읽은 발자크
평전에서 나온 발자크 자신의 어느 부분을 보는
듯도 했다. 그가 이렇게 사회의 모습들을 이해하
면서 자기 자신은 부조리를 답습하고 헤어나지
못함을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주인공 ‘으젠’을 은근히 비슷하게 만들었다.
..내인생, 바로 내 인생은 내 두 딸에게 달려 있소.그애들이 행복하다면,
내 새끼들이 우아하게 옷을 입는다면, 그애들이 융단 위를 걸어다니기만 한
다면, 내가 무슨 옷을 입건 내가 누운 곳이 어디이건 무슨 상관이 있겠소?
그애들이 따뜻하면 나는 춥지 않소. 그애들이 웃으면 나는 결코 슬프지 않소.
그애들이 슬퍼할 때에만 나는 슬프다오. 당신이 아버지가 되었을 때 당신 아
이들이 재잘거리는 소리를 듣고 <저 애는 내가 낳았지!> 라고 생각해 보시오.
그러면 어린 것들의 피 한 방울 한 방울이 당신과 연결되어 있다는 걸 느끼게
될 거요. 그애들은 당신의 피에서 피어난 갸날픈 꽃들이오. 어린애들 피부에
당신도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할 것이고, 그애들이 움직일 때 당신도 움직이고
있다고 믿게 될 것이오. 그애들 목소리가 도처에서 내게 들려오는 것 같소.
그애들 눈초리가 슬퍼 보이면, 내 피가 얼어붙는 것 같소. 앞으로 당신도 당신
행복보다 자식들 행복에 대해 더 즐거워하게 된다는 걸 알게 될 거요….
..그는이 사회를 거창하게 나타내는 세 가지 표현을 보았다. 그런데 그는
결심할 수 없었다.<복종>과 <투쟁>과 <반항>……<복종>은 귀찮고, <반항>
은 불가능하며, <투쟁>은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그는 가족을 생각했다.
그는 안정된 생활에서 오는 순수한 감정을 기억했다. 그는 자기를 사랑해 주
었던 사람들과 함께 보낸 옛날을 돌이켜보았다. 가정의 자연스런 규칙에 순응
하여 이 사랑스런 사람들은 아무런 고민없이 충만되고 지속적 행복을 그곳에서
발견하고있었다….
욕망은 정복하기 어려울 때와 마찬가지로 쉬울 떄에도 불거지게 마련이다.
우울한 기질에는 여자의 교태라는 강장제가 필요하다.
덕성이란 잘게 쪼개지질 않는다.
젊은 시절에는 양심이 부당한 쪽으로 기울어지면 양심의 거울을 감히 볼 수 없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