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히말라야 원정사 [3] (1980~1982년) *-

한국히말라야원정사[3]1980~1982년

비정의마나슬루,드디어등정되다.


동국산악회마나슬루원정대

80년대의첫히말라야진출이라고할수있는동국산악회의원정은그대상이한국산악인들에게는비운의산으로기억되는마나슬루(8,163m)라는점에서관심을끌었다.71년부터76년까지3차례에걸쳐6명의국내산악인을앗아가고도끝내정상을허락하지않은산,그험난한마나슬루에일개대학단일팀이도전장을낸것에대해서우려의소리도있었다.

하지만동국대는76년의토왕성빙폭하단부초등정과희양산암벽에서의개척등반등에서얻은기술과조직력으로마나슬루원정대를꾸렸다.대원은이인정(35)대장을비롯해서이영진(33),김광진(30),유태원(28),양명수(27),서동환(27),이종량대원(25)등7명이었다.

원정대가12명의셀파와123명의포터를고용하여13일의카라반끝에3,780미터의베이스캠프에도착한것은3월19일이었다.이틀뒤에등반을개시하여3월24일에1캠프(4,880m),4월1일에2캠프(5,500m),10일에3캠프(6,350m),20일에4캠프(6,900m),그리고22일에는이종량대원과3명의셀파가7,500미터지점에설동을파서5캠프로삼았다.

이어서4월23일에는이대원과파상노르부,락파텐징셀파등3명이정상공격을시도하려했으나때마침불어닥친강풍과혹한때문에공격을단념하고일단후퇴했다.전열을가다듬은원정대는4월27일서동환대원과아지와셀파를2차공격조로지명,마지막캠프를출발시켰다.새벽6시30분에정상을향해출발한세사람은그러나이번에도마나슬루특유의강풍을이기지못하고돌아섰다.

마나슬루특유의강풍을이기지못하고돌아섰다.


다음날,어쩌면마지막이될지도모르는3차정상공격이시작되었다.서대원과아지와,앙파쌍셀파등3명은아침7시20분에캠프를떠났다.이날은요행히도날씨가쾌청했다.서대원은피나클을지나산소통을교체하고등반을계속했다.조금더가자오른쪽으로전위봉이보였다.고도계가8,100미터를가리키는곳에이르니정상암봉이보였다.오후1시30분에는정상암봉아래에도착했다.

그곳에서기다시피암벽을오르니티베트쪽에서맞바람이거세게몰아쳤다.정상이었다.바람때문에도저히몸을지탱할수가없어하켄을박고사진을찍었다.이들은갑자기악화된날씨속에서8시간이나걸려마지막캠프로돌아올수있었다.서동환대원은이때발가락에동상을입어귀국후수술을받아야했다.

이로써한국인에게16명의생명을앗아간비정의산마나슬루는4번째원정에서마침내정상의문을열어주게되었다.이것은한국인이오른두번째8천미터급등정기록이며국내최초로단일산악회팀이이룩한개가였다.

역부족으로패퇴한닐기리북봉원정

한국히말라야닐기리북봉원정대

1980년프레몬순의마나슬루원정이성공리에끝나고포스트몬순기에는닐기리북봉(7,061m)원정이있었다.대장을맡은오인환(34·동국산악회,양정산악회)은69년에김정섭씨와함께추렌히말정찰을다녀왔고75년에는한국산악회에서파견한안나푸르나1봉정찰대에참가한적이있는산악인이었다.그는80년봄에김도섭(29·에코클럽),이종수(26·성북산악회),조정술(34·부산경남공고OB)과함께닐기리북봉을정찰하고귀국해서곧바로원정대를꾸려9월에출국했다.대원은정찰에참가했던김도섭과새로합류한이영태(24·YMCA등산클럽)대원을합쳐단지3명뿐이었다.

닐기리북봉은안나푸르나산군에속한산으로안나푸르나1봉에서불과11킬로미터밖에떨어져있지않다.이산은북봉,중앙봉(6,940m),남봉(6,839m),남동봉(6,765m)으로이루어져있다.그러니까북봉이이산의주봉인셈이다.산명닐기리(Nilgiri)는산스크리트어로‘니르’는푸르다라는뜻이고‘기리’는산이라는뜻이어서‘푸른산’이란의미를지니고있다.닐기리북봉은1962년10월에네덜란드의테레이3형제가북면쪽에서북벽을이용해초등정한후79년가을에일본대가남쪽으로등정을시도했으나5,700미터에서돌아서고말았다.

그이듬해인80년가을한국대는이봉의남쪽으로루트초등을노리고닐기리빙하로들어갔다.그러나불과3명의대원과2명의셀파만으로이봉의남쪽대암벽을뚫기에는역부족이었다.9월27일4,300미터의베이스캠프에서등반을개시한원정대는2캠프(5,500m)까지진출한후6,200미터까지올라갔으나그곳에있는대암벽을돌파하지못하고폭설과인원부족으로10월10일철수했다.등반개시불과13일만의패퇴였다.


최초의카라코람진출과안나푸르나남봉등정

81년에는한햇동안모두37개팀이해외로진출했는데이것은26개팀을기록했던80년도의원정대수보다도11개나증가한것이다.81년의해외원정대중에는일본의북알프스등지를목표로한원정이18개팀으로가장많았다.그다음이히말라야를목표로한팀이전부9개팀이었다.그중에서악우회의바인타브락과성균관대의안나푸르나남봉을제외하고는7개팀은마나슬루(피톤클럽),고줌바캉(대전자일클럽),파빌(부산학생산악연맹),눕체(한국음반산악회),람중히말(선경여자산악회),안나푸르나2봉(영남대산악회),에베레스트(양정산악회)로의정찰을목표로한팀이었다.

바인타브락에서이정대대원조난사

악우회카라코룸바인타브락원정대

80년대에들어서나타난국내의해외원정광역화현상은히말라야원정에도영향을주어81년에국내최초로카라코룸으로진출하는원정대가나왔다.79년부터알프스3대북벽등정을성공시키는등국내외에서활발한활동을보여오던악우회가이번에는카라코룸의처녀봉바인타브락2봉(6,960m)에도전장을낸것이다.한국대가네팔이외의히말라야지역으로진출한것은이팀이처음이며이것은히말라야원정을시작한지20여년만의변화였다.

카라코룸지역에는동쪽으로부터시아첸,발토로,비아포,히스파,바투라등5개의커다란빙하가흐르는데그중에서비아포빙하에있는바인타브락(BainthaBrakk)은날카로운암봉과빙벽으로이루어져있어‘사람잡아먹는귀신’이란뜻의‘오거(Ogre)’라는별명을가지고있다.그주봉(7,285m)은77년7월에야크리스보닝턴이이끄는영국의정예등반가들에의해초등정되었고2봉(6,960m)만이미등인채로남아있었다.

바인타브락2봉에도전한악우회팀은심의섭대장(41)지휘하에알프스3대북벽에서맹활약을했던윤대표(29),허욱(29),유한규(27),임덕용(27)대원을비롯해서임종옥(40),유근하(33),이정대(30),조상현(27)대원등이참가했고한국방송공사에서파견된민상기(33),김홍(30)기자가추가되어모두11명으로구성되었다.

이들은자금조달문제로출국이늦어져예정보다1개월이지연된7월1일베이스캠프에서등반을개시했다.늦은일정으로조급함을느낀원정대는빠른속도로캠프를전진시켜7월6일1캠프,8일에는2캠프,그리고14일에는약750미터의고정로프를설치한끝에6,300미터의커니스위에마지막캠프를설치완료했다.

그리고다음날곧바로이정대,유한규대원이중앙벽으로정상공격을감행했다.새벽4시20분3캠프를나선두대원은12시경에는6,700미터지점의설원을트레버스해오후1시30분에는정상암부에다달았다.그러나6,900미터의마지막정상벽에도달했을때이정대대원이심한고소증세를보였고유대원도지쳐있었다.그리고거의오버항에가까운중앙벽의상단부는그들이가지고있는장비와체력으로도저히돌파할수없게보였다.오후4시,두대원은정상을불과60여미터남겨놓고통한의후퇴를해야만했다.

그러나이들이6,700미터지점의꿀르와르를안자일렌한채로하산하던중이정대대원이실족하는사고가발생했다.그런데연결된매듭이풀려있었고그는온데간데없었다.다음날몇명의대원이수색작업을펴보았지만그의우모복만발견하는데그쳤다.이사고가이정대대원이유한규대원을살리기위해서스스로자일을풀고추락한것으로메스컴을통해국내에알려지자그의살신성인의행위에대하여많은사람들이감동해마지않았다.


안나푸르나남봉등정과그보고서


성균관대산악회안나푸르나남봉원정대

바인타브락에서비보가전해진직후이해가을에는안나푸르나남봉(7,219m)을목표로한히말라야원정대가네팔로떠났다.이원정은성균관대산악회에서대학단일팀으로서는동국대에이어두번째성사시킨것으로5명의대원만이참가했다.한상국대장(34)의지휘아래정해경부대장(29),원종태(27),김홍기(26),김창선대원(21)등모두가히말라야는초행길이었다.

성대산악회가이원정을본격적으로착수하게된것은80년6월경네팔관광성으로부터입산허가를통보받고서부터였다.이들은원정경비일체를자체적으로충당하기로하고그때까지통례로되어있던사전정찰도생략하고곧바로원정대를조직했다.안나푸르나남봉은안나푸르나주봉에서남쪽으로이어진지능에솟은7천미터급봉우리로일명모디체라고도불린다.

안나푸르나성역의안쪽에서시작되는모디콜라의근원지에솟아있는이봉우리는남북으로이어진능선상에북봉(7,010m),중앙봉(7,070m),히운출리(6,441m)등3개의위성봉을거느리고있다.남봉은64년일본의교또(京都)대학팀에의해중앙봉과함께초등정되었고그후프랑스(70년),일본(72,78년),영국(76년),폴란드(79년)대에의해6차례등정되었다.

성대팀이7명의셀파와92명의포터를거느리고4,090미터지점에베이스캠프를건설한것은9월17일.그로부터22일후인10월9일에는3캠프(5,850m)까지전진한후전대원이베이스캠프로하산하여휴식을취했다.그리고10월24일한상국대장과원종태,김창선대원,앙핑조셀파등4인은6,650미터까지전진해5캠프를설치하고다음날새벽정상공격을감행했다.

새벽5시20분마지막캠프를출발한네사람은중앙봉과북봉사이의콜을통해오후1시에일단중앙봉에올라선후,나이프리지를따라등반을계속한끝에오후3시정상을밟았다.성대팀의등정은정찰등반을생략하고각종자료만을토대로원정대를운영한좋은선례를남겼다.또한이들은5명의대원중에서3명이한꺼번에정상에섬으로써이전까지의‘한팀에한명등정’이란한국대의기록을깨트렸다.성대팀은또한귀국후344페이지에달하는원정보고서를펴냈는데그전의어느보고서보다내용이충실하여이후의원정대들에게값진자료로활용되었다.

한산원정대,세계5위의마칼루등정

한국산악회마칼루학술원정대

82년프레몬순의마칼루,람중히말,닐기리중앙봉에도전한3개팀중한국산악회가사단법인인가후첫사업으로추진한마칼루학술원정은그명칭에서나타나듯이국내최초로학술조사를겸한히말라야원정이었다.그러나이것은한국산악회가문교부에학술단체법인으로등록되어해외원정에있어서도학술목적에한해서만추천권한이있었기때문에취했던고육책이었다.

마칼루(Makalu)는네팔과티베트의국경을이루는중부히말라야에서도쿰부산군동쪽에위치해에베레스트의관문인남체바잘에서불과38킬로미터밖에떨어져있지않은세계제5위의고봉이다.산의이름은힌두교시바신의화신(化神)‘마하카라’에서비롯된것으로산스크리트어로이것은‘검은신’이란뜻을가지고있다.

마칼루의모습은1921년영국의에베레스트정찰대가북카르마계곡으로들어가웅장한자태를촬영하여처음알려졌고,본격적인등반은54년봄미국대에의해이루어졌는데이들은동남릉으로등반을시도하여7200미터까지도달했다.그리고다음해인55년장프랑코대장이이끄는프랑스대가북서릉초등정을이루었다.이들은5월15일,16일,17일3회에걸쳐9명의대원전원이등정해세계산악계를놀라게했다.

82년봄한국원정대는함탁영대장(44)의지휘아래신승모부대장(37),허욱(29),이찬영(28),허정식(28),허영호(28),남선우(27),민병국(27),송병호(27),신형기(26)대원등9명의등반대원과이기주(44·의료담당),이근후(48·민속담당),성익환(30·지질담당)등의학술조사팀,그리고민상기(34),양진수(33),이은원(26)등한국방송공사에서파견한보도대원등모두16명으로구성된대부대였다.

원정대는선박편으로인도캘커타로보낸원정물자의통관이늦어져선,후발대로나뉘어베이스캠프(4,740m)에도착했다.그리고장장10킬로미터에달하는마칼루의동남릉을46일간공략끝에5월17일7,400미터지점에5캠프를설치했다.그리고5월20일6캠프(7,700m)를떠난허영호대원과파쌍노르부,앙푸르바셀파등3명이동측설벽을통해서정상을등정하는데성공했다.

허대원은마지막캠프에서부터산소를사용하면서9시간30분의등반끝에정상에서는영광을얻었다.한국산악회의마칼루등정은77년에베레스트,80년마나슬루등정에이어한국의세번째자이언트봉등정기록이며한국산악회가78년안나푸르나4봉등정에이어얻어낸두번째히말라야등정성과였다.


양정,은벽과합동으로닐기리중앙봉등정

양정산악회닐기리중앙봉원정대

마칼루팀과같은시즌에닐기리중앙봉에도전한양정-은벽산악회합동대는5명의대원에2명의셀파를합쳐도합7명이한꺼번에정상을등정해81년가을성대팀이세운4명의기록을갱신했다.닐기리중앙봉(6,940m)원정은이해1월에동계에베레스트정찰을마친양정산악회의김기혁(28),심상돈(28),임병길(27)대원이현지에서입산허가를받아급조되었다.

정찰을끝내고자금조달이어려웠던이들은마침안나푸르나정찰차네팔에온은벽산악회팀에게합동원정을제의했다.그리하여은벽산악회에서안창열(32),김현수(27),김광(27),김영자대원(여·29)이합류하자총대원은7명으로늘어났다.이들은고정로프와연료의부족에도불구하고캠프전진을강행해등반개시9일만인4월22일에는3캠프(6,150m)를설치하는데성공했다.그리고4월25일새벽4시30분김기혁대장과심상돈,임병길,김현수,최광희대원과2명의셀파등7명이동시에정상공격에나섰다.

40미터로프1동으로안자일렌을한일행은오후1시부터불어닥친눈보라를뚫고드디어전원이정상에올라섰다.그러나이들은하산도중김광대원이실족해발목골절상을입자그를후송하느라자정넘어서야마지막캠프로돌아왔다.다음날원기를찾은대원들은계속하산했으나심상돈대원은최대원을간호하기위해제3캠프에남았다그러나다음날부터날시가악화되어그를후송하지못하고10일간을버틴끝에극적으로생환했다.


국내최초여성대람중히말등정

선경여자산악회람중히말원정대

한편,같은안나푸르나산군에있는람중히말(6,986m)에는국내에서처음으로여성히말라야원정대가도전장을냈다.선경에재직하고있는직장여성들로구성된선경여자산악회가회사의후원으로꾸린이원정대는76년에마나슬루원정을다녀온바있는김경배(36·피톤산악회)씨가매니저로참가했고문화방송에서도3명의기자를파견했다.여성대원은정길순대장(28)을비롯해기형희(26),윤현옥(24),이원행(23),소유미대원(21)등5명으로구성되었다.

람중히말은안나푸르나산군에서는가장동쪽에있는독립봉으로74년봄영국대에의해남동릉으로초등정되었고그뒤80년까지3개의일본대가동릉과북릉루트로성공을거두었다.한국대는남동릉을목표로82년4월8일해발3,800미터지점에베이스캠프를건설했는데같은시즌에북릉으로도전한일본대도있었다.한국대는20여일만에3캠프(6,300m)를설치하고기형희부대장과3명의셀파를정상공격조로지명했다.

5월5일새벽남동릉으로등정길에나선이들은그러나능선상에크레바스가많아운행시간이지연되자6,900미터지점에서설동을파고비박을감행했다.공격조는다음날비박지점을출발하여5시간만에정상에올라서는데성공했다.한편2차공격조로이날새벽5시에3캠프를떠난윤현옥대원과셀파1명이2시간늦게정상에도달하여한국대는2명의여성대원과4명의셀파를올린셈이되었다.두명의대원은국내최초로여성히말라야등정자가되었다.


한국의첫번째초등정을안겨준고줌바캉

대전자일클럽고줌바캉원정대

고줌바캉(NgozumbaKang)은쿰부히말라야지역에서도초오유(8,201m)의오른쪽능선상에있는데원래B-782란기호로만표기되어오다가1933년에가서이산의이름을발견하게되었다.이산은초오유에서갸충캉으로이어지는능선상에있어독립봉의면모를뚜렷하게갖추고있지는못했다.65년에일본대가이봉우리를초등정했다고주장했지만후에그들이등정한곳이고줌바캉2봉(7,646m)으로밝혀짐으로써여전히미등봉으로남아있었다.

산이름은티베트어로‘고(ngo)’는머리,‘줌(zum)’은셋,‘바(ba)’는지붕,그리고‘캉(kang)’은설산이란뜻으로고줌바캉은‘세정상을가진설산’이란의미가된다.실제로1봉과2봉,그리고3봉각각2킬로미터씩떨어져있는데3봉은뚜렷한피크가아니었다.82년포스트몬순에입산허가를얻은대전자일클럽은윤원식(40)단장을비롯해서박동규대장(41),김영한등반대장(37),양화석(34),윤건중(30),서정두(29),박찬복(28),김태석(28),이협우(27),김영환(26),임삼균대원(26)등11명으로원정대를꾸렸다.

10월16일에는선발대가2캠프(6,450m)까지진출했으나카트만두에있는원정물자의일부는경비행기의결항으로아직수송되지못하고있었다.그러는동안대원들은하나둘씩베이스캠프에집결했고남면에서북동릉을등반해10월27일에는3캠프(7,000m),31일에는4캠프(7,200m)를설치했다.

그러나등정에필요한기일이없었다.네팔관광성의등산규정에따르면포스트몬순기의등반허가기간은9월1일부터10월31일까지로되어있었기때문이다.원정대는정부연락관에게등반기일을연장해줄것을요청해메일런너가긴급히카트만두의관광성본부로파견되었다.

다급해진원정대는11월2일드디어정상공격을단행했다.김영한등반대장과도르지,그리고앙체링셀파등3명은깊은눈을헤치며오후1시에초오유로이어지는능선상으로올라섰다.여기서김영한대장은거의탈진상태의몸을이끌고5시간이나오른끝에오후6시5분드디어히말라야처녀봉의정상위에섰다.

이때는날이이미어두워져가고있었다.사진촬영을했으나확실한정상기록을남기지는못했다.고줌바캉초등정으로한국은비로소세계초등정의대열에끼게되었다.그리고등정자김영한등반대장은37세의나이로정상에올라국내에서는당시까지최고령히말라야등정자로기록되었다.

부산최초원정대가네쉬4봉등정

부산학생산악연맹파빌원정대

한편82년포스트몬순기에는또다른팀이네팔로향했는데부산지역에서최초로꾸려진파빌봉(7,102m)원정대였다.이원정대는부산학생산악연맹회장이었던김동인(56)단장이거금5천만원을쾌척함으로써성사되었다.대원은주시정대장(29)을비롯해서김두억(31),권경업(30),이승렬(28),이남국대원(26)과부산일보에서파견한이종길기자(45)를합쳐7명으로구성되었다.

파빌(Pabil)봉은네팔중부의가네쉬산군에있는네번째봉우리로카트만두에서북북서쪽으로불과75킬로미터밖에떨어져있지않은산이다.이산은네팔정부가중공과의국경분쟁으로입산을금지시켰으나78년에해금되면서일본대가남면으로초등정을했고80년에는프랑스대가2등을했다.그러니까한국대는이산의세번째등정을노리고있었다.

원정대가카트만두를떠나12일만에베이스캠프(4,225m)에도착한것이9월20일.이들도고줌바캉팀과마찬가지로캘커타로보낸등반물자의통관이지연되어예정보다운행이늦어지고있었다.다음날부터등반을개시한원정대는12일만에3캠프(6,370m)를설치하고10월5일정상공격에나섰다.

공격조는이승렬대원과도르지,아지와셀파등3명.이들은이틀전에도정상공격을시도했었으나이대원의고소장애로후퇴했었다.새벽6시에마지막캠프를떠난일행은8시간30분이라는긴등반끝에드디어오후2시24분정상에올랐다.이것은고줌바캉팀보다앞선것으로지방팀으로는최초의히말라야등정으로기록되었다.


단지두명이이룩한국내첫번째동계등정

한국푸모리동계원정대

82년도에는6개의원정대가제각기새로운기록들을수립하며100퍼센트의성공율을보였는데국내최초로동계히말라야원정대가등장해주목을받았다.
히말라야에서의동계등반은80년2월17일폴란드대가에베레스트를등정함으로써시작되었다.

이러한세계적인흐름을타고국내에서처음으로동계원정을계획한것은이해봄시즌마칼루원정에참가했었던남선우(27·중앙대,양정산악회)였다.그는마칼루에서돌아온즉시네팔관광성에푸모리(7,145m)봉에대한입산신청을해서허가를받아놓았다.

82년10월말이산의남릉에대한동계초등을목표로떠난한국대는원정대라고부르기에는너무나초라한등반대였다.이원정을주도한남선우대장과이현수대원(27·은벽산악회)이대원의전부였다.불과500여만원의경비로원정대를꾸린이들은셀파도단2명에불과18명의포터를고용했다.

동계의등반개시일은12월1일로되어있으나이들은11월23일부터루트공작에들어가28일에첫번째캠프(5,950m)를완료했다.그리고6일간의작업끝에청빙지대를통과,남릉의암봉위로올라서6,400미터에있는비좁은안부에2인용텐트를설치했다.여기서남대장은세번째캠프를생략하고정상공격에나설것을결심했다.

이곳에서정상까지의고도는약7백미터,설릉으로이루어진이구간을두명이알파인스타일로등반하면시간상으로가능하리란판단에서였다.12월11일새벽6시,남대장과락파겔젠셀파는2캠프를떠나정상공격에나섰다.두사람은거센겨울바람을헤치며가파른정상설릉에붙었다.그러나설릉은예상외로길게이어져있었다.

많은시간을빼앗기며정상에다다른시각은오후4시12분.엄청난바람으로몸을가누기조차힘들었다.이미마지막캠프로돌아가기에는늦은시간이었다.두사람이서둘러서로확보해주며하강했으나6800미터지점의설릉에이르렀을때는날이아주어두워져비박을감행했다.82년의마지막을장식한한국최초의히말라야동계등정은국내산악계에또다른영역의원정가능성을제시하게되었다.

-출처/www.himalayaz.co.kr/월간마운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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