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4일1캠프(6,050m)를설치하고7일2캠프(6,400m),12일에는3캠프(7,000m)까지진출했다.이어서19일7,400미터지점에4캠프를설치했고22일조광제,김범택대원이그곳을올라다음날정상공격에나섰으나8,700미터지점에서산소부족으로돌아섰다. 폭설로열흘간이나운행을중단했던한국대는10월6일등반을재개7일4캠프를7,900미터지점으로올려설치했다.그러나심한폭풍설로정상공격이지연되다가12일밤10시30분조광제,박희택대원이마지막캠프를떠났다.이들중박대원은남봉에서몸상태가나빠포기했고조광제대원만이13일12시30분일본과멕시코대원4명과함께정상에오르는데성공했다.
이등정은77년,87년,88년에이어국내네번째에베레스트등정이며조대원은9번째등정자가되었다.
그러나이등정은다음해에몇가지의문이공개적으로제기되면서시비에휘말렸다.대산련계간지90년봄호에서처음거론된의문에대해허영호가월간「사람과山」90년7월호에서강력히반발하고나서자,이어서의문을제기했던대산련김병준등반기술위원이재차「사람과山」8월호에서그의등정을부인했다. 김병준위원이주장했던의문점은대략세가지로요약된다.첫째,야간등반의경우밤에등반을시작했다해도정상에는날이밝는시점에맞추어도달하거나또한야간에도착했다하더라도날이밝은후하산하는것이상식인데허대장의경우밤에올랐다가굳이날이밝지도않은상태에서하산했다는점.둘째,기록의존도가강한그가정상사진촬영에전념하지않은점.셋째,그의정상행을아침까지아무도모르고있었다는점이그것이었다.
그후폭설이계속내려광운대팀을제외한모든팀이철수한가운데9월4일장,곽두대원이전진캠프로진출했다.이들은그날로본격적인등반에들어갔다.4일5,500미터,5일5,700미터,6일5,900미터지점에서비박을하며암벽등반을거듭한끝에7일11시30분마침내정상에올랐다.총27피치의암벽구간과600미터의설벽으로표고차1,300미터를10일간의등반끝에얻은정상이었다. 이것은인도강고트리산군의암봉을한국인이오른첫기록이었다.이들의하산길도만만치않아오후8시에마지막비박지에도착했고계속하강하여9일에야베이스캠프로내려왔다.이들은높이에구애받지않고소규모팀으로벽등반을추구해한국산악계에새로운히말라야등반양식을보여주었다는점에서높이평가받았다.
이들은카라반루트중에서는악명높은뚜르부긴고개를어렵게넘어11월26일베이스캠프(4,300m)를건설했다.이때는선발대가이미1캠프(5,600m)까지진출한뒤였다.이어서1월10일2캠프(6,400m)를설치했고빙벽으로이루어진세락지대를어렵게넘어16일3캠프가설치되었다.그후날씨가나빠져등반은열흘간이나지연되었다.그리고29일등반이재개되어7400미터지점까지진출했으나심한강풍을이겨내지못하고31일후퇴를선언했다.3명의에베레스트등정자가포함되어있어무난히등정할것으로기대를모았던이등반의실패로84년겨울에있었던은벽산악회의동계초등정시비는다시숙제로남게되었다.
11월22일공식허가일보다조금일찍아이스폴등반을시작,29일1캠프(6,050m),12월1일2캠프(6,350m),8일3캠프(7,300m)를설치했다.이어서‘보름달작전’이라고명명된12월13일정상공격계획을세웠으나고산병으로셀파가사망,실행하지못했다.셀파의시신을운구하고등반을속개한이들은살인적인추위와바람속에서전진이어려웠다.12월28일신욱철,김병규대원과셀파4명이사우스콜에4캠프를설치하려했으나도중에후퇴했다.김하경대장은더이상등반이어렵다고판단,다음날김대원과두셀파가사우스콜(8,000m)에다녀오는것으로이등반의종지부를찍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