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히말라야 원정사 [7-2]1989년 *-
에베레스트국내네번째등정

마산산악동지회에베레스트원정대

▲지방단일팀으로는최초로에베레스트에출사표를던진마산산악동지회팀.남릉7,900미터에4캠프를설치한이들은89년10월13일남동릉으로우회하여정상에올랐다.국내네번째에베레스트등정이었다.

한편단일팀으로는국내최초로에베레스트에출사표를던진마산산악동지회팀은9월4일라마제를지내고등반을개시했다.대원은김인태대장(38)과최재일부대장(38),이상곤(34),구자억(35),김병오(32),조효제(30),조광제(28),박동열(32),김현진(27),천문철(27),김범택(27),김민효(26),김석수(34),이근배(29),박희택(27),김일철(38)등16명으로구성되었다.

9월4일1캠프(6,050m)를설치하고7일2캠프(6,400m),12일에는3캠프(7,000m)까지진출했다.이어서19일7,400미터지점에4캠프를설치했고22일조광제,김범택대원이그곳을올라다음날정상공격에나섰으나8,700미터지점에서산소부족으로돌아섰다.

폭설로열흘간이나운행을중단했던한국대는10월6일등반을재개7일4캠프를7,900미터지점으로올려설치했다.그러나심한폭풍설로정상공격이지연되다가12일밤10시30분조광제,박희택대원이마지막캠프를떠났다.이들중박대원은남봉에서몸상태가나빠포기했고조광제대원만이13일12시30분일본과멕시코대원4명과함께정상에오르는데성공했다.
이등정은77년,87년,88년에이어국내네번째에베레스트등정이며조대원은9번째등정자가되었다.

에베레스트서릉과로체등정에쏠린의혹

전국합동에베레스트서릉원정대



한국산악회소속이석우대장(36)을비롯한11명의대원들로구성된에베레스트서릉원정대는10월23일오후2시30분정상용대원(26)과두명의셀파가서릉직등루트(일명유고루트)를통해지구최고봉의정상을밟고다시서릉으로하산했다고네팔관광성에보고함으로써이경이적인등정소식이세계에알려졌다.이루트는1979년에와서야유고대에의해초등정된이래84년에불가리아대가제2등을기록했으나두팀모두가급경사의이루트로하산하지못했었다.

유고팀은혼바인꿀루와르로우회하여내려왔고,불가리아팀의등정대원은이루트로하산을강행하다실족사하고말았다.따라서한국대의이죽음의능선에대한‘등정과하산’은최초의기록이되었다.그러나귀국후이들원정대가제시한사진속의정상은이미여러국가에서수많은산악인이올라너무나도낯익은최고봉의그정상이아니었다.에베레스트의정상은두사람이서고도평평한설면이많이남아있는사진속의그곳이아니라는것이앞서등정한사람들의증언이었다.무엇보다최고난이도5급의서릉상단부를어떻게올라갔으며어떻게내려왔는가에대한원정대의구체적인정황설명이없자이등정에강한의혹이쏠리게되었다.

허영호로체원정대



에베레스트서릉과함께89년의등정중에서가장관심을끌었던허영호의로체봉등정은국내최초로자이언트봉에서야간단독등반을감행했다는데서크게평가되었다.그리고이등정은그의네번째8천미터급등정이어서더욱주목을받았다.부인과아들(5)을데리고가족원정대를꾸린허영호는사진작가성동규와합류해등반에들어갔다.

몇번의고소적응끝에10월13일아침9시에단신으로2캠프를떠난허대장은로체페이스에설치된3캠프(7300m)에도착하여수면을취한후저녁8시캠프를떠나단독으로야간등반을감행,다음날새벽4시에정상에도달했다.그리고정상에서는아직날이밝지않아사진촬영을못하고곧바로하산,14일오전8시경에다시로체페이스7300미터지점에돌아왔다.87년에베레스트동계등정이후2년만에이루어진그의이등정은보다진보된등반방식을택했다는데서산악계의찬사를받았다.

그러나이등정은다음해에몇가지의문이공개적으로제기되면서시비에휘말렸다.대산련계간지90년봄호에서처음거론된의문에대해허영호가월간「사람과山」90년7월호에서강력히반발하고나서자,이어서의문을제기했던대산련김병준등반기술위원이재차「사람과山」8월호에서그의등정을부인했다.

김병준위원이주장했던의문점은대략세가지로요약된다.첫째,야간등반의경우밤에등반을시작했다해도정상에는날이밝는시점에맞추어도달하거나또한야간에도착했다하더라도날이밝은후하산하는것이상식인데허대장의경우밤에올랐다가굳이날이밝지도않은상태에서하산했다는점.둘째,기록의존도가강한그가정상사진촬영에전념하지않은점.셋째,그의정상행을아침까지아무도모르고있었다는점이그것이었다.

인도벽등반지첫진출,바기라티3봉등정

광운대산악회바기라티3봉원정대



세명으로구성된광운대원정대가인도강고트리산군에첫진출해암봉바기라티3봉(6,454m)등정에성공해주목을받았다.

배승렬대장(31),장홍상(25),곽봉신대원(22)등3명으로이루어진소규모한국대는8월3일등반기점인강고트리에도착했다.여기서이틀간을더카라반한후4,300미터난다반에베이스캠프를설치했다.하강루트정찰과고소적응기간을거친이들은15일에베이스캠프를떠나4,800미터의전진베이스캠프에도착했다.다음날부터80년영국대가초등한남서벽(필라)으로등반을개시한이들은21일에야5,580미터지점의비박지까지진출했으나악천후로3일간지체한끝에체력이떨어져일단전진베이스캠프까지후퇴했다.

그후폭설이계속내려광운대팀을제외한모든팀이철수한가운데9월4일장,곽두대원이전진캠프로진출했다.이들은그날로본격적인등반에들어갔다.4일5,500미터,5일5,700미터,6일5,900미터지점에서비박을하며암벽등반을거듭한끝에7일11시30분마침내정상에올랐다.총27피치의암벽구간과600미터의설벽으로표고차1,300미터를10일간의등반끝에얻은정상이었다.

이것은인도강고트리산군의암봉을한국인이오른첫기록이었다.이들의하산길도만만치않아오후8시에마지막비박지에도착했고계속하강하여9일에야베이스캠프로내려왔다.이들은높이에구애받지않고소규모팀으로벽등반을추구해한국산악계에새로운히말라야등반양식을보여주었다는점에서높이평가받았다.

대산련정예부대안나푸르나에서패퇴

대한산악연맹동계안나푸르나원정대



대산련의8천미터급14좌완등사업의일환으로파견된안나푸르나원정대는장봉완대장(37)을중심으로엄홍길(29),송열헌(30),정승권(29),김진성(25),송석현(25),조성수(24),하관용(29),지현옥(여·25),유한(27),서성식(31),지영태(27),곽명옥(여·26),곽상태(31)등전국에서선발된14명의대원으로구성되었다.


이들은카라반루트중에서는악명높은뚜르부긴고개를어렵게넘어11월26일베이스캠프(4,300m)를건설했다.이때는선발대가이미1캠프(5,600m)까지진출한뒤였다.이어서1월10일2캠프(6,400m)를설치했고빙벽으로이루어진세락지대를어렵게넘어16일3캠프가설치되었다.그후날씨가나빠져등반은열흘간이나지연되었다.그리고29일등반이재개되어7400미터지점까지진출했으나심한강풍을이겨내지못하고31일후퇴를선언했다.3명의에베레스트등정자가포함되어있어무난히등정할것으로기대를모았던이등반의실패로84년겨울에있었던은벽산악회의동계초등정시비는다시숙제로남게되었다.

국제분쟁야기한동계초오유

삼천포산악회동계초오유원정대



삼천포산악회의초오유원정대(대장이호상외6명)는이산의남동면7,800미터까지진출했으나예기치않았던셀파의실족사로등반을포기했다.그런데이원정대는같은루트를등반중이던벨기에팀에게폭력을행사했다는이유로국제산악연맹으로부터강력한항의를받았다.벨기에팀이자신들의루트를허가없이등반했다는이유로한국대의고정로프를절단,회수함으로써야기된이사건은국제산악연맹원정분과위원회에서벨기에팀의항의만을일방적으로받아들여대한산악연맹에한국대원을제명할것을공식요청하면서국제문제로비화되었다.

후에한국대가해명함으로써종결되기는했지만서구산악인들이주도권을쥐고있는국제산악연맹의일방적인제명요청은편파적이라는인상이짙었다.이사건은같은루트를등반하는외국대원들끼리의사소통이원활히이루어지지않은상태에서일어난것으로해외원정을추구하는한국대원들에게정확한언어소통의필요성을인식시켜주는계기가되었다.

소규모대학팀랑탕리동계초등

동국산악회동계랑탕리원정대



동국대산악부재학생들로만구성된한국대가랑탕리(7,239m)를동계초등하는데성공했다.박영석대장(26)과윤태영(24),김형우(21)등3명으로이루어진소규모원정대는12월1일베이스캠프를설치하고6일간속공등반을펼쳤다.12월2일1캠프,5일2캠프,그리고8일에는오버행설벽을넘어3캠프를설치했다.이어서9일박대장과윤태영대원,그리고셀파1명이새벽5시50분마지막캠프를떠나칼날리지와설벽을통과하여오후1시50분정상에올라섰다.

국내최대규모에베레스트팀동계등반좌절

광주전남학생산악연맹에베레스트동계원정대

한국히말라야원정사상가장많은대원들로구성된광주전남학생산악연맹의에베레스트원정대는대규모인원으로의욕적인등반을개시했다.대원은김하경대장(40)의지휘아래정태영부대장(41),이정옥등반대장(39),임형칠(30),김인주(35),김종철(32),윤호근(27),이연근(27),김영학(29),임우근(26),신욱철(26),이병철(26),정찬득(27),고재연(27),김병규(26),김홍빈(25),윤장호(25),김은철(25),김동열(24),이연주(여·26),한민수(25),최행준(23),이병규(23),김애란(여·21),윤호준(21),이창수(31·보도)등모두26명으로구성되었다.

11월22일공식허가일보다조금일찍아이스폴등반을시작,29일1캠프(6,050m),12월1일2캠프(6,350m),8일3캠프(7,300m)를설치했다.이어서‘보름달작전’이라고명명된12월13일정상공격계획을세웠으나고산병으로셀파가사망,실행하지못했다.셀파의시신을운구하고등반을속개한이들은살인적인추위와바람속에서전진이어려웠다.12월28일신욱철,김병규대원과셀파4명이사우스콜에4캠프를설치하려했으나도중에후퇴했다.김하경대장은더이상등반이어렵다고판단,다음날김대원과두셀파가사우스콜(8,000m)에다녀오는것으로이등반의종지부를찍었다.

-출처/www.himalayaz.co.kr/월간마운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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