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중에서도단연압권은물론비현실적으로느껴질만큼서슬푸르게깎아지른로체(8,516㎙)와로체샤르(8,400m)의남벽들이다.그러나어찌된일인지엄홍길은이천상의절경앞에서도굳은표정을풀지못했다.그는두눈을꼭감고낮은음성으로불경을외더니배낭안에서술병하나를꺼내들었다.
임자체(6,189㎙)등반을하루앞두고고소적응을겸한정찰쯤되겠거니하고받아들였던나의예상이깨지는순간이다.그는로체샤르남벽을바라보며무릎을꿇고앉아정성스레두잔의술을올렸다.그리고붉어진눈시울을닦으며신음처럼내뱉은그의탄식을나는오래도록잊지못한다.“내가죄가많은놈이야…내가산에다니면서업(業)을많이지었어…”
2003년10월5일낮12시20분.엄홍길은로체샤르의남동릉을통하여8,250m)까지진출해있었다.2001년악천후때문에7.600까지진출했다가패퇴했던쓰라린기억을깨끗이지워버릴설욕전의성공이바로코앞에닥쳐있었던것이다.70도가넘는경사의빙설벽트래버스구간이나오자그때까지후미를맡았던젊은대원들둘이선두를자청하고나섰다.박주훈(당시35)과황선덕(당시27)이다.
그들은앞서거니뒤서거니하며트래버스구간을무사히통과했다.이제남은것은정상까지연결되어있는150m의대암벽구간뿐이다.선등자가대암벽구간에달라붙었다.나비처럼날렵한모습이다.후등자가확보를보던손에잔뜩힘을주었다.워낙가파른절벽이었기때문이다.그러나다음순간“쩡!”하는굉음과함께이절벽에는지옥이들이닥친다.판상(板狀)눈사태가발생한것이다.
히말라야벽등반도중판상눈사태를맞으면백약이소용없다.그순간누군가소리를질렀는데그것이“아악!”하는비명소리였는지“추락!”이라는외마디절규였는지엄홍길은기억하지못한다.다만본능적으로벽에몸을붙이며자일을움켜잡았을뿐이다.하지만3,000㎙아래로추락하는두대원의체중을낚아챈다는것은불가능한일이다.
“정말순식간이었습니다.눈사태는이미골짜기아래까지내려가하얀설연이피어오르는데…장갑은순식간에타들어가내손에서핏물이배어나는데…핏물을머금은우모(羽毛)들이내눈앞에둥둥떠다니던풍경들이지금도생생합니다.”
박주훈과황선덕은그렇게갔다.하지만사고당시엄홍길은그들의죽음을실감할겨를조차없었다고한다.생각해보라.그곳은히말라야8,250㎙지점이다.그는이제70도경사의빙설벽을트래버스하여되돌아가야한다.그런데그의손은이미피로물들었고그에게는자일이없다.
엄홍길은그때의트래버스를‘생애에서가장길고끔찍했던등반’이었다고기억한다.그리고트래버스를끝내고마침내주저앉을만한공간에이르렀을때에야비로소후배들의죽음을실감했다고한다.그가할수있는일이란그저파랗게굳은얼굴을무릎사이에파묻고하염없이흐느끼는것뿐이었다.
2000년7월31일오전6시30분.엄홍길은K2(8,611㎙)정상에섰다.그가오른14번째8,000㎙급정상이었다.아시아인으로서는최초였고,인류역사상8번째의대기록이다.이제그는‘더이상오를산이없는’히말라야등반가로서남은여생을명예와축복속에편히보낼수도있었다.
그런데그는느닷없이‘14+2완등’이라는새로운목표를제시했다.위성봉에서점차로독립봉으로인정되는추세에있는얄룽캉(8,506㎙)과로체샤르를마저오르겠다는것이다.산악계안팎에서찬반양론이들끓었다.어떤이는그를칭송했고다른이는그를폄하했다.과연그는왜히말라야등반을멈출수없는것일까?
그는일생일대의목표를성취했다는기쁨보다는허탈감에시달렸다고고백한다.한동안그는술만마시면먼저간산친구들이보인다며괴로워했다.엄홍길은그의자서전‘8000미터의희망과고독’에서이렇게말한다.“혼자만따뜻하고행복하게지내는것같아서,찬얼음벽속에갇혀숨진동료들에게미안한생각을떨칠수없기때문이다.아마이러한업이쌓여나는영원히산을떠나지못할것이다.”
2006년3월10일밤9시.지난해의휴먼원정대원들과올해의로체샤르남벽원정대원들이서대문의한선술집에서마주앉았다.되돌아올대답을뻔히알면서도내가물었다.“거길꼭가야만되겠어?”엄홍길은의연하게씨익웃으며담담하게말했다.“주훈이랑선덕이랑거기서기다리고있는데…내가걔들을대신해서라도로체샤르에는꼭올라가야지!”어떤사람들에게산은단순한등반의대상이아니다.
그들은그곳에있을때에만자신이존재하는이유를확인한다.그곳을하루아침에등지기에는그동안쌓아온업보들이너무도많다.엄홍길에게히말라야는꼭그런곳이다.2006년3월16일밤9시.엄홍길이이끄는‘2006한국히말라야로체샤르남벽원정대’가장도에오른다.
이미2004년에얄룽캉정상에올랐으니그가제시한‘14+2완등’계획의마침표를찍으러떠나는셈이다.대원6명의단촐한규모이지만사기만큼은그어느때보다도드높다.그의21년히말라야인생에‘화룡점정’이이루어지는순간을함께하지못하는것이몹시아쉽다.뒤에남은사람은다만그들의안전등반과무사귀환을기원할뿐이다.
▲로체샤르남벽이란?
로체는에베레스트(8,850㎙)의남쪽에있는세계제4위봉이다.사우스콜(8.000㎙)에서왼쪽으로오르면에베레스트이고,오른쪽으로오르면로체이다.‘로체’라는말은티베트어로‘남쪽에있는커다란산’을뜻한다.또로체샤르(8,400m)에서‘샤르’란‘동쪽’이란뜻이기때문에로체샤르는곧로체의동쪽에있는산을의미한다.
로체샤르는오랫동안로체의위성봉처럼여겨졌지만현재는점차독립봉으로받아들여지는추세이다.한때로체역시에베레스트의위성봉처럼인식되어왔다는사실을상기하면충분히설득력있는주장이다.한국인이최초로8,000m를돌파하여올랐던산이바로로체샤르이다.
1971년대한산악연맹의최수남대원이8,200㎙까지진출했으나기상악화로철수했던기록이있다.여지껏의로체샤르등반은대체로남서릉이나남동릉을통해서이루어졌다.하지만이번에엄홍길은대담하게도남벽을선택했다.로체샤르남벽은‘세계에서가장험난하다’는평가를받고있는로체남벽과나란히붙어있다.
벽의수직표고차가3.000㎙이상이고,잦은눈사태와낙석,그리고티베트쪽에서불어오는강풍으로인해극한상황을자주연출한다.아직까지남벽을통하여로체샤르정상에오른한국원정대는없다.엄홍길은자신의16번째8,000m산으로가장혹독한조건의루트를선택한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