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경도안변의철령에서나온한맥이남쪽으로오륙백리를달리다가양주에와서는자잘한산으로되고,다시동쪽으로비스듬하게돌아들면서갑자기솟아나서도봉산의만장봉이되었다.여기에서동남방을향해가면서조금끊어진듯하다가또우뚝솟아삼각산(북한산)백운대로되었다.여기에서다시남쪽으로내려가서만경대가되었는데,여기에서한줄기는서남쪽으로갔고,또한가지는남쪽으로백악산(북악산)이되었다.’
위는이중환이지은택리지경기도편에나타난설명인데,우리전통산줄기의족보인산경표로해석하면한북정맥마루금중서울에포함된부분은경기도와경계를이루는,도봉산만장봉부터우이령너머552m봉까지의4km정도의구간이고,온전히서울안으로만들어온한북정맥마루금은없다.한강남쪽울타리인한남정맥도마루금이서울을지나기않기는마찬가지다.
어원으로보면서울이라는말은예로부터우리나라의수도를가리키는보통명사였다.백제가수도인부여를‘소부리’라고불렀고,신라도경주를‘서라벌’‘서벌’‘서나벌’‘서야벌’등이라불렀다.서울의‘서’는‘수리·솔·솟’등과통하는말로써‘높다·신령스럽다’는뜻을가지고있으며,‘울’은‘벌·부리’에서변음된것으로‘벌판·큰마을’이라는뜻을가지고있으니,합치면서울은‘높고큰벌판’,즉‘신령스런땅’이되는것이다.
풍수학자들은서울이장풍(명당주위의지세)과득수(명당주위의물길)를고루갖춘전형적인명당임을강조한다.우선서울의조산은북한산(삼각산·836.5m)이다.그리고북쪽의북악산(백악산·342m)은현무인주산이고,동쪽의낙산(111m)은좌청룡,서쪽의인왕산(338m)은우백호가되며,남쪽의목멱산(남산·262m)은주작인안산이다.북악산·낙산·인왕산·목멱산을일컬어내사산(內四山)이라한다.
그리고그중앙을흐르는청계천은내수(內水)인명당수가된다.한강은외수(外水)인객수(客水)가되어남산과관악산사이를빠져흐르며명당을크게감싸고있는형세다.이렇듯서울은사방에서산들이에워싸그터를보호해주고있으며,명당수인청계천이한강에역방향으로흐르다가합류하여서해로빠져나가기때문에더없는길지의조건을갖추고있다는것이다.
한편,명당인한양을밖에서에워싼북쪽의북한산,서쪽의덕양산(125m),남쪽의관악산(631m),동쪽의용마산(348m)을일컬어외사산(外四山)이라하는데,21세기현재서울의경계는대체적으로이산줄기를이은안쪽지역이된다.풍수로푸는서울의이야기는여기서끝나지않는다.즉‘북한산이후주산이고,강원도금강산은외청룡,황해도구월산은외백호,제주도한라산은외안산’으로설명하는데서서울이세계의중심이라는자부심도엿볼수있다.
한양은궁궐을중심으로꾸며진신도시였다.그래서지금의서울을이해하려면우선조선의5대궁궐을둘러봐야한다.그런다음,사대문과사소문으로이어지는도성을답사하면서그안팎에서서로부대끼며살아가던순박한백성들의애환도짚어봐야할것이다.이런답사는승용차보다는지하철이나버스등대중교통으로접근하고발품팔아야만그절절한사연이가슴에더욱깊이다가오지않을까.
이성계는그해9월신궐조성도감(新闕造成都監)을두고궁궐조성에착수했다.이성계는궁궐공사가시작된지한달만인10월25일천도를단행하여3일후인10월28일한양에도착하였다.그래서서울시는이날을‘서울시민의날’로지정하여기념하고있다.그러나조선시대정궁(正宮)인경복궁(景福宮)이완공된것은그로부터1년이지난1395년(태조4)12월이었다.‘경복(景福)’은시경의‘군자만년개이경복(君子萬年介爾景福)’이란글귀에서따온이름으로‘온백성들이태평성대의큰복을누리기를축원한다’는의미를담고있다.
한양을도읍으로정할때도풍수가아주중요했지만,지금도서울을이해하려면어쨌든풍수관련서적으로뒤적거려야한다.고려와조선은물론오늘날까지도풍수는역사를움직이는보이지않는권력이아니던가.
궁궐은북악산을주산으로삼고임좌병향(壬坐丙向·북북서에앉아남남동을바라본다)의터를잡았다.이에무학대사는“도읍을정할때중의말을들으면나라가연장될것이나정씨의말을들으면5대가가기전혁명이일어나고200년못가나라가흔들릴난리가일어난다”고예언했다고한다.후세의백성들은세조의왕위찬탈,임진왜란과병자호란등을겪으며대사의예언을떠올렸을것이다.
남향으로하긴했어도관악산의기세는그래도두려웠던모양이다.이는도성의정문인숭례문에잘드러난다.우선이름의숭(崇)은높인다는뜻이고,예(禮)는음양오행중불에해당한다.불꽃을확높인것이다.또현판의글씨가여느문의현판과는달리불꽃처럼세로인까닭도마찬가지다.불로써불을제압하려는의도였으니,숭례문의현판은관악산의화기를누르기위한일종의부적인셈이다.
이뿐만이아니다.관악산의화기가궁에미치는것을막기위해관악산상봉에샘을파고구리용을넣었다는이야기도전한다.또궁궐의연못은미적인조경외에도화기의침입을막아주길바라는의도가있었다.물론유사시에불을끄는데쓰려는지혜였지만.그리고지금은보수공사중이라볼수없지만,광화문해태도흥선대원군이경복궁의화재를막기위해세운것이다.
성저는성벽으로부터사방10리에이르렀는데,동쪽으로는양주의송계원·대현·중랑포·장안평,서쪽으로는양화도·고양의덕수원(응암동)·모래내·난지도,남으로는한강노도,북으로는북한산에이르렀다.당시도성은정치·행정중심의소비도시로서의성격을지녔고,성저십리지역은대부분농경지역으로도성에생활물자를대는역할을맡았다.요즘엔성저지역도모두대도시로바뀌었으니이런상전벽해도없을것이다.
인구는어땠을까.서울시기록을살펴보니조선이안정을찾은15세기초인1428년(세종10)의도성안의인구는10만3328명이었다.이들의대부분은왕실과양반관료와그가족들,군역에복무하는군사들,각종관청에속한관노비와개인에속한사노비,공장·상인들이었다.도성밖의인구까지합하면11만명이었다.그뒤200여년간은대략20만명선을유지하였다.
그러다1592년임진왜란,그리고1624년병자호란으로인명과재산에막대한피해를입게된다.조선말기인1835년한성부의인구는20만3901명으로다시늘어났다.일제강점기엔도시규모가계속확대되어1910년23만명,1913년28만명,1929년34만명선이었고,1936년엔행정구역이확대되면서64만명이던인구가1941년엔거의100만명에가까운97만명이되었다.그리고2006년6월30일현재의인구는무려1천34만4440명이다.
600여년전천도당시10만명쯤된인구가100배에이르는1천만명을넘어섰으니제아무리서울이명당이라고해도이많은사람들을다품기는버거울것이다.그래서지금의서울은대도시가갖는온갖병폐는다갖고있는종합체라해도지나치지않다.교통문제,주택문제,인구문제,환경문제,빈곤문제등등풀어야할숙제가많은것이다.
하지만돌이켜보면,정말애석하게도,한양의도성은정작필요할때본래의역할을제대로해내지못했다.도성은외부로부터침입을막기위한방어막이지만,내부가썩거나약하면그야말로무용지물이아닌가.아쉽게도한양도성이그랬다.우리민족이누란의위기에처했던임진왜란때도그랬고,병자호란때도마찬가지였다.당시적은조선군의별다른저항도없이성문을지나궁궐로들어섰던것이다.
그러고도정신을못차리고결국나라를빼앗기게되는20세기를전후해서는일제에의해한양도성은의도적으로허물어지기시작했다.일인들은1899년서대문과청량리사이에전찻길을만들면서동대문과서대문부근의성벽일부를헐어버렸고,이듬해엔용산과종로사이에도전찻길을낸다며남대문주변의성곽을철거하였다.일제강점기엔더욱노골적으로도성을없애기시작했다.결국서대문과혜화문(동소문)도헐리면서사실상서울의평지성곽은모두철거되고말았다.
그리하여오늘날엔총길이18.2km가운데산지성곽10.5km와삼청동·장충동일대의성벽일부만남게되었다.서울시는서울을유네스코‘세계역사도시’에등재하기위해문화재청의승인을받아2008년부터도성을본격적으로복원한다는계획이라지만,흥인지문~광희문,숭례문주변등5.14km는워낙건물이밀집되어있어복원이가능할까의문스럽다.
흔히동대문으로불리는흥인지문의정식이름은흥인문(興仁門)이다.예로부터낙산의지형이낮아왜구의침입을많이받으므로고종때동쪽의기운을높이는뜻에서산이중첩된모양의갈지(之)자를넣어비보(裨補)하였다.임진왜란때고니시유키나가(小西行長)가별저항도받지않고제일먼저이문을통하여한양에입성하였던사실을기억했을것이다.하지만조선은얼마안가나라를통째로빼앗기게된다.동쪽이든서쪽이든외침을막으려면힘을키우는수밖에없다.풍수는그다음에논할일이다.
서대문으로알려진돈의문(敦義門)은지금은없다.중국사신이한양으로들기위해예복을갈아입었던홍제원(弘濟院),사신이들어오던영은문(迎恩門),임금이사신을맞이하던모화관(慕華館)등이모두서대문밖에있었다.1915년일제는도로확장공사를한다는핑계로철거하고말았는데,일제의입장에서보면조선시대500년동안중국과통하는관문이었던이문이눈엣가시였을것이다.영은문자리엔1896년독립협회에서세운독립문이세워져있다.
남대문인숭례문은우리나라국보제1호다.지정번호가문화재의권위를나타내는것은아니지만국보제1호가명예로운지위임은확실하다.하지만숭례문은심심찮게제1호라는지위를박탈당할위기에처하곤한다.일제잔재가묻었다는것인데,일제가숭례문을철거하지않은까닭도,임진왜란당시가토기요마사(加藤淸正)가이끄는왜군이한양으로입성한문이기때문이라는것이다.이런논란을떠나숭례문은건축학적으로도가치가있다는게전문가의진단이다.얼마전숭례문으로행인이지나다닐수있도록개방하긴했으나,국보제1호를묻는여론조사에서항상훈민정음,경주석굴암,해인사팔만대장경보다도뒤지고있으니정말위태로운지위가아닐수없다.
북대문은현재삼청터널위쪽에복원해놓은숙정문(肅靖門)이다.이문은방위에맞춰세우기는했지만대문역할을하지는않았다.북문쪽은지형이험한편이라어차피사람의왕래가적기도했지만,이북문을열어놓으면음기(淫氣)가침범하여한양의부녀자들의풍기가문란해진다하여평소엔문을닫아둔것이다.대신숙정문서북쪽으로세검정이있는홍제천위쪽,그러니까지금의상명대학교남쪽에홍지문(弘智門)을내고그쪽을통해다니게했다.이래저래최근40년만에숙정문이공개되면서그문이열렸으니호사가들은풍수를핑계로할말이많겠다.
혜화문은일제강점기에길을내면서문루와석문이차례로헐렸는데,얼마전복원할때제자리를찾지못해할수없이혜화로터리주변의언덕에세워야만했다.소덕문은한양의서남쪽,지금의덕수궁위쪽에있던문이다.이문은일제강점기에모두철거되는바람에지금은흔적조차남지않았다.다만서소문동이라는지명으로짐작해볼따름이다.중앙일보호암아트홀앞에표석이세워져있다.
한편,장사지낼때도성의시체는이소덕문과광희문으로만나갈수있었으므로도성안에서서쪽으로나가는시체는모두이문을통하여나갔다.또성밖엔죄인을처형하던사형장도있었다.세조의왕위찬탈에반대하던사육신도이곳에서목숨을잃었다.지금의서소문공원이바로죄인을처형하던장소였다.
지하철2호선동대문운동장역3번출구로나오면만날수있는광희문은소덕문과함께한양백성들의저승문으로통했다.개천물길가까이있어수구문(水口門)이라고도하였는데,이문을지나서신당동화장터나금호동공동묘지로가게되므로시구문(屍口門)으로더많이불렸다.아직도서울사람들은이문의절절한사연을입에자주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