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 탐방 [1] *-

[르포라이터민병준의향토기행]서울1중심부[1]
세계최고의명당에자리잡은대한민국수도

서울은대한민국의수도다.동시에조선왕조500년도읍지이기도하다.조선을세운이성계가1394년개경(현개성)에서이곳으로도읍을옮겼으니벌써600년이넘는세월동안배달겨레의중심역할을해내고있는셈이다.

▲남대문으로알려진숭례문.조선시대한양도성의4대문중에서가장큰문이었다.
서울은한반도의등뼈인백두대간에서갈라져나온한북정맥의영향을받아곳곳에나지막한구릉이발달하였고,산으로둘러싸여있어널따란분지를이룬다.특히주변으론북한산,도봉산같은세계적인명산을두르고있어세계의웬만한대도시중에가장빼어난경관을자랑한다.서울을강남과강북으로나누는한강은양평양수리에서남한강과북한강이만나서쪽으로흐르며서울의젖줄이된다.한남정맥의영향을받은한강의남쪽지역은충적지와낮은구릉지가잘발달되어있다.

‘함경도안변의철령에서나온한맥이남쪽으로오륙백리를달리다가양주에와서는자잘한산으로되고,다시동쪽으로비스듬하게돌아들면서갑자기솟아나서도봉산의만장봉이되었다.여기에서동남방을향해가면서조금끊어진듯하다가또우뚝솟아삼각산(북한산)백운대로되었다.여기에서다시남쪽으로내려가서만경대가되었는데,여기에서한줄기는서남쪽으로갔고,또한가지는남쪽으로백악산(북악산)이되었다.’

위는이중환이지은택리지경기도편에나타난설명인데,우리전통산줄기의족보인산경표로해석하면한북정맥마루금중서울에포함된부분은경기도와경계를이루는,도봉산만장봉부터우이령너머552m봉까지의4km정도의구간이고,온전히서울안으로만들어온한북정맥마루금은없다.한강남쪽울타리인한남정맥도마루금이서울을지나기않기는마찬가지다.

▲관악산의불기운을누르기위해세로로쓴숭례문현판.
역사적으로서울일대를일컫는지명은많았다.통일신라시대엔한양군,고려시대엔양주·남경등으로불리다가나중에한양부가되었다.조선시대엔이곳이도읍이되자,한양이라했고,문호개방이후엔한성이라고불렀다.일제강점기엔경성이되었다가8·15광복이후비로소지금의이름으로불렸다.서울을지칭하는한양·양주·남경·한성·경성등여러이름들중에서고민하다가수도를뜻하는‘서울’이란순우리말지명을쓰게된것이다.대한민국정부수립후서울이라는아름다운우리말을되찾아이름을붙인것은정말기적같은일이다.당시는한글지명도모두한자로바꾸던시절이아니었던가.

어원으로보면서울이라는말은예로부터우리나라의수도를가리키는보통명사였다.백제가수도인부여를‘소부리’라고불렀고,신라도경주를‘서라벌’‘서벌’‘서나벌’‘서야벌’등이라불렀다.서울의‘서’는‘수리·솔·솟’등과통하는말로써‘높다·신령스럽다’는뜻을가지고있으며,‘울’은‘벌·부리’에서변음된것으로‘벌판·큰마을’이라는뜻을가지고있으니,합치면서울은‘높고큰벌판’,즉‘신령스런땅’이되는것이다.

▲경복궁근정전서북쪽연못안에세운경회루.나라에경사가있을때연회를베풀던곳이다.
그래서일까.서울은명당중의명당으로꼽힌다.조선초한양·모악·계룡산·개경등지를후보로놓고도읍을정하기위해피터지게벌인논쟁은우리나라역사상가장빛나는풍수논쟁으로기록되어있다.따라서서울의지리적인자연환경을언급할때는풍수를들먹이지않고는얘기가안된다.

풍수학자들은서울이장풍(명당주위의지세)과득수(명당주위의물길)를고루갖춘전형적인명당임을강조한다.우선서울의조산은북한산(삼각산·836.5m)이다.그리고북쪽의북악산(백악산·342m)은현무인주산이고,동쪽의낙산(111m)은좌청룡,서쪽의인왕산(338m)은우백호가되며,남쪽의목멱산(남산·262m)은주작인안산이다.북악산·낙산·인왕산·목멱산을일컬어내사산(內四山)이라한다.

그리고그중앙을흐르는청계천은내수(內水)인명당수가된다.한강은외수(外水)인객수(客水)가되어남산과관악산사이를빠져흐르며명당을크게감싸고있는형세다.이렇듯서울은사방에서산들이에워싸그터를보호해주고있으며,명당수인청계천이한강에역방향으로흐르다가합류하여서해로빠져나가기때문에더없는길지의조건을갖추고있다는것이다.

▲북한산의최고봉인백운대을오르는등산인들.서울의상징이기도한북한산은조선시대까지만해도삼각산으로불렸다./서울성곽은축조시기에따라형태가다르다.왼쪽정사각형석재는1704년에쌓은것이고,오른쪽의메주만한돌은도읍을옮길당시인1396년에쌓은것이다.
내사산은조선천도당시한양의경계가되었다.그산줄기를연결해도성을쌓았고,그안쪽에조선왕조의궁궐·종묘·사직단·관아·문묘등국가를상징하는주요건물들이건설되었던것이다.18세기중엽에펴낸여지도에실린도성도를보면조선의도성이한눈에잡힌다.

한편,명당인한양을밖에서에워싼북쪽의북한산,서쪽의덕양산(125m),남쪽의관악산(631m),동쪽의용마산(348m)을일컬어외사산(外四山)이라하는데,21세기현재서울의경계는대체적으로이산줄기를이은안쪽지역이된다.풍수로푸는서울의이야기는여기서끝나지않는다.즉‘북한산이후주산이고,강원도금강산은외청룡,황해도구월산은외백호,제주도한라산은외안산’으로설명하는데서서울이세계의중심이라는자부심도엿볼수있다.

한양은궁궐을중심으로꾸며진신도시였다.그래서지금의서울을이해하려면우선조선의5대궁궐을둘러봐야한다.그런다음,사대문과사소문으로이어지는도성을답사하면서그안팎에서서로부대끼며살아가던순박한백성들의애환도짚어봐야할것이다.이런답사는승용차보다는지하철이나버스등대중교통으로접근하고발품팔아야만그절절한사연이가슴에더욱깊이다가오지않을까.

▲창덕궁의중심건물로서조정의각종의식과외국사신접견장소로사용하였던인정전.앞뜰엔동서양반이차례로늘어서게끔품계석을세워놓았다.
1392년조선을세운이성계는여러논쟁끝에한양을도읍으로정했으나한양에서도궁궐의후보지는여럿이었다.고려시대남경의이궁터(궁정동일대),서대문밖의무악벌,한양동북쪽의노원역등의견이다양했다.태조는무학대사와이들지역을직접답사한끝에지금의자리를궁궐지로확정하게된다.1394년(태조3)8월24일의일이다.

이성계는그해9월신궐조성도감(新闕造成都監)을두고궁궐조성에착수했다.이성계는궁궐공사가시작된지한달만인10월25일천도를단행하여3일후인10월28일한양에도착하였다.그래서서울시는이날을‘서울시민의날’로지정하여기념하고있다.그러나조선시대정궁(正宮)인경복궁(景福宮)이완공된것은그로부터1년이지난1395년(태조4)12월이었다.‘경복(景福)’은시경의‘군자만년개이경복(君子萬年介爾景福)’이란글귀에서따온이름으로‘온백성들이태평성대의큰복을누리기를축원한다’는의미를담고있다.

한양을도읍으로정할때도풍수가아주중요했지만,지금도서울을이해하려면어쨌든풍수관련서적으로뒤적거려야한다.고려와조선은물론오늘날까지도풍수는역사를움직이는보이지않는권력이아니던가.

▲창덕궁에서가장아름다우면서원형이잘보존되어있는후원.
지난2007년4월40년만에개방된북악산서울성곽을이번에걷다보니,경복궁정면으로우뚝솟아있는관악산이한눈에들어왔다.풍수에서보는관악산은불(火)이다.따라서한양은관악산의화기에무방비로노출된상태였다.무학대사와정도전은논쟁을벌였다.무학대사는관악산의화기를막기위해서경복궁을동향으로지어야한다고했다.그러나정도전은제왕은모두남향으로궁을건설했다며관악산의화기는한강이막아줄것이라고주장했다.
이성계는정도전의손을들어주었다.

궁궐은북악산을주산으로삼고임좌병향(壬坐丙向·북북서에앉아남남동을바라본다)의터를잡았다.이에무학대사는“도읍을정할때중의말을들으면나라가연장될것이나정씨의말을들으면5대가가기전혁명이일어나고200년못가나라가흔들릴난리가일어난다”고예언했다고한다.후세의백성들은세조의왕위찬탈,임진왜란과병자호란등을겪으며대사의예언을떠올렸을것이다.

남향으로하긴했어도관악산의기세는그래도두려웠던모양이다.이는도성의정문인숭례문에잘드러난다.우선이름의숭(崇)은높인다는뜻이고,예(禮)는음양오행중불에해당한다.불꽃을확높인것이다.또현판의글씨가여느문의현판과는달리불꽃처럼세로인까닭도마찬가지다.불로써불을제압하려는의도였으니,숭례문의현판은관악산의화기를누르기위한일종의부적인셈이다.

이뿐만이아니다.관악산의화기가궁에미치는것을막기위해관악산상봉에샘을파고구리용을넣었다는이야기도전한다.또궁궐의연못은미적인조경외에도화기의침입을막아주길바라는의도가있었다.물론유사시에불을끄는데쓰려는지혜였지만.그리고지금은보수공사중이라볼수없지만,광화문해태도흥선대원군이경복궁의화재를막기위해세운것이다.

▲지난2007년4월40년만에개방된북악산성곽.
조선시대한양의범위를살펴보자.당시한양의행정구역은도성(都城)과성저(城底)로구성되었다.종묘·사직·궁궐·관청·도로·시장등이들어선성안지역인도성은동·서·남·북·중의5부(部)로나뉘었다.도성지역은현재로보면서울최고의번화가인종로구와중구지역이된다.역시지금도서울의핵심역할을하고있는곳임을알수있다.

성저는성벽으로부터사방10리에이르렀는데,동쪽으로는양주의송계원·대현·중랑포·장안평,서쪽으로는양화도·고양의덕수원(응암동)·모래내·난지도,남으로는한강노도,북으로는북한산에이르렀다.당시도성은정치·행정중심의소비도시로서의성격을지녔고,성저십리지역은대부분농경지역으로도성에생활물자를대는역할을맡았다.요즘엔성저지역도모두대도시로바뀌었으니이런상전벽해도없을것이다.

인구는어땠을까.서울시기록을살펴보니조선이안정을찾은15세기초인1428년(세종10)의도성안의인구는10만3328명이었다.이들의대부분은왕실과양반관료와그가족들,군역에복무하는군사들,각종관청에속한관노비와개인에속한사노비,공장·상인들이었다.도성밖의인구까지합하면11만명이었다.그뒤200여년간은대략20만명선을유지하였다.

그러다1592년임진왜란,그리고1624년병자호란으로인명과재산에막대한피해를입게된다.조선말기인1835년한성부의인구는20만3901명으로다시늘어났다.일제강점기엔도시규모가계속확대되어1910년23만명,1913년28만명,1929년34만명선이었고,1936년엔행정구역이확대되면서64만명이던인구가1941년엔거의100만명에가까운97만명이되었다.그리고2006년6월30일현재의인구는무려1천34만4440명이다.

600여년전천도당시10만명쯤된인구가100배에이르는1천만명을넘어섰으니제아무리서울이명당이라고해도이많은사람들을다품기는버거울것이다.그래서지금의서울은대도시가갖는온갖병폐는다갖고있는종합체라해도지나치지않다.교통문제,주택문제,인구문제,환경문제,빈곤문제등등풀어야할숙제가많은것이다.

▲1한양도성의북대문이었던숙정문.이문을열어놓으면도성의여인들이바람이난다하여평소에는굳게닫아두었다.2북악산성곽길에있는1.21사태소나무.1968년무장공비와우리군경이치열한전투를벌였던흔적이다.3서울성곽의북악산구간을답사하려면허가를받은뒤출입증을목에걸어야한다.
한양을방위하기위해쌓은도성은북악산(342m),낙산(125m),남산(262m),인왕산(338m)을잇는총길이59,500척(약18.2km)이었다.1396년경상·전라·강원·평안·함경도등에서11만8천명을동원해사대문(四大門)과사소문(四小門)을준공하였다.그리고문루의누각들은공사후건축기술이뛰어난승려들을동원하여빛을보았다.당시평지는토성,산지는산성이었다.세종때엔약32만2200명의인부와기술자를동원하여토성부분을석성으로고쳐쌓았다.이후도성은부분적으로만보수했을뿐크게붕괴된곳은없었다.

하지만돌이켜보면,정말애석하게도,한양의도성은정작필요할때본래의역할을제대로해내지못했다.도성은외부로부터침입을막기위한방어막이지만,내부가썩거나약하면그야말로무용지물이아닌가.아쉽게도한양도성이그랬다.우리민족이누란의위기에처했던임진왜란때도그랬고,병자호란때도마찬가지였다.당시적은조선군의별다른저항도없이성문을지나궁궐로들어섰던것이다.

그러고도정신을못차리고결국나라를빼앗기게되는20세기를전후해서는일제에의해한양도성은의도적으로허물어지기시작했다.일인들은1899년서대문과청량리사이에전찻길을만들면서동대문과서대문부근의성벽일부를헐어버렸고,이듬해엔용산과종로사이에도전찻길을낸다며남대문주변의성곽을철거하였다.일제강점기엔더욱노골적으로도성을없애기시작했다.결국서대문과혜화문(동소문)도헐리면서사실상서울의평지성곽은모두철거되고말았다.

그리하여오늘날엔총길이18.2km가운데산지성곽10.5km와삼청동·장충동일대의성벽일부만남게되었다.서울시는서울을유네스코‘세계역사도시’에등재하기위해문화재청의승인을받아2008년부터도성을본격적으로복원한다는계획이라지만,흥인지문~광희문,숭례문주변등5.14km는워낙건물이밀집되어있어복원이가능할까의문스럽다.

▲1서울시내주요장소를돌아볼수있는서울시티투어버스.외국인에게특히인기가있다.2도성의시체가빠져나가던곳이라고해서시구문이라고도불리던광희문.3광화문사거리풍경.한가운데이순신장군동상이우뚝서있다.
여하튼,도성엔사대문(四大門)과사소문(四小門)이있었다.사대문은조선의통치이념을성리학적으로풀이할때인간의덕목인인·의·예·지·신오상(五常)에따라이름이지어졌다.즉,인은동쪽의흥인지문(興仁之門),의는서쪽의돈의문(敦義門),예는남쪽의숭례문(崇禮門),지는북쪽의숙정문(肅靖門)이고,신은보신각이다.

흔히동대문으로불리는흥인지문의정식이름은흥인문(興仁門)이다.예로부터낙산의지형이낮아왜구의침입을많이받으므로고종때동쪽의기운을높이는뜻에서산이중첩된모양의갈지(之)자를넣어비보(裨補)하였다.임진왜란때고니시유키나가(小西行長)가별저항도받지않고제일먼저이문을통하여한양에입성하였던사실을기억했을것이다.하지만조선은얼마안가나라를통째로빼앗기게된다.동쪽이든서쪽이든외침을막으려면힘을키우는수밖에없다.풍수는그다음에논할일이다.

서대문으로알려진돈의문(敦義門)은지금은없다.중국사신이한양으로들기위해예복을갈아입었던홍제원(弘濟院),사신이들어오던영은문(迎恩門),임금이사신을맞이하던모화관(慕華館)등이모두서대문밖에있었다.1915년일제는도로확장공사를한다는핑계로철거하고말았는데,일제의입장에서보면조선시대500년동안중국과통하는관문이었던이문이눈엣가시였을것이다.영은문자리엔1896년독립협회에서세운독립문이세워져있다.

남대문인숭례문은우리나라국보제1호다.지정번호가문화재의권위를나타내는것은아니지만국보제1호가명예로운지위임은확실하다.하지만숭례문은심심찮게제1호라는지위를박탈당할위기에처하곤한다.일제잔재가묻었다는것인데,일제가숭례문을철거하지않은까닭도,임진왜란당시가토기요마사(加藤淸正)가이끄는왜군이한양으로입성한문이기때문이라는것이다.이런논란을떠나숭례문은건축학적으로도가치가있다는게전문가의진단이다.얼마전숭례문으로행인이지나다닐수있도록개방하긴했으나,국보제1호를묻는여론조사에서항상훈민정음,경주석굴암,해인사팔만대장경보다도뒤지고있으니정말위태로운지위가아닐수없다.

북대문은현재삼청터널위쪽에복원해놓은숙정문(肅靖門)이다.이문은방위에맞춰세우기는했지만대문역할을하지는않았다.북문쪽은지형이험한편이라어차피사람의왕래가적기도했지만,이북문을열어놓으면음기(淫氣)가침범하여한양의부녀자들의풍기가문란해진다하여평소엔문을닫아둔것이다.대신숙정문서북쪽으로세검정이있는홍제천위쪽,그러니까지금의상명대학교남쪽에홍지문(弘智門)을내고그쪽을통해다니게했다.이래저래최근40년만에숙정문이공개되면서그문이열렸으니호사가들은풍수를핑계로할말이많겠다.

▲서울의한복판인종로구와중구의경계를흐르는청계천.최근복원사업을벌여현재5.8km의구간을걸을수있게되었다./인사동을찾은한외국인이물건을고르고있다.흔히볼수있는풍경이다.
이번엔도성의작은문을살펴보자.도성의사소문은동소문(東小門)인혜화문(惠化門),서소문(西小門)인소덕문(昭德門),남소문(南小門)인광희문(光熙門),북소문(北小門)인창의문(彰義門)을일컫는다.조선시대중국사신은주로가장큰문인숭례문을통해입성하였는데,여진사신은혜화문으로,왜의사신은광희문으로만들어올수있었으니문에도차별이있었음을알수있다.

혜화문은일제강점기에길을내면서문루와석문이차례로헐렸는데,얼마전복원할때제자리를찾지못해할수없이혜화로터리주변의언덕에세워야만했다.소덕문은한양의서남쪽,지금의덕수궁위쪽에있던문이다.이문은일제강점기에모두철거되는바람에지금은흔적조차남지않았다.다만서소문동이라는지명으로짐작해볼따름이다.중앙일보호암아트홀앞에표석이세워져있다.

한편,장사지낼때도성의시체는이소덕문과광희문으로만나갈수있었으므로도성안에서서쪽으로나가는시체는모두이문을통하여나갔다.또성밖엔죄인을처형하던사형장도있었다.세조의왕위찬탈에반대하던사육신도이곳에서목숨을잃었다.지금의서소문공원이바로죄인을처형하던장소였다.

지하철2호선동대문운동장역3번출구로나오면만날수있는광희문은소덕문과함께한양백성들의저승문으로통했다.개천물길가까이있어수구문(水口門)이라고도하였는데,이문을지나서신당동화장터나금호동공동묘지로가게되므로시구문(屍口門)으로더많이불렸다.아직도서울사람들은이문의절절한사연을입에자주올린다.

-출처/월간산[459호]20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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