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클라이머의 삶] 모상현씨 *-

[이클라이머의삶]모상현씨

“이제남을위해서도살고싶어요”

2007년5월22일오후12시엄홍길,변성호,셰르파한명과함께로체샤르정상능선에올라선모상현(牟相賢·34·컬럼비아스포츠웨어코리아마케팅팀)은잠시고민에빠졌다.발이무척시렸다.C4를구축하기위해C3에서닷새간텐트플라이하나로비박하며지내는사이발가락에동상증세가나타나물집이잡혔으나베이스캠프에서이틀쉬면서가라앉아괜찮으려니했으나문제가생긴것같았다.

선배두사람에게자신의상황을얘기하면서도지금이자리에서기까지석달이걸렸다생각하니그냥내려선다는게너무도억울하다싶었다.이제두세시간이면석달간의등반을끝내고그토록염원해오던로체샤르8,400m정상에올라설수있다는생각을떠올리며두주먹을불끈쥐었다.

“살려달란소릴듣고도움직일수없었어요”


산소와로프는이미다떨어진상황.밑에설치했던40m로프두동을거두었다.평탄하리라싶었던설릉은20~30m높이의벽이3개나나타나애를먹였다.그런데도즐거웠다.설악산용아장성을오르는기분으로정상에올라섰다.모상현과변성호에게는석달간의등반이었지만엄홍길대장은2001년이후네번도전끝에이루어진등정이었기에그기쁨은이루말로표현할수없었다.


그리고얼마뒤.‘아니벌써시간이이렇게되었단말이야.’모상현은시계를쳐다보는순간깜짝놀랐다.칠흑같은어둠이밀려오고,엄청난추위와강풍이몰아쳤다.변성호가갑자기앞이안보인다며당황하는표정을지었다.정상에서캠코더로파노라마를촬영하기위해잠시고글을벗은게설맹을불러일으킨것.그런상태로안부까지가는동안모두지쳐갔다.상현은C4도착이튿날엄홍길과변성호가쉬는사이셰르파와둘이서400m로프를까느라힘을쏟아부었던터라두사람에비해더빠른속도로체력이고갈되어갔다.


“비박하자!”


8,000m고봉등반중여러차례비박을경험한엄홍길대장이안부에서밤을넘기고내일하산하자고했으나상현과성호두대원은자신도없고,하룻밤지냈다가는열발가락모두잘라내는상황이생길지모르겠다고생각하니불안감에1분1초라도빨리내려서고싶었다.너무정신없이등반하다보니배낭안에물이있는데도마시지못했고,떨어진지이미오래인산소통도그대로멘상태였다.

꽁꽁얼어붙은수통과산소통을벗어버리고다시하산길에들어섰다.자일한동으로하강하거나클라이밍다운하고고정로프를만나는지점에내려서자안심이되었지만엄홍길과변성호가내려오지않자초조해졌다.잠깐기다리다마지막캠프로향했다.너무힘들어잠시쉰다생각하다깜짝놀라면졸고있었고,정신이돌아오면위에서내려오는사람들을걱정하다혹시죽은게아닐까하는생각에공포감이밀려왔다.

그래도살아내려가야한다는의지를버리지않았다.졸음이쏟아지면얼어붙은장갑으로뺨을후려치고머리를설벽에처박았다.그렇게한발한발.마지막캠프가내려다보였다.살았다싶었다.22시간만에돌아온캠프였다.지퍼를열고상체를집어넣는순간그대로깊은잠속으로빠져들고말았다.

▲눈보라와깊은눈을헤치며로체샤르정상을향하는모상현씨.

“상현아~,상현아~.살려줘~.”

잠결에성호의목소리가들려왔다.10여년동안형동생하며지내온변성호의살려달라는절규였다.2003년탈레이사가르뿐아니라국내의여러산에서목숨을걸고등반한사이건만눈보라가몰아치는텐트밖으로나간다는게엄두가나지않았다.아니손끝하나움직일수없었다.내가형한테어떻게이럴수있나하는생각에눈물이주르륵흘렀다.

이튿날이돼도변성호의눈상태는정상으로돌아오지않자모상현은그와함께C4에서하루더쉬기로했다.그런데지원차올라온셰르파와함께하산하던엄홍길은C4바로아래로프가끊어져위에서줄을거두어깔아야한다는황당한상황을알려주었다.변성호는눈도눈이지만손과발에동상이심해져몸을마음대로사용할수없는처지였다.때문에상현은위에서회수한자일을캠프아래쪽으로늘어진줄과이었다.그런데그게죽음의나락으로잇는줄이될줄이야.

“저희팀C4가80년대초체코팀의캠프자리였어요.그래서주변에고정로프와하켄이눈에띄었는데,그줄에저희줄을묶었던거예요.하루쉬고난뒤였는데도정신이없었나봐요.20년넘도록8,000m에매달려있던줄에이었으니툭하는느낌을받는순간40m쯤떨어진것같아요.수천m아래빙하로내리꽂나싶어순간적으로끔찍했는데눈턱에걸리면서목숨을부지할수있었던거죠.”

▲엄홍길대장(오른쪽)과함께올라선로체샤르정상./로체샤르등반후BC에서헬기를기다리며.

어린시절부터넉넉하지못한채산을다니다보니장비를소중히생각했던상현은마지막내려서기전캠프에올려놓은침낭2개에산소마스크8개와레귤레이터2개등값이나가는장비는몽땅챙겨배낭이머리보다높이올라올정도로짊어지고내려오던터였다.눈턱에서어렵게멈춰선상태에서배낭을풀러피켈만손에쥔다음몽땅버렸다.그리고살얼음걷듯설벽을한발씩내려서고정로프끝지점까지내려섰다.

“얼마뒤성호형이클라이밍다운으로내려왔는데,눈물이글썽하지뭐예요.너그렇게혼자가버리면난어떻게하란말이냐면서요.그전날새벽제가먼저내려오면서느꼈던,수직고3,000m벽에나혼자만있다는불안감을느꼈던것같아요.이렇게어렵게베이스캠프로내려섰는데,힘이너무드니도와달라는무전을받고올라온후배의입에서는술냄새가풀풀나고,캠프의대원들은철수준비에정신이없지뭐예요.저희두사람의상황을전혀모르고있었던거죠.”

2000년세계1·2위봉연거푸등정

두사람은이튿날고소포터가짊어진대나무광주리에실려베이스캠프에서4시간떨어진마을로옮겨져헬기를타고카트만두를거쳐빠른시간내에귀국할수있었지만,이후1년간힘든시간을보내야했다.변성호는발가락10개를모두잘라내야했고,모상현역시양쪽엄지와검지발가락발톱부위를절단해야했다.

“병원에서너무힘들었어요.저는그래도나았어요.성호형은손과발이모두동상으로엉망이었으니까요.똥까지도받아내야했으니까요.가장힘든것은선후배들의눈빛이었어요.동정심이었죠.저보다먼저발가락수술한성호형을보니까겁이덜컥나더군요.그래서도망치듯퇴원해다른병원에서치료를받았어요.”

수술대신자연괴사한부위를떼어내는치료법이었다.공포와고통을덜수있었지만아무래도시간이오래걸릴수밖에없었다.요즘도1주일에한번씩링거를맞고있다.어린아이속살과연약한발가락살이어서단단해지게하기위해서다.

▲2006년선인봉남측오버행.

“제가받은치료법을알려달라고할까봐겁이나요.그게최선이라고할순없을테니까요.사람마다반응이다르니까요.솔직히2000년에베레스트를가면서도길목에있는로체남벽을제대로못봤어요.너무멀게만느껴졌던벽이었기에그랬던것같아요.저희원정대는로체와로체샤르를함께공략하는팀이었어요.다른대원들모두로체남벽등반을원했는데,저와성호형은엄홍길형의목표인로체샤르를택했어요.로체남벽은제능력으론불가능하겠다싶었던거죠.벽은그래도해볼만하다싶은데막판칼날리지는답이안나왔으니까요.참힘들었던1년이었어요.그래도이제는이겨낸것같아요.그래서제자신이대견하다싶어요.”

88년중학교2학년2학기까까머리때친구들과나선북한산산행에서전문산악인들과인연을맺은모상현은이듬해청악산우회에입회하면서암벽등반에빠져들었다.실내인공암벽까지손을뻗고,91년1월고교1학년의신분으로라면집에서아르바이트해서마련한돈과선배들이도와준돈으로일본조가사키해벽을찾을정도로아예바위에미쳐지냈다.그결과는여러등반대회에서나왔다.그해가을설악자연암벽대회와이듬해봄에코오롱컵대회에서고등부우승을차지하는등고2때5.12급온사이트수준까지올라섰다.

그러나학교성적은산열정과반비례할수밖에없었던그는대학입시에서고배를마시고,씁쓸한마음으로입대해야했다.군생활중자신이스스로해낼수있는게아무것도없다는사실도깨달았다.어떤일이든척척해내는동료들을보면화가치밀정도였다.그모든것을떨칠수있었던것은선배에게제의받은낭가파르밧(8,125m)원정이었다.

“조가사키를함께다녀온윤계중선배님이대장으로내정된충남대원정이었어요.그렇지만충남대산악부는커녕충남대도안나온저를데려가겠다는데누가그러라하겠어요.그렇다고토왕폭한번오른기록도없는저였는데요.산악부출신들이아우성대는데도윤계중선배님은꿈쩍하지않았어요.그러더니어느날보따리싸라하시는거예요.”

윤계중씨가데려다준곳이설악동이었고,기다리고있는사람은충남대산악부출신인신상만(98년탈레이사가르등반중사망)이었다.신상만역시평일에는막일을하면서더높고험난한산을그리며설악산에서칼을갈고지내던클라이머였다.

▲2000년에베레스트정상.

“상만이형이출근전오늘은천화대갔다와라하면,천화대를가고,짐을무겁게지고공룡릉을다녀와라하면그대로했어요.빵한두개로이틀동안참고걷는산행도해봤고요.토왕폭,토왕좌벽도다그때처음해본거예요.월세10만원짜리,얼음장처럼차가운방에서지내고주말에설악산왔다돌아간친구들이남겨준음식먹으면서지낸겨울이지만지금생각해보면가장즐거웠던시절이었던것같아요.”

상현은그해겨울을설악산에서나고이듬해97년3월초설악산에서돌아와원정준비를하면서도매일같이30kg가넘게나가는배낭을멘채앉았다일어서기를1천회씩하는등낭가파르밧정상을향한준비를게을리하지않았고,원정에나서서도윤계중씨의기대를저버리지않고세계제9위고봉등정에성공한다.

“고교시절스포츠클라이밍대회를앞두고그랬듯이낭가에가서도이미지트레이닝을수없이반복했어요.두눈을부릅뜨고낭가파르밧을바라보았던거죠.그렇게반복하다보니어느순간자신이생겼어요.쉽진않았어요.마지막캠프에첫번째오른날은지금도어떻게올랐는지기억이나지않을정도로고소증에완전히맛이갔었죠.2차공격에서올랐어요.상만이형과함께오르다보니무엇보다심리적으로안정이되었던것같아요.”

히말라야8,000m급고봉등정의꿈을이루었으나상현은귀국후고민에빠졌다.그의머릿속에1년간꽉차있던목표도사라지자대학에대한갈증이되살아났다.대학산악부출신들과의생활또한자극제였다.“고민하다목표를산대신대학진학으로바꿨어요.그렇게해서고교졸업5년뒤인99년천안대에들어간거예요.멋진등반기를써보고싶었어요.그래서택한게국문과였으니까요.”

학업에한창열중할즈음에베레스트원정의기회가왔다.대산련이추진하는세계7대륙최고봉원정대였다.낭가파르밧성공덕분에받은높은점수로발탁은되었지만세계최고봉등정이쉽지는않았다.첫번째는해발8,500m지점까지올랐으나깊은눈에포기해야했고,두번째때는등정은커녕C3(7,200m)에서폭설에이틀간갇혀지내야했다.그래도그는포기하지않고세번째도전에나서성공했다.

스승이남긴최고의선찾아탈레이사가르에도전

그해여름원정에나선K2(8,611m)는선배인엄홍길씨의권유로이루어졌다.8,000m14개거봉완등을마무리짓는등반에서상현은꼭필요한존재였다.그역시다른산도아니고산중의산K2는꼭가고싶었다.이미대원으로확정된한왕용,나관주와같은기라성같은선배들과등반을통해경험을쌓을수있으리라는기대감도생겼다.모상현은K2에서도선배들에뒤지지않는능력을보여주며결국등정까지일구어냈다.그러나이후방향을바꾸었다.

“K2와에베레스트등반을통해얻은것중가장큰게높이에대한열등감을떨쳐버렸다는거예요.그걸깨고나니까하고싶은등반을해야겠다싶어지더군요.알프스부터찾았어요.산악스키를배우고싶었거든요.그런데2001년에이어2002년시샤팡마등반을마치고돌아온다음두번째로찾은알프스에서많은것을깨달았어요.수백m높이의벽이지천에널려있는거예요.그전까지는알프스엔아이거와그랑드조라스,마터호른등3대북벽만있는줄알았어요.알프스를가보지않고히말라야를다녀왔다생각하니초등학교도안다닌사람이대학에들어가겠다고욕심을부린게아닌가싶더군요.”

상현에게그때까지해온모든등반은탈레이사가르북벽의전초전이었다.2002년가을정찰을다녀온그는이듬해여름알프스에서칼을갈고곧바로탈레이사가르에도전했다.

“상만이형이탈레이사가르북벽에서사고를당했다는소식을듣는순간머리가멍해졌어요.신기하다싶을만큼기량이뛰어난형이어떻게산에서사고를당할수있을까싶었던거죠.세월이조금지나면서탈레이사가르가공포의대상으로다가오더군요.그러면서스승이남긴마지막가르침이라는생각이들었어요.그가남긴최고의선을좇으려2003년도전했던거예요.”

▲2003년탈레이사가르북벽./2006년요세미티노즈등반.

2003년가을탈레이사가르북벽등반은고김형진의형김형일,고최승철의아내김점숙등98년9월28일정상설릉등반중추락사한사고자들의유가족등,대부분사고자들과연관있는사람들이힘을모아나선등반이었다.

“딱한번의시도로끝났어요.판단미스였죠.길을잘못들어섰어요.그래서예상높이를못미처6,600m지점에서그날등반을끝냈죠.거기서피켈로쪼아내만든좁은얼음턱에쪼그리고앉아포타레지커버를뒤집어쓴채자는데성호형이탈이났어요.그날저녁먹은건조밥이문제였지요.밤새토하며고통스러워했어요.그런컨디션으로이튿날하룻동안표고차300m가넘는벽을타고정상에올랐다700m아래캠프까지내려선다는것은불가능하다싶었어요.저역시그리좋은상태가아니었거든요.”

탈레이사가르등반은알프스그랑드조라스북벽등반을마치고귀국하자마자나선등반이었다.알프스등반은유난히힘겨웠다.몸무게가10kg이나빠졌지만훈련부족이려니했다.그런데아무래도몸에이상이온것같았다.탈레이사가르발대식을마친뒤검진결과갑상선기능항진증이었다.그런상황에서도상현은그얼마전인연을맺은변성호와의약속을지키기등반에참가했던것이다.

“약먹어가면서등반했어요.아무튼한달간등반을하는사이치료시기를놓쳤어요.저도몰랐어요.심해지면눈이튀어나오고머리털이빠진다는사실을꿈에도몰랐던거죠.컨디션에따라몸무게는한달에10kg씩널뛰기하듯하고….거울에비친제모습을보면괴물이다싶었어요.1년반동안숨어지냈어요.집에틀어박혀꼼짝하지않았으니까요.2005년5월수술하고나아진거예요.”

모상현은지금도탈레이사가르등반에대해무척아쉬워하고있다.무엇보다아쉬운건당시인공등반기술에대해알지못했다는사실이다.

“포터레지가지고밀어붙였으면무리없이끝낼수있었을거예요.그런사실을3년뒤인2006년엘캡노즈등반중깨달았어요.지금하면틀림없을거예요.알프스와요세미티그리고히말라야등고산거벽등반에필요한3개의무기를모두가지고있으니까요.물론발가락이멀쩡하다는가정하에서요.”

이제30대중반에들어선모상현은자신이해낸그어떤등반보다갑상성기능항진증과동상등두차례시련을이겨낸것에대해뿌듯해하고있다.요즘은발가락수술후돋아난새살이하루빨리단단해지도록하기위해물집이잡히더라도매일아침이면달리기를하고주말이면산을찾고있다.

“원정을가더라도놀듯이등반했는데로체샤르에서만큼은모든것을쏟아부었어요.진짜8,000m급등반이다싶었으니까요.큰데미지를입은것은정말아쉬워요.그동안사고를당해보지않아제한계를몰랐기때문인것같아요.또다시그런상황을만나면어떻게할까생각한적이있어요.역시밀어붙일것같아요.그렇지만이성적으로생각하면해서는안된다싶어요.나자신뿐아니라여러사람들에게고통을주니까요.결국그런등반을할수도없는상태가되어버렸잖아요.”

모상현은K2정상에오르자마자부모님을위해기도를드렸을만큼독실한크리스천이다.그는부모님이마음아파하신다는것도뻔히알면서산때문에성실하게교회에다니지못했던것에대해미안한마음을가지고있다.때문에로체샤르등반이후교회다니는일에충실하려애쓰고있다.

▲2008년알프스타퀼북벽./지난여름알프스코스믹리지등반.

“인간이얼마나나약한존재입니까.로체샤르에서줄이끊어져떨어지는순간입에서나온말이뭔지아세요?하나님제발살려주세요,이거였어요.요즘토요일은산에가더라도주일에는꼭교회를다니고있어요.주일교사로도활동하고,가끔장애인들을위한봉사도하고요.그동안저만을위해지내왔으니까이제부터라도남을위해조금이라도시간을내야겠다마음먹었어요.정신건강에도좋아요.부모님들도무척좋아하시고요.산에서빙빙떠돌다가교회로돌아왔으니까요.믿음이대단한건아니에요.기도하는사이저자신을반성하고남을생각할시간을갖는다는것만으로도충분히가치있는일이다싶은거예요.”

갑상성기능항진증으로튀어나온눈수술을받고눈주위의멍이빠지기도전인2005년6월등산의류업체인컬럼비아스포츠웨어에입사한모상현씨는마케팅팀소속으로사회생활에도열중하고있다.산악인의날행사때산악인유가족들이나어려운산악인들에게주는지원금또한입사면접때임원진에게내놓은의견이반영된것이다.

“이제꿈은꿈대로두기로했어요”

이제발가락절단으로인한정신적인휴유증에서완전히벗어나고지난여름알프스등반을다녀왔을만큼상처도어느정도아물어가고있는모상현씨는라이벌업체라할수있는노스페이스에근무하는김은주씨(33)와11월29일백년가약을맺는다.

“은주씨는직장생활하면서알게된사이인데산에다니는저를잘이해해줘정말고마워요.남자에대해배려하는마음도깊고요.많이좋아졌어요.알프스도다녀왔고,한달전에는인수봉도붙어봤어요.발가락사용이기본인슬랩은앞으로도쉽지않을것같아요.그렇지만에지를이용하는하드프리쪽은괜찮을것같아요.신혼여행은시드니로갈거예요.이민간선배가꼭오라고도했어요.그형만나면산얘기로밤새우는날이많을것같아마지막이틀동안만만나자고했어요.”

로체샤르에서돌아와병원에누워있을때그를아는산꾼들이염려했던것과달리모상현씨의꿈과열정은계속이어지고있다.

“성호형은상처가어느정도아문지난해가을부터우이동에서컬럼비아스포츠웨어우이점을운영하고있어요.결혼도했고요.벌써부터선운산가자고난리예요.언젠가,매킨리에서사라진일본산악인우에무라나오미처럼세상을자유롭게살고싶다고말씀드린적있지요.꿈과현실은다르더군요.그냥꿈은꿈으로두기로했어요.산이요?발을사용하는데아무문제가없다해도히말라야는쉽지않을것같아요.대신딱딱한신발신고하는벽등반은내후년쯤이면가능하지않을까싶어요.이젠극한등반보다는정말즐거운등반을하고싶어요.어디라고얘기하면할수없이가야할것같아지금은얘기하지않을겁니다.”

-글/한필석차장대우/월간산[470호]20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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