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강 과 문 화 [1] *-

한강의발원지는검용소이다.

남한강(南漢江)은강원도태백시의금대봉북쪽계곡검용소에서발원한하천으로서삼척시하장면부근에서골지천(骨只川)이라는이름으로북쪽으로흐르다가석병산(1,010m)에서발원한임계천과합류해서류하고,오대산에서흘러나오는오대천을정선군북면여량리에서황병산(1,407m)을발원지로한송천과만나조양강이되어흐르다가오대천과합류한후남류하여동강과합류하여남한강본류를이룬다.영월읍에서평창강과주천강이합류해만들어진서강과만난후흐르다가충주시에서달천,강원도원주시와경기도여주군부근에서섬강·청미천과만난후양화천·복하천·흑천등의지류를합친후양수리에서북한강과만난다.

북한강(北漢江)은강원도(북한)금강군의옥밭봉(玉田峰:1,240m)에서발원해금강산의비로봉부근에서발원하는금강천(金剛川)·사동천(泗東川)등을합치면서북한강본류를이루어남쪽으로흐르는데,춘천에서소양강,가평남쪽에서홍천강등의주요지류와합류한다.양수리에서시작되는한강본류는남한강의유로와같은방향,즉북서쪽으로계속흐르면서왕숙천·탄천·중랑천·안양천·굴포천등의작은지류를합치며,하구에서다시임진강과만난다음경기만에흘러든다.

〈한서漢書〉지리지에는대수(帶水),광개토왕릉비(廣開土王陵碑)에는아리수(阿利水),〈삼국사기〉의백제건국설화에는한수(寒水/漢水)로되어있으며,’漢’이라는글자는중국문화가도입된이후에붙여졌다.한강은조선초에수도를한성(漢城)으로옮긴이래내륙수로로중요하게이용되어마치국토의대동맥과같은구실을해왔다.시대의변천과더불어한강의기능도크게변화해오늘날에는내륙수로로서의기능은사라지고,수도권의수자원(水資源)으로서의중요성이매우커졌고,관광·휴식공간으로이용되고있다.

한강의발원지는지리적관점에서보자면1987년국립지리원에서물길의길이를측정한결과금대봉아래인태백시창죽동산1-1번지의검용소(儉龍沼)이다.그러나문화적관점에서보자면오대산의서대에있는작은샘인우통수(于筒水)로보는견해가있다.우통수의존재를처음기록을남긴것은삼국유사이다.고려와조선을거치며만들어진지리서나문인들의시와기문에도우통수는한강이시작되는샘으로혹은차를달이는데더없이훌륭한물로꼽히고있다.또다른견해는고목나무샘을지칭하기도한다.한강의총길이는514km이다.

검용소는검용이살았다고하여붙여진이름이며다음과같은전설이전해오고있다.옛날서해바다에살던이무기가용이되고자한강을거슬러올라와가장먼쪽의상류연못을찾아헤매다가이곳이가장먼상류의연못임을확인하고이연못에들어가용이되려고수업을하였다.그때이무기가연못으로들어가기위해몸부림친자국이지금의검용소에서쏟아지는폭포인것이며이무기는심심하면인근에서풀을뜯다가물을먹으러오는소를잡아먹어동네사람들이이연못을메워버렸다고한다.

둘레20여m에깊이를알수없는검용소는석회암반을뚫고올라오는지하수가하루약2천t정도솟아오르고있다.오랜세월동안흐른물줄기때문에깊이1-1.5m,넓이1-2m의암반이푹파여서물이흐르는데용틀임을하는것과같으며솟아나온물이곧바로20여m의폭포를이루며쏟아지는광경은가히장관이다.검용소에서나오는물을검용이내뿜는물줄기라하여검용수라하는데한강수계에서가장깨끗하고찬물이다.사계절9°C정도로주위의암반에는물이끼가푸르게자라고있어신비한모습을하고있으며한반도의젖줄한강의발원지임을자랑하며오늘도서해를향해계속흐르고있다.

삼국시대의한강

삼국시대에접어들면서한강유역의득실이나라의흥망성쇠와지대한관계를갖고있었다.그이유는한강유역이반도의중앙부를축으로관류하는큰강인만큼한반도의중심무대지가되었기때문이다.또한군사,경제,사회,외교적제조건을구비하고있었기때문으로간주된다.따라서이지역이삼국쟁패의주요과녁이되었고한강유역을점유한국가는영토적확장과더불어국가발전의강력한터전을마련한결과가되었다.결국고구려,백제,신라가한강유역을번갈아지배했던사실을전역사과정에서알수있듯이한강유역을점유하면나라가번영하였고상실하면쇠퇴하였다.

고려시대의한강

송악의호족출신인왕건은918년왕이되어고려를건국하고935년후삼국을통일하였다.문종21년에한강유역의중요성이인식되어당시양주(현서울)를남경으로승격시켜개경및서경과함께3대요지가되었다.이후고려말1382년(우왕8년)9월에한양천도를단행하였다.그러나왜군의창궐,대명관계의복잡성등정치,사회적불안이고조되고풍수지리설이성행하자도읍이불길하다하여이듬해2월에개성으로돌아왔다.

고려왕조마지막왕인공양왕때(1390년9월)다시한양천도를단행하였으나한양천도가있은후큰비바람과천둥번개가일어나고,인축이동사했으며신도의문화부에큰범이뛰어들어사람을물어가는등불길한일이자주발생하자1391년2월에다시개성으로도읍을옮기게되었다.이리하여고려로서의한양천도문제는종말이맺어지고그완전한실현은1394년(조선태조3년)이성계에의해이루어졌다.

조선시대의한강

태조이성계는즉위후불과16일만인1392년8월3일에도평의사사에게한양천도를명하여태조3년(1394년)10월25일(음력)천도를실현하였다.한양천도의배경은다음세가지로나누어볼수있다.
첫째,주지하는바와같이풍수지리설에영향을받은바가컸다는점을널리알려진사실이다.즉개경의지덕이쇠패한땅이라망국의수도를하루라도빨리피하려는미신적사상인음양지리(풍수)적사상에영향받아천도를서둘렀다는지적이다.

둘째,태조이성계자신이왕위획득과관련되는행위에대한가책과개성의왕씨를중심으로한구가세족의반발에대처할필요때문이라고볼수있다.이러한정치적정황은태조이성계로하여금천도에대한강한의지를갖게하였다.셋째,한강을끼고한양의인문지리적위치의중요성을들수있다.한왕조가도읍지를선택할때는동서고금을막론하고우선지리적인위치를고려하고있음을널리알려진사실이다.한양은지세가훌륭하고군사적인방위에있어서천연의요새지였다.

이러한지세의훌륭함은일찍이이중환도그의「택리지」에서한양의진신인삼각산이수려하고맑기가나라안에서는사산중의하나라고예찬을아끼지않았다.또한,전근대사회에있어서국가재정의운용을위한수입은거의농업생산물에의지하고있었다.농업경제가사회의기반을이루고상태에서는현물을조세로수취하였다.따라서조정에서는세곡의운송에큰관심을가지게마련이었다.

그러나도로망을포함하여육상교통수단이별로발달하지못했던까닭에조세는주로대량수송이용이한조운을통해운송되었다.그러므로도읍지로서의위치는수륙의교통이편리한곳에있어야함은필수적이었다.따라서이러한지리적위치등을고려하여선택한한강을끼고있는한양은천도때부터조운의발전은필연적인것이라할수있다.전국의세곡이조운을통하여한강에모였고,한양에거주하는지주층이지방농장에서거두어들인소작도대부분선박으로이곳에운반되었다.

도성내일반생활품도그양이많은것은대부분은선박으로한강을통하여공급되었다.그리고조선후기에이르러세제개혁과아울러대동법이실시됨에따라한강은더욱중요성을더하게되었으며,호남을비롯하여충청도등지에서수납되는대동미는조운선을통하여한강으로수송되었다.따라서한강은백관의녹봉과국가재원을충당시켜보급로가되었다.

근세의한강

한강변에입주했던최초의외국인은프랑스인신부들이었는데1887년현원효로4가1번지의6,500평의땅을구입하여신학교를건축하고거주하기시작하였다.한강에증기선이최초로운항한것은1888년이었는데,그뒤1890년독일계와미국계의증기선이취항하게되었고,이어중국인거상동순태가100톤짜리증기선을들여와용산과인천사이를취항하기이르렀다.1899년착공한한강철교공사는다음해인1900년에완공,우리나라최초의근대식철교가놓여졌다.

그리고길이26마일의서울역에서인천을잇는경인철도가1900년에개통되었다.그리고한강에최초의인도교가가설된것은한일합방6년뒤인1916년이었고,새인도교는1934년에착공하여1936년에완공되었는데폭20미터에길이는10,005미터였다.한강에큰홍수가있었던때는1912년과1920년,1925년의세차례였다,.그가운데가장큰피해를낸것은1925년(을축)대홍수로7월15일에서18일까지4일간에걸쳐400에서500밀리미터의높은강수량을보였다.

노도와같은홍수물은한강제방을무너뜨리고순식간에용산,남대문앞까지일대를물바다로만들었다.현재올림픽주경기장이위치한잠실동과신천동은부리도(浮里島)라불리는하중도(河中島)였다.이섬은오랜세월동안흐름이약간씩북서류하게됨으로써생겨난섬이다.1970년4월,북쪽하도를넓게하고남쪽의하천을폐쇄함으로서하중도를육지화하는대공사가시작되었다.이대역사는100만평이넘는공유수면매립공사가주축이었으며이를중심으로그주변340만평의광역구획정리사업이동시에실시되어1975년에마무리되었다.이개발로인해남류하던흐름이폐쇄되면서만들어진호수가하적호(河跡湖)인석촌호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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