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의 산 [43] *-

18.와우산(臥牛山)

1.명칭과연혁

와우산은표고101.9m로그서쪽기슭에홍익대학교를감싸고있다.산세가와우시민아파트가있는북동쪽에서서강초등학교가있는서남쪽으로길게자리잡고있어서,멀리서바라다보면마치소가누어있는모양과같으므로와우산이라고부른다.굴레방다리와와우산에대한풍수지리설에의하면,예전에큰소가있었는데길마는무악(毋岳)에다벗어놓고,굴레는북아현동163번지남쪽네거리에벗은다음,서강을향하여내려가다가와우산에가서누웠다.그까닭으로북아현동네거리에있는다리를굴레방다리또는늑교(勒橋)라고부르게되었다고한다.

이곳주민들은와우산에대하18.와우산(臥牛山)여이렇게비유하고있다.와우산의소가여물을먹는그릇인쇠죽통은하수동132번지2호에있는‘농바위’이며,뿔은현재서강초등학교가있는자리,머리부분은서강시범아파트자리,엉덩이는와우아파트가있는자리이며,‘잔돌백이’는쇠똥에비유하고있다.1970년에와우시민아파트가붕괴된사실에대하여주민들은소엉덩이부분에지은아파트가엉덩이를흔드는바람에쓰러진것이라고우스개소리처럼이야기한다.

"와우산"하면연상되는것은와우아파트붕괴사고

1970년4월8일서울특별시마포구창전동산2에위치한와우지구시민아파트한동(15동)이무너진사고이다.사망33명,중상19명,경상21명등의피해를입혔다.조사결과사고의원인은해빙기에아파트의기둥이아파트의무게를지탱하지못하여지층이내려앉은것과하청업체들이자재를빼돌리고설계와는다르게건물을만드는등,부실공사를했기때문에일어난일이었다.와우아파트는서울특별시가와우산일대에건설한시민아파트였다.이사고로인해당시서울시장김현옥이같은해4월16일시장자리에서물러나는등사회적으로큰파문을일으켰다.그후와우아파트는철거되었고그부지에는공원이조성되었다.

-와우산전경-

-와우산오름길-

-와우산와우정-

-와우산체육공원-

-와우산주변도-

와우산은남쪽으로한강을끼고있어그기슭에는조선시대에관리들의녹봉을관장하는광흥창(廣興倉)이설치되었고,황해·평안·전라·충청도의세공미(稅貢米)가집결되었다.또한조선후기에는마포강즉서강일대가경강상인(京江商人)의주요활동무대가되면서상업이발달하게되자여각·객주및색주가와수운의안녕을비는부군당·신당등이발달하였다.이러한상업도시로발달해가는마포일대의진산(鎭山)으로와우산이자리하면서공민왕사당을비롯한많은민간신앙의요람이되기도하였다.

서강의뛰어난풍경을서호팔경(西湖八景)이라하였다.이는주로와우산기슭에서한강을비롯한주변을바라본풍경으로서와우산의지리적위치를잘알수있는모습이기도하다.와우산은6·25전쟁당시연희동104고지와더불어서울수복전투때최초의격전장이되기도하였다.그리고1968년밤섬이폭파되자이곳에살던62가구443명의주민들은와우산북동쪽기슭에세워진시민아파트로입주하였다.그러나1970년에와우아파트제15동콘크리트5층건물이완전히무너진이른바와우아파트붕괴사고가일어났다.

그후에도와우산일대는주거지개발사업이계속되어주택과고층아파트가계속들어서산을거의에워싸고있다.더욱이이들주민들의교통을위하여정상부근까지마을버스가통행되는등자연의산모습을찾기힘들게되었다.

2.자연생태

표고101.9m의와우산은한강연안농바위에서북쪽으로약900m지점에솟아있으며,마포구의중앙부에위치한구릉성산지이다.무악에서남쪽한강을향하여4개의산줄기가뻗어가는데,그중서쪽에서두번째줄기가운데우뚝한봉우리가와우산이다.연세대서쪽구릉산지에서신촌시장과동교동사이의언덕길을지나와우산에이른다.이줄기는계속하여당인리구릉에서서쪽으로뻗어잠두봉(30m)을일으키고한강에뻗었다가다시밤섬과여의도(국회의사당언덕:옛양말산)로나타난다.

와우산은동남으로향하여봉원천연안평지까지는약60°정도의가파른경사를이루었으며,예로부터그땅의형상을호수형이라고일컬었다.그리하여옛날부터서강을서호(西湖)라고불렀다.그중심은와우산이며,부드럽게한강변의농바위를향하여머리를뻗치고있다.와우산은무악에서갈라진산줄기의말단에발달한낮은잔구성산지이다.와우산은기반암인편마암층을뚫고분출한규장암(珪長岩)으로형성된전형적인형태를가진산이다.중생대백악기말(6천5백만년전)에지구내부에서분출한규장암이와우산과인근의노고산,풍산(風山),잠두봉,농암(籠岩)이다.

성산1·2동언덕산지,상암동구릉지,신수동∼현석동구릉지,염리동구릉지,용산구릉산맥전역의호상편마암층을뚫고그속층에관입하였다.그이후오랜지질시대에한강과지류의침식을받아지표층인호상편마암층이깎이고벗겨져규장암층이노출되어광범위한지역에전형적인규장암잔구가발달하였다.서울전역에서는찾아볼수없는특수한지층이다.따라서편마암계를모암으로하는토양은사질양토(砂質壤土)로모래성분이많은토양으로이루어졌다.그리고와우산은이미대부분주택지화하여그식생은특징적인것이없으며,아까시나무숲으로이루어져있다.

3.경승과사적

1)마포팔경(麻浦八景)

와우산에서남쪽으로바라보면서강·마포강과그맞은편의관악산·청계산이보이고,북쪽으로는무악과인왕·북한산줄기가시야에들어온다.마포·서강지역의강변풍경이워낙절경이었기에옛사람들은일찍이마포팔경을일컬어왔다.이마포팔경을서호팔경또는서강팔경등으로부르기도한다.마포팔경의진면목을정확하게조망할수있는지점이지금의상수동사무소의북쪽고지대와와우산의서강시민아파트자리이다.

마포강은조선시대에전국의농·수산물집산지였으므로어염·상선등으로붐볐으며,지금의염리동까지소금배가드나들었다.특히마포강은전국의제일가는강변경치를가져그야말로절승지(絶勝地)였다.따라서조선초부터풍류를즐기는사람들이몰려들고,중국사신들이뱃놀이를하며시문을읊은곳이기도하다.옛날사람들이손꼽았던?마포팔경?을살펴보면다음과같다.그러나6·25전쟁과도시화과정에서마포팔경중마포귀범·방학어화·율도명사·농암모연·우산목적의5경은자취를감추었다.

용호제월(龍湖霽月)-비갠날저녁용산강에뜬달
마포귀범(麻浦歸帆)-마포·서강나루로돌아드는돛단배
방학어화(放鶴漁火)-방학교(放鶴橋,여의도노량진쪽)샛강의고깃배불빛
율도명사(栗島明沙)-밤섬의맑고깨끗한모래밭
농암모연(籠岩暮煙)-농바위의저녁때오르는연기
우산목적(牛山牧笛)-와우산목동들피리소리
양진낙조(楊津落照)-양화진석양노을
관악청람(冠岳淸嵐)-관악산의아지랑이(맑은산안개)

2)광흥창(廣興倉)

광흥창은와우산남쪽기슭창전동402번지일대에있었는데,조선시대백관의녹봉을관장하던관서와그관할창고였다.고려충렬왕때설치되어조선시대까지존속한관서로,조선시대에는전국각지의조운선(漕運船)이집결하는서강연안에위치하였다.조선시대에선박들이상수동의점검청(點檢廳),신정동의공세청(供稅廳)을거쳐봉원천을거슬러올라와공미(貢米)를광흥창에풀어입고시켰다.또백관의봉록을이곳에서지급하기도하였다.따라서이곳광흥창을중심으로많은관리들의가솔이모여살게되어‘서강서반(西江西班)’이란말도생기고취락지로발달하였다.

3)공민왕사당(恭愍王祠堂)

공민왕사당은와우산동남쪽산기슭의창전동산2번지광흥창즉태창터뒤에지정보호수로지정된오래된느티나무에둘러싸여있다.공민왕사당의유래에대해서는조선초까지거슬러올라가는옛일로서,광흥창이설치되고이어공민왕사당이세워진것으로다음과같은이야기가전해오고있다.서강나루가까이설치한광흥창에착실한고지기가있었다.어느당직날그가잠시벽에기대어졸고있는사이에꿈을꾸었다.

위엄있는의장을갖춘행차가이르러모시고온관원가운데한사람이앞으로나서면서“이어른은고려조의공민왕이시다.부복하여삼가말씀을받들거라”하였다.고지기는몸둘바를모르다가땅바닥에납짝엎드리니공민왕은“과인이젊었을때여기에와저훌륭한서강의풍경을관상한일이있었느니라.이제지나가는길에실로오래간만에다시찾아와보니과연서호팔경은여전히아름답구나.마침성실한너를만났으므로한마디이르노니,다음부터과인이여기오면잠시쉬어갈자리를저언덕위에마련하도록하라.

그러면마을이크게번창하고평안하리라”하는것이었다.꿈에서깨어난고지기는비록꿈이기는하나생시나다름없이너무도뚜렷하여지체하지않고임금이가리키던지금의창전동산2번지언덕위에와보니왕의영정이있어사당을마련하였다한다.그후부터매년음력10월1일자시(子時)에제사를성대히지내왔는데,제사가소홀하거나불경사가있으면창고에화재가나는등재난이뒤따랐다.

사당안에는공민왕과왕비인노국공주,왕을호위하는충신최영장군의영정과왕자·공주·옹주등의화상이있다.그앞에는신당우물이있는데동네사람들이최근까지식수로사용하였다.이신당우물은상수동의당우물·왜우물과더불어서강3대우물로유명하였다.

4)창전동부군당(倉前洞府君堂)

와우산남쪽정상가까이창전동산2번지에위치한창전동부군당은서강시민아파트모퉁이에위태롭게자리잡고있다.이는1968년에한강개발로밤섬을폭파하게되자밤섬주민들이창전동으로이주해올때현재의위치로옮겨모셔온신당이다.따라서부군당이처음설치된곳은밤섬으로약400∼500년전에밤섬에사람이살기시작하면서당(堂)이있었던것으로보인다.창전동부군당제는음력12월6일에모여회의를하고소임과도가를뽑는다.매년정월초이튿날유시(酉時)에밤섬이주주민40여가구가무당을초청하여제사를지내며부군할아버지에게새해의풍년과복을비는마을굿거리를한다.

4.홍익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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