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제1호숭례문복원위해20여그루벌채
“어명이오!”외쳐나무에게벨수밖에없음을알려
지난호에서조선태조이성계의5대조인목조(穆祖)이안사(李安社)가정적을피해전주에서삼척으로이주한후,아버지이양무가죽자명당자리를찾았고,어떤스님의말을듣고준경묘를쓰게된사연을이야기했다.이안사는아버지를여의고명당의음택을차지하기는했지만여전히상황이나아지지않았다.풍수로보면발복이바로나타나지는않았던모양이다.
고려말에는삼면의바다에왜구들이들끓었다.왜구의침입이빈번해지자고려는중앙군을파견하긴했지만모든지역에손길이미치지못하였다.그래서지방에서는일종의향토군인민병들이자체방어에나서곤했다.
이안사가자리잡은삼척에도왜구들의침탈이잇따랐다.이안사는배15척을만들어왜구를방비했다.얼마후원나라야굴이여러고을을침략하니두타산성을지켜서난리를피하였다(朝鮮王朝實錄).이안사가배를15척이나만들었다는기록을보면이주민이긴하지만상당한세력을가지고있었던것으로추측된다.하지만필자의견해로는아마관민합동으로배를만들었고이안사가지휘를맡았을것으로판단된다.
어쨌든이안사는삼척에서상당한세력권을형성하고있었는데,이번에는또다시전주에서부닥친산성별감이새로안렴사(按廉使:안찰사·지방5도의장관)가되어삼척지방에온다는이야기를듣게되었다.기구한운명이었다.화가미칠까두려워진이안사는동북면의주로이주했다.이때도170호가또따라갔다.
역사에대한해석은결과론적이지만이안사의동북면의주는중요한의미를지닌다.훗날이성계가그곳에서독자적인세력을구축하는데단초를제공했기때문이다.
이안사가원나라에귀순한이후그자손들은원나라에서살았다.이안사의아들행리,손자춘이대대로원나라의관리를지냈다.춘의아들이자춘(이성계의아버지)도원나라쌍성총관부의천호(千戶)로있었다.
그러나
1392년동북면세력을바탕으로이성계가조선을세우고왕이되자,왕가에서는선조들의묘를찾고자하였다.그러나이안사에서이자춘에이르기까지수대를고려에왕래하지못하였으므로이양무의묘를도저히찾을수없었다.
조선을창건한태조이성계는삼척군을목조이안사의외향(外鄕)이며선대묘가안치된곳이라하여군(郡)에서부(府)로승격시키고홍서대(紅犀帶)를하사하였다.
태조의노력에도불구하고이양무의묘는오랜세월돌보지않았기때문에실묘(失墓)되고말았다.제왕의명령을하늘같이받들고조상을모시는일이중했던시절,선조의묘를찾지못하는것은매우불경스러웠다.그래서태조,태종,세종등역대왕들은이양무의묘를찾기위하여부단히노력하였다.
이런노력끝에
이곳은두메산골깊숙한곳인데논밭과뽕밭이있고이지방사람들이댁기(宅基)댁전(宅田)이라불렸는데예로부터전해진이야기다”라고기록돼있다.또한<어사홍서대기적(御賜紅犀帶記蹟)>을보면성종19년(1488년)에왕명에의하여묘를수축하려다중단하였고,명종2년(1555년)에는양묘(兩墓)에수호군을각기2명씩두었다.선조13년(1580년)에는양묘를개축하였다고적혀있다.
하지만그렇게애써찾은묘는복잡한사정으로선조의묘로확정하지못하였다.그후태백황지,안동등에양묘가있다하여관리들을보내탐문수색하였으나증거를찾을수없었다.그러다가고종35년(1898년)에양묘를확정하고대대적인묘역정비공사를실시했다.두곳의묘는3,300척으로경계를정하고제각을건축하였다.묘비와부속건물도갖추었다.
그동안준경묘·영경묘의소나무는왕실과국가에서보호·관리해왔기때문에잘자랄수있었다.그러나국가의주요문화재를복원할때마다벌채1순위로지목되곤했다.주요문화재복원에다른나무를쓸경우내구성에심각한문제가있음이드러났기때문이다.
2002~2004년경복궁근정전보수공사를할때,조사한바에따르면근정전주기둥4개가운데온전히보존된것은단한개에불과했다.그것은소나무였으며,전나무를쓴세개의기둥은모두썩어있었다.고종4년(1867)경복궁중건당시,고작11m짜리소나무를구하지못해강도가한참떨어지는전나무를쓴결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