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척 준경묘 소나무 (2) *-

[김규의나무기행]강원도삼척준경묘소나무(2)

국보제1호숭례문복원위해20여그루벌채
“어명이오!”외쳐나무에게벨수밖에없음을알려

지난호에서조선태조이성계의5대조인목조(穆祖)이안사(李安社)가정적을피해전주에서삼척으로이주한후,아버지이양무가죽자명당자리를찾았고,어떤스님의말을듣고준경묘를쓰게된사연을이야기했다.이안사는아버지를여의고명당의음택을차지하기는했지만여전히상황이나아지지않았다.풍수로보면발복이바로나타나지는않았던모양이다.

다시의주로도피한이안사

고려말에는삼면의바다에왜구들이들끓었다.왜구의침입이빈번해지자고려는중앙군을파견하긴했지만모든지역에손길이미치지못하였다.그래서지방에서는일종의향토군인민병들이자체방어에나서곤했다.

이안사가자리잡은삼척에도왜구들의침탈이잇따랐다.이안사는배15척을만들어왜구를방비했다.얼마후원나라야굴이여러고을을침략하니두타산성을지켜서난리를피하였다(朝鮮王朝實錄).이안사가배를15척이나만들었다는기록을보면이주민이긴하지만상당한세력을가지고있었던것으로추측된다.하지만필자의견해로는아마관민합동으로배를만들었고이안사가지휘를맡았을것으로판단된다.

▲1혼례소나무옆의쭉뻗은미인송들.2거북등처럼갈라져건강한소나무수피.

어쨌든이안사는삼척에서상당한세력권을형성하고있었는데,이번에는또다시전주에서부닥친산성별감이새로안렴사(按廉使:안찰사·지방5도의장관)가되어삼척지방에온다는이야기를듣게되었다.기구한운명이었다.화가미칠까두려워진이안사는동북면의주로이주했다.이때도170호가또따라갔다.

역사에대한해석은결과론적이지만이안사의동북면의주는중요한의미를지닌다.훗날이성계가그곳에서독자적인세력을구축하는데단초를제공했기때문이다.이안사가의주에정착하자고려에서는이안사를의주병마사로삼아원나라군사를방어하게하였다.이때원나라산길대왕이쌍성(영흥)에둔을치고철령이북을취하려고하였다.그는싸움을거는대신사람을두번이나보내어원나라에항복하라하자이안사는1000호를거느리고항복(고려고종41년,1254년)하고말았다.

이안사가원나라에귀순한이후그자손들은원나라에서살았다.이안사의아들행리,손자춘이대대로원나라의관리를지냈다.춘의아들이자춘(이성계의아버지)도원나라쌍성총관부의천호(千戶)로있었다.

▲정이품송혼례소나무.

그러나이자춘은원이고려출신이주민들에게차별정책을실시하자점차원에회의를품기시작했다.당시중국에서는주원장이명을일으켜원은명에의해중원에서밀려나고있는형국이었다.원의힘이약화되자공민왕은반원정책을실시하여동북면의쌍성총관부와긴밀한관계가있던기씨세력을제거하려했고,이를위하여동북면유민들의힘이필요하다고판단하였다.

이자춘은공민왕의이런의도를간파하고1355년공민왕을만나고려가쌍성총관부를치면자신이돕겠다고약속한다.그이듬해이자춘은아들성계와함께고려의쌍성총관부공략을도와99년만에실지를회복하는데일익을담당했다.이때의공적으로이자춘은대중대부사복경이되어개경으로이주했다.그러나1년뒤인1356년삭방도만호겸병마사로임명되어다시동북면으로돌아가일대를장악한다.

묘를잃어버리다

1392년동북면세력을바탕으로이성계가조선을세우고왕이되자,왕가에서는선조들의묘를찾고자하였다.그러나이안사에서이자춘에이르기까지수대를고려에왕래하지못하였으므로이양무의묘를도저히찾을수없었다.

조선을창건한태조이성계는삼척군을목조이안사의외향(外鄕)이며선대묘가안치된곳이라하여군(郡)에서부(府)로승격시키고홍서대(紅犀帶)를하사하였다.홍서대는길이1.2m,폭3.5cm의붉은빛이나는허리띠다.한때실전되었으나영조23년(1753년)에다시발견되어영조는이를친견하고국가의유물로정하였다.

태조의노력에도불구하고이양무의묘는오랜세월돌보지않았기때문에실묘(失墓)되고말았다.제왕의명령을하늘같이받들고조상을모시는일이중했던시절,선조의묘를찾지못하는것은매우불경스러웠다.그래서태조,태종,세종등역대왕들은이양무의묘를찾기위하여부단히노력하였다.

▲영경묘역의소나무도아주빼어난금강송들이다.

이런노력끝에세종대에이르러이양무의묘를찾게되었다.삼척주지(三陟州誌)에는“옛날호장(戶長)김윤식이소장하였던고적(古蹟)에의하면세종29년(1447년)10월,강원감사이심과도사(都事)황효원,삼척부사이윤손등이어명으로묘를찾고있을때,그지역에살던촌로고봉생,조흥보,최산봉등이자료를제공하기를목조황고묘(穆祖皇古墓)는노동(蘆洞)에있고,황비묘(皇妃墓)는동산(東山)에있으며삼척부에서40리쯤떨어진활기동에목조가살던구거지(舊居地)가남아있다고증언하였다.

이곳은두메산골깊숙한곳인데논밭과뽕밭이있고이지방사람들이댁기(宅基)댁전(宅田)이라불렸는데예로부터전해진이야기다”라고기록돼있다.또한<어사홍서대기적(御賜紅犀帶記蹟)>을보면성종19년(1488년)에왕명에의하여묘를수축하려다중단하였고,명종2년(1555년)에는양묘(兩墓)에수호군을각기2명씩두었다.선조13년(1580년)에는양묘를개축하였다고적혀있다.

하지만그렇게애써찾은묘는복잡한사정으로선조의묘로확정하지못하였다.그후태백황지,안동등에양묘가있다하여관리들을보내탐문수색하였으나증거를찾을수없었다.그러다가고종35년(1898년)에양묘를확정하고대대적인묘역정비공사를실시했다.두곳의묘는3,300척으로경계를정하고제각을건축하였다.묘비와부속건물도갖추었다.

이양무의묘를준경묘(濬慶墓)라하고,부인의묘를영경묘(永慶墓)라정했다.1년후인1899년에는활기리99번지에제실을축조하고목조의사적비를세웠다.상임수호군4명을배치하여양묘를수호하게하고매년청명일에제향토록하였다.이양무가묻힌해를1232년으로추정하면1899년묘비가세워지기까지667년의세월이흐른셈이다.왕실의묘를이렇게오랜세월만에찾은것은아주드문일이라하겠다.

문화재복원용목재1순위소나무

왕실이무너진후,준경묘·영경묘는1960년전주이씨대동종약원·준경묘영경묘봉향회가설립되어매년4월20일제향하고있다.1981년8월5일에는강원도기념물제43호로지정되었다.묘역주변은국유림으로산림청에서관리해왔다.산림청과별도로문화재청은지난10년간국유림준경묘의조림사업에40억원을투입한바있다.

그동안준경묘·영경묘의소나무는왕실과국가에서보호·관리해왔기때문에잘자랄수있었다.그러나국가의주요문화재를복원할때마다벌채1순위로지목되곤했다.주요문화재복원에다른나무를쓸경우내구성에심각한문제가있음이드러났기때문이다.

2002~2004년경복궁근정전보수공사를할때,조사한바에따르면근정전주기둥4개가운데온전히보존된것은단한개에불과했다.그것은소나무였으며,전나무를쓴세개의기둥은모두썩어있었다.고종4년(1867)경복궁중건당시,고작11m짜리소나무를구하지못해강도가한참떨어지는전나무를쓴결과였다.그래서문화재보존에는우리소나무를써야한다는것이철칙으로되어있다.

▲하사전리의영경묘제실은중수중이었다.

준경묘는1961년숭례문해체복원때도가장큰소나무였던‘장수솔’을대들보로바쳤다.2006년에는문화재청이광화문복원용으로이곳소나무를쓰려다전주이씨대동종약원·준경묘영경묘봉향회와지역주민의반대에부딪쳤다.반대가심하자문화재청은한발물러섰다.그러나산림전문가들은준경묘숲은너무빽빽하게나무가들어서있고,병에취약해간벌차원에서도어느정도베어내는게숲의생태에바람직하다고입을모은다.

2008년2월방화로국보1호숭례문이완전소실되고복원문제가떠오르자봉향회와주민들이3차례회의를거듭한끝에벌채를허락했다.국보1호복원에동참한다는뜻이었다.그래서숭례문복원에사용될소나무20그루가2008년12월10일준경묘에서벌채되었다.

“어명이오!”

문화재청장,종약원,봉향회관계자등은벌채될소나무의영혼을달래는고유제,산신제등의벌채의식을지낸후벌목을했다.‘어명’을반복하는것은임금의명에따라궁궐재목으로쓸나무를벨수밖에없는사정을알려나무의원혼을달래주려는마음이담겨있다.

당시벌목된나무는키32m,주지름74cm의곧게자란110세금강송이었다.현재지름이60cm를넘는궁궐재목은3000여그루밖에안되는것으로조사되었다.

우리나라에서가장아름다운소나무

준경묘역에서놓치지말아야나무는2001년산림청이정한‘우리나라에서가장아름다운소나무’다.이소나무는준경묘역입구오른쪽비탈에는서있는데,필자는이나무를보자마자“헉!”하는비명을내질렀다.한마디로숨이막혔다.

수고30여m의쭉뻗은소나무는조금의뒤틀림도없이하늘을향해곧게뻗어있었다.수피는거북등껍질처럼건강하게갈라져있었고둘레는두아름가량이나되었다.고개를쳐들고상부의나뭇잎을보니여전히푸르고건강해보였다.전형적인미인송(美人松)이었다.사람들은쭉뻗은미인에눈을박지만필자는이미인송에감탄하여정말눈을뗄수없었다.이나무의연유는이렇다.

산림청임업연구원은고령화로점점약해져가는충북보은군의정이품송(천연기념물제103호)의혈통보존을위한배필소나무를구하기위해전국의소나무를뒤졌다.그결과준경묘역의소나무를간택했다.이소나무는임업연구원이10여년에걸친연구결과와수형(樹形),건강도등을고려해간택한나이당시95세,키32m,가슴둘레214㎝의빼어난용모를지닌소나무였다.

미인송의선발기준은곧은몸통,큰키,지면에서맨아래가지에서지면까지의높이(枝下高·지하고라하며높을수록더좋다)등을들수있다.준경묘역의이소나무는누가보아도토를달수없는빼어난미인송임에틀림없었다.

▲영경묘는비탈에있어명당이라는느낌은없다.

2001년5월8일,준경묘역에서는산림청,문화재청,보은군,삼척시등관계자200여명이참석한가운데‘속리산정이품송혈통보존을위한혼례식’을가졌다.신순우(申洵雨)당시산림청장의집례로진행된혼례식에서는정이품송(신랑목)에서채취한송홧가루(화분)를준경릉소나무(신부목)암꽃에묻히는방합례(房合禮)를거행했다.그후임업연구원은정이품송준경묘혈통의2세소나무를얻었다.

한편정이품송은혈통보존을위해2002년충북보은군외속리면서원리에있는‘서원리소나무(일명정부인소나무·천연기념물제352호)’와‘합궁(合宮·인공수정)’하기도했다.서원리소나무는높이15m,둘레3.3m,수령600년이며지상80㎝높이에서두갈래로갈라져있고풍성하게퍼져한복을곱게차려입은조선여인을연상케한다고해서‘정부인송(正婦人松)’으로도불린다.

준경묘역에는이혼례소나무와함께곧게뻗은미인송수십그루가자라고있는데,우리의토종자원으로잘보호해야할것이다.준경묘에서3.6km떨어진미로면하사전리에는이양무의부인이씨의묘인영경묘가있다.영경묘는오십천지류언덕바지에있는데하사전리역시예전에는화전민이나살았을법한골짜기마을이다.

역시빼어난영경묘역의소나무

영경묘는준경묘와역사를같이하며보존되어왔고,그때문에묘역의소나무도잘보호되어왔다.이곳에도수만그루의소나무가울창한숲을이루어잘자라고있다.하지만비탈이심하고체계적인간벌을하지않아다소방치된느낌이었다.넝쿨식물들도무성하여소나무의생장에방해가되지않을까걱정되었다.

각종조사에의하면한반도에서소나무가점점사라진다고한다.현재서울을비롯한도시에서는소나무를가로수로많이식재하고있는데이는자원낭비라생각한다.계절에비해온도가높은도시에서는소나무가잘적응하지못해가로수로는부적절하다.오래못가죽을것이분명하다.아까운나무와돈을도시에서낭비할것이아니라숲속에있는소나무보호에예산을집중해야할것이다.

필자/김규/중앙대에서문학과커뮤니케이션을공부했으며,

문화일보신춘문예(시)에당선됐다.중앙대·한서대등에서강의하고있다.

/월간산12월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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