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그해겨울은유난히추웠다.의대본과생이었던영준과영화,그리고또다른친구한명은그추운겨울을지리산정상에서보내기로의기투합했다.목표는2박3일걸려노고단까지가는것.동네뒷산에올라본경험이전부인이들은천왕봉에서의미있는한해를마무리하기위해남다른각오를다졌다.
각자배낭을꾸리기시작했다.그때까지지리산도동네뒷산같이오르면되는줄알았다.아이젠이뭔지도,그런게있는줄도몰랐다.젊은혈기라는가장큰무기하나에과자와사탕만잔뜩넣은배낭,장비라곤춘추용침낭하나와허접한버너정도.지리산을종주하는팀의모습이라곤어디에도찾아볼수없었다.침낭도혹시나해서가져간것이었다.
“그래도겨울산행인데침낭하나로괜찮을까?”
“걱정하지마,산장에서잘건데침낭은필요없어.”
“산장에서불편해잠이안오면밤새화투나치지뭐.그래서동양화는챙겨왔어,걱정마.”
조금은꺼림칙했지만‘아무일없겠지’라고자위하며천왕봉을향해출발했다.중산리에서출발한지얼마지나지않아로터리산장에도착했다.마침힘도들고조금쉬기로했다.산장주인은이들의행색이아무래도미덥지않은듯고개를갸우뚱하며퉁명스럽게물었다.
“어디로해서어디까지갈계획이요?”
“천왕봉을거쳐2박이상걸리더라도노고단까지갈예정입니다.”
어이없는표정을지으며산장주인은“아이젠과침낭은가져왔어요?”라고물었다.
“예?아이젠이뭡니까?그건어디에쓰는겁니까?”
기가막혀말이안나오는듯“아이젠없이겨울산을오르다미끄러져사고당하거나죽기십상이니죽지않으려면그냥집으로돌아가요”라고산장주인은단호하게말했다.하지만이들은‘얼마나벼르고왔는데그냥돌아갈순없지’라며젊은혈기로다시의지를다지는객기를부렸다.“그래도혹시모르니아이젠은준비하자”고뜻을모아하산하는등산객들을상대로이리저리훑어보며읍소작전에들어갔다.
“혹시아이젠있으세요?있으면저희들한테파세요.”
이들은남이신던아이젠을당시로선거금인3,000원을주고마련해서천왕봉으로오르기시작했다.지리산8부능선까지는아무일없었다.‘별것아닌걸가지고괜한사람겁주고난리들이야’라며호기를부리기까지했다.날씨가너무맑아주변설경은한폭의그림을보는것같이감동적이었다.
그러나이들의호기가통한것은거기까지였다.오후5시쯤되었을까,천왕봉150m남았다는이정표를보는순간갑자기하늘이시커멓게변하면서눈보라가휘날렸다.불과몇미터앞을분간할수없을정도였다.모두겁이덜컥났다.
빙판과눈으로뒤덮인등산로는그나마겨우장만한아이젠으로조심조심지나갈수있었다.아마아이젠이없었다면꼼짝달싹못했을것이다.눈발이계속휘날려길은점점사라지는듯했다.원래계획은‘천왕봉정상에서앞으로살아갈사나이들의기개를논하자’는다짐이었건만천왕봉까지올라가는길조차만만치않았다.
미끄러운등산로를엉금엉금기듯올라가,겁에질린표정으로천왕봉비석을안고사진한장달랑찍고바로장터목산장으로하산했다.사나이기개를논하기는커녕다들공포에질린표정들이었다.
그새날은어두워져깜깜한밤이됐다.호롱불비슷한랜턴으로겨우장터목산장을찾아내려왔다.‘그나마이것마저없었다면어떻게됐을까’라고생각하니아찔했다.산장의온도계는영하20℃를가리켰다.이빨이덜덜떨리고재킷도변변찮았다.
모골이송연해지는상황은계속됐다.산장에가본적이없었던이들은산장이도시의여관이나여인숙쯤되는줄착각하고있었다.돈만내면따뜻한아랫목에편히쉴줄알았지만,실제는군내무반같은마룻바닥에살을에는찬바람이뼛속까지스며드는곳인줄꿈에도몰랐다.
밤새고스톱을치면서몸에열기를내자고했다.막판을벌이려는순간“밤9시부터소등이니등산객들은미리짐을정리하시기바랍니다”라는방송이들려왔다.가져온짐이있어야정리하고취침준비를하지….
뻘줌하게떨고있는이들을발견한산장지기가다가와“잘준비안하고뭐하고들있어요?”라고채근했다.
“저,그게사실은…,저희는준비한게없어서……”
“서울대학생들이왜이리무식해.다시는산근처에절대얼씬거리지말아.”
호통치며10여년동안한번도빨지않은듯한걸레같은조난자용이불을건네줬다.실제로이들은조난자급이었다.그것도감지덕지하게받아지리산에서그추운겨울날의하룻밤을보냈다.다음날산의노여움을더사기전에빨리내려가는게좋겠다고합의하고,지리산종주는커녕능선도제대로쳐다보지않고곧바로내려왔다.하산길에젊은혈기는비닐을주워눈썰매를타는추억도만들었다.
바로23년전엘비뇨기과윤영화원장과김영준소아청소년과의원김영준원장이겪은일이다.지금은무용담처럼웃으며얘기하지만자칫신문사회면한쪽을장식할수도있었던그런날의추억이다.
고통이클수록추억은그만큼깊고오래가는법.이들은지리산에서의첫산행이영원히잊을수없고,잊혀질수없는아찔한순간이었다고말한다.
그생생한기억을교훈삼아윤원장은서울은평구비뇨기과의사들사이에서‘빨치산산꾼’으로불릴정도의준족으로변신했다.모두김원장덕분이다.김원장은산뿐만이아니라수영·마라톤등만능스포츠맨으로바쁜나날을보내고있다.
산은이들을묶는끈이지만산이아니더라도둘의인연은계속됐다.인턴과레지던트과정을똑같이거치며월급쟁이의사로있다가전문의로개업하기까지산은조금떨어져있을수밖에없었지만워낙비슷한성향인지라만남은지속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