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비를 따라 산을 오르다’ *-

[화제]조선선비들은왜산에올랐을까?

입산은‘超道(초도)거쳐동천이르는길’로여겨
<선비를따라산을오르다>의저자나종면박사에게듣는산이야기

조선시대의선비들은왜,어떤자세로,어떻게산에올랐을까?등산할때지금과다른점은무엇이고,당시선비들이산에갈때가지고갔던것은또어떤것들이있을까?

매년등산객이크게증가하는요즘과거선비와평민들의등산형태를지금상황과비교해보면여러재미있는유사점과차이점을발견할수있을것이다.서울대규장각한국학연구원이었고유도회(儒道會)협동번역사업책임연구원으로있는나종면(55)박사와같이북한산에오르며그가쓴책<선비를따라산을오르다>에대해얘기를듣고,과거와지금의등산행태에대한의견을들어봤다.

조선의선비들에게입산은영(靈)의응결처를경험하는것이고,정신적자유의실현으로봤다.당시까지만해도산에영(靈)이있어심신이허약한사람은도깨비나귀신에홀리므로입산해서는안된다고여겼다.특별히선택된사람만이들어갈수있는공간이었다.따라서산은현실세계(속세)의연장이아니라또다른세계였다.입산하는사람은속세의허상을버리고정화된신성한공간으로들어간다는의미로간주했다.

선비들에게입산은산의입구에서부터시작된다.평지와산이만나는접점,즉산의입구를초도(超道)라불렀다.이는속세의질긴인연을뛰어넘는것으로부터올바른수양이시작된다고봤기때문이다.오감을억지로차단하지않아도초도를건너는것자체가외부를차단하며끊는것이다.산에들어가신선한기운을받아들여몸에축척하면호연지기가저절로이루어질수밖에없다는의미였다.

▲송음진하,여름날솔그늘에서더위를식히는장면.나박사의책에나오는용인대백범영교수의그림이다.
산입구가현실과이상의경계인초도

선비들의입산에대한의미는조호익(1545~1609년)의<유향풍산록(遊香楓山錄)>에잘나와있다.‘푸른산두른속에작은동천열렸는데/저멀리골짝에서물흐르는소리오네/숲사이로걸어가자구름가리나니/산밖의풍진세상몇겹이나막히었나’

동천(洞天)은속세와다른신선이사는세계다.그는산을동천으로파악함으로써깨달음이초도를넘는순간갑작스럽게이루어진다고봤다.초도는현실세계와이상세계의경계이며분기점이다.다시말해초도를통과하자마자저절로동천에이른다는것이다.

선비들이그렇다고신선의세계만머무른것은아니다.동천에서발을딛고세속을돌아보니얽히고설킨인연이몇겹이나보였다.이는선비들이초도를비장하게건너산에들어가‘속세의부정’을겪고난후다시‘속세의부정’을부정하고속세로돌아오는순환과정을거친다.결국선비들은세상을버리지않았고떠나지않았던것이다.

조선시대에선비들만산에갔던건아니다.평민과하인들도갔다.그러나목적과사회적배경이달랐다.목적이다르면행위의의미가달라지는것이다.평민과하인은하나의노동행위로산에갔고,선비들은수행과유람으로산에갔다.

선비들의입산이수양과수행의측면인정신적행위에가까웠다는점에서는요즘등산행위와사뭇다르다.요즘은일상의스트레스해소와건강증진이주목적이며,정신과육체가둘이아니고구분도안된다.현대인들에게등산은속세와선계를구분하는이분법으로존재하는것이아니라도시생활을연장시켜주는하나의수단과도구의공간으로존재한다.과거선비들이가졌던산의이상성이나고결성을잃은데반해산의현실성과친근성을얻은셈이다.

재미있는사실은선비들이산에갈때오늘날과다른여러가지준비와지참물을가져갔다는점이다.첫째재계(齋戒)를했다.부추나마늘등과같은오신채(五辛菜,마늘·달래·무릇·김장파·실파와같은자극성있는다섯가지채소류)나비린내나는물고기등을먹지않고속된사람들과교류를삼갔다.재계하는기간은7일또는100일등으로잡았다.

둘째,산에들어가는날짜는길흉에따라취사선택했다.나쁜날에입산하면도사라고해도호랑이나늑대,또는독충등의피해를입을수있어수행을망친다고여겼다.

셋째,우보법(牛步法)에통달해야했다.

▲나종면박사가그가쓴책에그림을그린용인대백범영교수와산행을하다,잠시휴식을취하며커피를마시고있다.사진김승완기자
이처럼준비를마친입산예정자가꼭챙겼던것은다름아닌거울과부적이다.거울은단장용이라기보다는선비들의신분과시용이었고,다른한편으로는부적과같은역할을했을것으로추정된다.

부적은영묘하고불가사의한힘을가져귀신뿐만아니라맹수나독충까지도물리칠수있다고믿었다.부적은입산목적에따라여러종류가있다.영지를캐러갈때는영보부(靈寶符)라는부적을지니고,흰개와흰닭,하얀소금한말을꼭챙겨갔다고기록에남아있다.

일반산행인경우는승산부(乘山符)를가지고갔다.오악진형도라는부적을가지고가면바위나나무의도깨비,산이나하천의정령도사람을범하지않는다고여겼다.

산중에서약을만들때는노군입산부(老君入山符)를챙겼다.이는복숭아나무판자위에붉은글씨로부적문자를가득차도록크게써놓은것이다.집이나문,실내의사방모서리나도로의요소요소에붙여놓으면그곳을기준으로50보이내에는도깨비나
산의정령따위가침입할수없다고한다.

그외에도맹수의침입을방지하기위한부적,살모사를물리치기위한부적등종류가매우다양하다.이는산에올라가는목적이꼭수양과수행만이아니었던점도고려되었던것으로보인다.

나박사의책에언급된선비들은문무자이옥,월사이정구,번암채제공,미수허목,율곡이이,해좌정범조,삼연김창흡,수당이남규,아계이산해,남명조식,한강정구,퇴계이황,면암최익현,어당이상수,지산조호익,보만재서명응등조선시대를대표하는사대부들이다.방내와방외를가리지않고두루산에올랐고,그들이남긴기록을정리했다.

▲나종면박사의책에나오는용인대백범영교수의그림이다.운해,땅에도바다가있고,하늘에도바다가있다.땅의바다는무엇이든받아들이지만하늘의바다는무엇이든다덮는다(왼쪽).추월만공산,만산이다스러진비산을채우는것은가을의환한보름달뿐이다.그림용인대백범영교수(오른쪽).
산행갈때거울과부적은꼭챙겨

나박사가조선선비들의산행에관심을가지된계기는1985년서른의나이에뒤늦게대학에들어가한국문학을배우기시작하면서비롯된다.당시어느강의에서사마천의<史記(사기)>‘봉선서’편을인용하면서천자와태산의관계에대해배웠다.대충의내용은‘황제가태산에올라봉선을행하고,기이한물건에치성을올려신과통하고자한다’는내용이었다.이를통해입산이란문제는현실세계와이상세계의대척점에서이해해야하고,특정한산은특정한인물만이들어갈수있었던것으로짐작했다.이일이‘옛사람의명산유람을어떻게이해하고연구할까’라는문제의식을가지는결정적계기가됐다.

그후공부를하면서조선시대선비들이우리산천을유람하고‘遊記(유기)’라는작품을아주많이남긴사실을알게됐고,2000년들어서부터본격글을쓰기시작했다.이어‘숲과문화연구회’에서발간하는<숲과문화>에선비들의산과수양에관한내용으로4년여글을쓰면서완성하기에이르렀다.

그는책을쓰는틈틈이산에다니는일도빼놓지않았다.그는부인과용인대백범영교수,세종대이경룡교수등과함께산에간다.주로부인과함께가지만디른이들과시간이맞으면언제든지같이등산할준비는돼있다.그의집도북한산지산인아미산언저리에있다.이른바초도에걸쳐있는것이다.언제든세속을벗어나선의세계로들어갈수있는경계에살고있다.

그는이들과함께한달에한두번밖에산에못가지만우리등산문화가이젠대중문화에서고급문화로한단계업그레이드할때가됐다고판단한다.1,500만명을넘어서2,000만명을바라보는등산인구가‘양질전화(良質轉化)’할때가됐다는것이다.양적팽창은질적성장을가져온다는법칙을굳이들먹이지않더라도등산객스스로자연과환경을생각하는고급문화를주도할시기라고판단한다.지금일고있는‘둘레길붐’도그일환이지않나싶다고한다.

그는선비들의산행문화에그치지않고,앞으로고려와조선시대십승지와선비들의음식과운동등에관한책도계속발간할계획이다.십승지는직접현장을답사한뒤완성할것이며,접근하면할수록풍수에더욱더매료되고있다고덧붙였다.과거문헌과기록을통해과연선비들의문화가어느정도그의요리솜씨를통해대중의입맛에맞아떨어질지자못궁금하다.

-글박정원부장대우/월간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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