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히말라야 등정 의혹 약사 정리 [1] *-

[초점]마운틴포럼,1970년추렌히말이후한국히말라야등정의혹약사정리

덕성보다더중요한것은진실이다.

마운틴포럼(제3호·부산산악포럼)이그간일부산악인들에의해제기돼온한국히말라야등정의혹에대한심층기사를특집으로실었다.1월19일발간된연감은지난해‘여성세계최초8,000m14개고봉완등’을공표한오은선의캉첸중가등정의혹에대해심층분석한특집을싣는한편총50쪽분량의‘국내외등정의혹사례’편에서는1970년추렌히말을비롯,등정의혹을사고있는한국원정등반들에대해전반적으로다루었다.이부분을발췌,또는일부요약해싣는다.본지는오은선의캉첸중가등정의혹에대해서는이미2010년10월호에자세한분석기사를게재한바있다.<월간산편집자주>
▲거대한눈사태에휩싸인안나푸르나북면.1984년은벽산악회는여성동계초등정을발표했으나등정사진을내놓지못해훗날중앙봉동계초등으로기록되고말았다.

한국최초의등정시비‘1970년추렌히말’


한국히말라야등반사상최초의등정의혹은1970년창립25주년을맞아추렌히말(7,371m·최고봉동봉)에도전한한국산악회원정대(대장김정섭)다.추렌히말은네팔히말라야서부다울라기리산군에위치한준봉으로같은높이(7,371m)의동봉,중앙봉,서봉세개봉으로이루어져있다.이산에한국대가도전하기전에일본(1962년)과이탈리아대(1969년)에의해중앙봉만이두차례도전을받았으나정상을허락하지않은채미등봉으로남아있었다.

당시원정대는김호섭(25)부대장과고소포터린지왕겔셰르파가4월29일처녀봉인추렌히말동봉(7,371m)을초등했다는소식을외신을통해국내에전했으나같은해가을시즌남동벽으로중앙봉초등에성공한일본의정강대(靜岡大)팀은“한국대의등정을믿지만6,300m지점에서동봉에도달하는것은불가능하며동봉상의7,000m에서만등정이가능하다”며등정의혹을제기한다.

이의혹은일본산악전문지‘岳人’(1970년11월호)과<월간山>전신인‘등산’(1970년12월호)양산악전문지를통해갑론을박의논쟁이이어지다가1971,1972년김정섭대장의친동생인김기섭,김호섭형제가마나슬루에서조난사하면서잠시묻히고말았다.

▲1988년추렌히말동봉정상에오른중동산악회대원.1970년한국산악회팀의등정의혹을마무리짓는등반이었다.

이의혹은1987년에이어1988년추렌히말재등반에나선중동산악회원정대에의해풀렸다.중동팀이확인한동릉마지막구간은양쪽이천여길절벽인데다길이가무려1km에이르는험난한칼날설릉이었다.중동산악회는루트를바꾸어정상에올라선뒤한국산악회팀이오른봉이동봉아래무명봉일가능성이높다고단정지었다.

1971,1972,1976년세번의도전에서16명의희생자가나와한국인에게는‘비운의산’으로각인됐던마나슬루(8,163m)가1980년봄동국대팀에게정상을허락한다.1976년일본대등정이후4년만에정상에오른동국대팀은마나슬루한국초등,국내두번째8,000m급등정,대학산악부국내최초8,000m급등정등뛰어난등정성과로알려졌다.

그러나3년이지난1983년가을마나슬루단독등정에성공한허영호는동국대가오른봉우리는정상이아니라고이의를제기한다.허영호가등정길에촬영한마나슬루전위봉의사진이3년전동국대팀이정상이라주장한암봉과흡사하게보였기때문이다.

동국대마나슬루등정에대한허영호의시비


이러한의혹은공개적으로제기된것이아니었기때문에동국산악회는의문자체를일축해오다가1992년4월발간된‘동국산악’제6호에서정상등정을강력히주장했다.동국산악회는‘마나슬루등정을재천명한다’는글을통해산악계에음성적으로떠돌고있는‘14개팀의혹설’(1990년9월,현대한산악연맹김병준감사가산악전문지에기고한‘의혹청산외치는시대적요청에부응하여등정의혹14팀을밝힌다’칼럼내용)에1980년마나슬루등정도포함돼있음이이글을발표하게된동기임을밝히고,1984년1월남벽을통해마나슬루를동계초등한폴란드팀이정상부에서동국대의깃발을가져온사실이확인됐다고밝혔다.

당시폴란드팀은정상30여m아래지점에서동국대팀이놓고내려온깃발과카라비너를발견했다.그리고‘사진에나타난정상암부가8,163m의거대한봉우리의꼭대기중에서도극히작은부분인점을염두에두어야한다’면서좁은바위끝에올라서지않았다고해서정상이아니라고하는것은상식밖이라고주장했다.이로써6년에걸친등정시비는허영호의완패로끝을맺었다.

1984년은벽산악회안나푸르나동계초등의비운


1984년안나푸르나(8,091m)에서는세계산악계를놀라게한등반이이루어졌다.은벽산악회는전년도가을대원1명과고소포터2명을잃고패퇴한안나푸르나1봉에도전,베이스캠프도착15일만인12월7일김영자(31)대원이고소포터4명과함께7,700m지점의마지막캠프를떠나10시간만인오후3시20분안나푸르나1봉정상에섰다고발표했다.이등정은여성최초의안나푸르나등정이자동계초등이라는경이적인기록이었다.

이등반은당시한국대와같은시기에북면초등루트로등반하던프랑스대에의해의혹이제기되면서파문이인다.프랑스팀은한국대가정상을등정했다고발표한오후3시20분경베이스캠프에서목격한김영자일행이정상에서적어도두시간못미치는지점의능선에있었다는점등의이유를들며등정의혹을제기한다.

그러나이와같은등정의혹설에은벽산악회팀은등정진위를가려줄분명한증거를제시하지못했다.무엇보다김영자대원은정상에함께올라선셰르파4명중2명이하산길에서추락사하면서정상모습이담긴카메라를잃어버려등정사진을내놓지못했기때문이다.결국이등정은의혹을샀고,이후명확한해명이나항의가없이시간을넘김으로써국제적으로인정받지못하게되었고,3년뒤인1987년2월2일폴란드팀의예지쿠쿠츠카가정상에올라동계초등정으로공식적으로기록했다.김영자대원의등정은중앙봉동계초등이자제5등으로기록되고말았다.

1984년자누등정사진은아직껏공개하지않아


1984년한국대의안나푸르나1봉동계초등에이어전국합동자누원정대(대장김기혁)가역시동계초등을이루면서주목을받았다.1962년봄시즌프랑스대에의해초등정된‘히말라야의괴봉’자누(Jannu·7,710m)는‘스핑크스’또는‘잠자는사자’라불리는난도높은산이다.

12월8일박성만,신교봉,송정두대원이고소포터2명과함께1차등정을시도했으나강풍으로무위로끝나고,다음날김기혁대장이두명의고소포터와함께오전6시10분마지막캠프를출발해8시간30분만인오후2시40분경정상에섰다.그러나정상사진을등반기에공개하지않았다는이유로국내산악계는등정의혹을제기했다.이에김대장은정상사진을갖고있으며공개할의사가있음을분명밝혔으나현재까지그사진은공개되지않고있다.이등정시비는국내에서이루어졌을뿐국제적으로는확산되지않아세계산악계는한국전국합동대의동계초등을인정하고있다.

1985년가우리상카등정은국내에서만시비일어


1985년겨울진주마차푸차레산악회가가우리상카(7,134m)에도전,이산의통산세번째등정에성공하면서동계초등을일구어냈다.네팔쿰부히말의남서쪽에위치한가우리상카는1952년영국대의첫도전이후1979년가을미국팀에의해초등정됐고,1984년미국팀의재등이후정상을허락하지않은산으로네팔의7,000m급봉우리중자누,가네시1봉(GaneshⅠ·7,442m),록느와르(RocNoir·7485m),팡(Fang·7,647m),눕체(Nupthtse·7,864m)등과함께난이도가높은산으로정평이나있다.

전원히말라야초행자였던마차푸차레산악회원정대원들은5명의고소포터들과함께등반을시작,몇차례의기상악화로텐트가찢기고장비가유실됐지만남서벽상에고소캠프3개를설치하며등반시작30일만인1986년1월16일오후2시30분경최한조(33)대원과고소포터앙카미셰르파가정상에섰다고전했다.

지방단일산악회로조촐하게팀을꾸려동계초등이라는쾌거를이루어낸이들은커다란등반성과에도불구하고국내산악계로부터등정의혹을받는다.대상산과루트의까다로움,등정기록의불충분등이그원인이었다.

당시최한조대원의등정모습을망원경으로지켜본성락건대원은1990년‘14개팀등정의혹설’에휘말리자등산전문지를통해등정당시의상황을자세히설명하며분명정상에도달했음을강력히주장했다.성락건대원은등정당일무전기고장으로,그리고베이스캠프에서는정상부가보이지않아베이스캠프에서2시간거리에있는5,000m높이무명봉에올라망원경으로정상부를바라보고있었는데오후1시경정상설원부근에까만점3개가보였고,그로부터1시간후인오후2시경까만점둘이정상부근으로이동한것을분명확인했다고증언했다.이등정시비역시국내에서만논란이있었고국제적으로는동계초등을인정하고있다.

1987년대륙산악회캉첸중가등정,여러점에서의문제기돼


1987년겨울대륙산악회는창립30주년기념사업으로세계제3위봉인캉첸중가(8,586m)에한국대로서는처음으로도전한다.캉첸중가는1955년영국대에의해초등정됐지만대륙산악회가원정을처음계획한1985년당시만해도동계미등으로남아있었다.하지만이듬해인1986년1월‘살아있는전설’라인홀트메스너와8,000m급14좌완등레이스를펼쳤던폴란드의예지쿠쿠츠카가먼저등정해버렸다.

대륙산악회는두번째동계등정을목표로정상무(49)대장,하해룡(37)부대장등9명을파견한다.고소포터1명이베이스캠프로이동중고산병으로사망했고,다음날후발대의이성호대원이캐러밴도중지병으로목숨을잃는등아픔을겪지만이를극복하고12월12일베이스캠프에도착,곧바로남서벽노멀루트를공략한다.

한해를보내는마지막날이주이대원이고소포터2명과함께1차등정에나서8,470m지점까지진출했으나동상증세로돌아섰고,이틀후인1988년1월2일오전6시이정철대원과고소포터3명이2차등정에나섰다.이정철은산소통하나를지고20~30분간격으로1~2분정도산소를마시면서정상을향했다.

혹한에발가락이얼어감각이없었으나등반은계속됐다.오전10시,해발8,250m높이의능선에올라섰다.그곳에서고소포터앙카미가,오후2시8,400m지점에서앙키파가,8,500m부근에서앙린지가차례로등정을포기하고돌아섰다.혼자남은이정철대원은산소마저바닥나몹시지쳐있었다.하지만단독으로등반을감행,마지막캠프를출발한지11시간20분만인오후5시20분경정상에도달했다고등반대는전했다.

최초의히말라야원정에서세계에서세번째로높은봉우리를동계에단독으로오른이정철의대기록은당시국내산악계로부터1987년허영호의에베레스트동계등정에버금가는큰성과로받아들여졌다.하지만그는정상에서카메라작동미숙으로사진을남기지못해국내산악계로부터등정의혹의시비에휘말린다.

무엇보다히말라야초행에서8,000m급거봉을단독으로,그것도거의산소를사용하지않은상태에서11시간20분만에고도차600여m를극복하고정상에오른다는것은거의불가능하다는이견때문이었다.당사자들은아무런증거를제시하지못한채등정의혹은계속됐음에도대부분은정면으로등정의혹을제기하지않았고,세계산악계도이들의등정을인정했다.등정자이정철은불신의눈초리에시달리다일본으로떠나가버렸다.

21년이지난2009년오은선의캉첸중가등정의혹이제기되자잠잠해졌던대륙산악회의캉첸중가등정의혹은수면위로재부상했다.2010년8월26일대산련사무국에서개최된일명‘오은선캉첸중가청문회’인캉첸중가등정자모임에캉첸중가한국초등자로기록돼있는이정철은초청되지않았다.

홍경표,“내가오른곳은초오유정상이아니었다”고백


1989년가을대구·경북초오유원정대는베이스캠프설치16일만인9월2일서면루트로이동연(31),홍경표(27)대원이고소포터왕겔(34)셰르파와함께정상등정에성공했다고발표한다.이들은네팔정부로부터허가된남면루트를버리고중국측루트인서릉노멀루트를택해속공으로등정해시즌초등을이루었다.

그러나이원정대는후일등정시비에휘말린다.초오유정상은아주넓어정점을찾을수는없지만높은곳을향해가다보면반대편인남면으로기울어지는곳을만나게되고그곳에서남쪽의에베레스트가보인다.그런데대구·경북팀의사진에는맑은날씨임에도불구하고에베레스트가없어의혹이일기시작한것이다.그로부터6년이지난1995년12월등정자홍경표대원이“내가오른곳은정상이아니었다”고양심선언을한다.

▲1989년대구경북초오유원정대가제시한등정사진.그로부터6년이지난1995년12월등정자홍경표대원이“내가오른곳은정상이아니었다”고양심선언을했다.

“분명히저는정상에는도달하지못했습니다.그걸공식적으로명확히하고싶었습니다.정상을얼마쯤남겨놓았는데도감히‘정상’이라고말한게너무도부끄럽습니다.(중략)그리고당시귀국한후첫딸의이름을‘초오유’라고지었는데딸아이를볼때마다왠지부끄러웠습니다.”

실종으로영원히묻혀버린등정여부의진실


1989년가을영남대학교안나푸르나원정은영광과비극이함께한원정이었다.9월20일오전11시30분정준모(26),조원배(26)두대원이안나푸르나4봉(7,525m)등정을이룩한기쁨을누렸고,이튿날인21일오후김용규(28),정갑용(27)대원이안나푸르나2봉(7,937m)등정길에실종된것이다.

21일오전6시김용규정갑용대원,그리고고소포터2명은안나푸르나2봉등정을위해캠프3(7,400m)을출발했다.약30분간운행하던중고소포터들이간밤에눈이내려여러사람이지나가면눈처마가내려앉으므로고정로프없이는전진을못하겠다고돌아섰다.하는수없이캠프3으로돌아온이들은의논끝에두대원만등정을시도하기로하고오전8시30분경비박색을챙겨정상을향했다.

그날오후3시경김용규대원은가쁜숨을몰아쉬며“정상직하의암부이며정갑용의컨디션이좋지않아등정후하산하다비박하게될것같다”는교신을마지막으로베이스캠프와의연락이두절됐다.다음날장병호등반대장과고소포터2명이한가닥의희망을걸고캠프3에진출해수색작업을폈으나그들의흔적을찾을수없었다.

정상을오르던중이었을까?아니면등정후하산하다실종한것일까?영원한의문을남긴채두대원은사라졌다.원정대는오후5시30분경정상등정에성공하고하산하다추락사한것으로결론지었다.당시대구지역에서는등정의혹의눈길을보내는이는없었다.하지만국내외산악계는증거가불충분하다는이유로실종된두대원의등정을인정하지않았다.

1989년동계얄룽캉등정의진실은아직도미궁


1989년가을한국대가1971년과1985년두차례에걸쳐도전했으나뜻을이루지못하고숙제로남아있던로체샤르(8,382m)등정에성공한다.대구등산학교출신들로구성된로체샤르원정대는등반시작40여일만인10월4일오전6시20분권춘식(27)대원이고소포터다와왕추(31)와린지(33)셰르파와함께8,100m지점의캠프5를출발해동봉을거쳐8시간40분만인오후3시경정상에도달,한국초등을이루었다.그러나이들도등정사진을제시하지못해한동안의혹설에시달려야했다.그러나이원정대는‘공포!그러나영광의로체샤르’상세한보고서를남겨등정의혹을불식시켰다.

같은시즌캉첸중가산군의또다른8,000m자이언트봉인얄룽캉에원주치악산악회가출사표를던졌다.캉첸중가주봉왼쪽에8,505m높이로솟아있는얄룽캉은1973년일본대에의해초등된산으로캉첸중가에비해등반은많이이루어지지않았다.원주지역기업체와시민들의성원으로구성된이원정대에는박순조(43)대장등모두8명의대원이참가했다.

이들은베이스캠프도착28일만인10월13일서강호(22)대원과두명의고소포터가오전7시경마지막캠프를출발,8시간55분만인오후3시55분어렵게등정에성공,한국초등으로기록됐다.

치악산악회는1984년캉그루(6,981m)등정에이은두번째히말라야등정에성공하면서강원도지역에서의첫8,000m급등정을이루었다.그리고두명의고소포터파상곰부(34)셰르파와아다와타망(33)이네팔인으로는처음으로얄룽캉에오르는영광을안았다.

산악계일각에서는이팀에관한의혹설은그자체가근거없는것이라는견해였다.이후등정의혹은잠잠해졌으나치악산악회는등정15년만인2004년,86일간(1989년8월7일~10월31일)의원정기록‘얄룽캉원정등반보고서’를발간해등정의혹설로부터자유로워졌다.

같은해겨울영남지봉산악회는김특희(42)대장등5명의대원과고소포터8명으로원정대를구성,얄룽캉(8,505m)동계초등에도전한다.12월20일진교섭대원,앙다와(29)셰르파,치링테베(36)셰르파등3명이새벽4시30분마지막캠프를출발,인공산소의도움을받으며남동벽을통해11시간35분만인오후4시5분경정상에도달,동계초등에성공했다.

이들은약10분후등정사진을촬영하고하산을시작한다는베이스캠프와의무선교신을마지막으로연락이두절됐다.원정대는다음날캠프1~캠프4구간의남서벽을수색했으나이들의흔적을찾을수없었다.정상에서하산하다8,500m부근에서북벽으로추락사했음이분명했다.이들역시등정자가실종돼등정여부의진실은영원히묻히고말았다.그러나세계산악계는이팀이동계초등에성공한것으로기록하고있다.

자료제공부산산악포럼/정리한필석’월간산’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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