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가을허영호(35)대장은단독으로로체등정에성공했다고발표한다.당시국내최초로8,000m급봉우리에서야간단독등반을감행했다는점에서크게평가됐다.부인과아들(5)을데리고가족원정대를꾸린허영호대장은사진작가성동규(40)와합류해등반에나섰다.
몇번의고소적응등반끝에10월13일오전9시단신으로캠프2(6,500m)를출발한허대장은로체페이스에설치된캠프3(7,300m)에도착했다.그곳에서수면을취한후오후8시경출발해야간등반을감행,7,600m록밴드부터산소를사용하며다음날새벽4시경정상에섰다.정상에서는날이밝지않아사진촬영을하지못하고곧바로하산,오전8시경캠프3를거쳐오후2시경캠프1로내려왔다.
이에허영호는‘등반당일날씨가좋았고루트가어렵지않아야간등반에전혀문제가없었으며,등반시간에대한의혹부분에대해서도그루트로는너무나당연한시간임’을강조하고,‘고산에서의경험이많은사람은눈의상태를이용해서등반시간을얼마든지단축할수있다’고주장했다.
그러나근래대부분의국내로체등정자들은허영호의로체등반에대해고개를가로젓는다.보통러셀이잘돼있고고정로프가설치된상태에서캠프3(7,300m)~캠프4(7,800m)구간에서3~4시간,캠프4~정상구간은7~8시간이상이걸리므로아무리체력이뛰어난사람이라도캠프3에서정상까지는10~12시간이상이소요된다는주장이다.
이미
그리고고오희준과등반능력이버금간다는부산연맹팀의김창호(38),서성호(28)의경우,허영호의출발지점보다500m높은7,800m의캠프4에서정상까지7시간45분이걸렸다.이들은전날한국의4개팀이시즌초등하면서러셀과고정로프설치를마쳐둔덕분으로수월하게정상에오를수있었다고한다.단지무산소로올랐다.이들은정상에서1시간가량머문뒤캠프4,캠프3을거쳐4시간만에캠프2(6,500m)까지하산할정도로당시컨디션은최고였다.
그런데자기주장대로라면부산연맹팀보다약1.5배의속도로정상에올랐다는허영호는캠프3(7,300m)까지하산하는데4시간소요됐다(부산연맹팀은2시간15분소요).등정당시왼쪽눈의이상으로하산이늦었는지도모른다는의견이있지만대부분그의등정을믿을수없다는분위기다.
한국대의서릉직등루트등정이사실이라면놀랄만한기록이었다.
등정소식을가지고카트만두에먼저도착한이석우대장은홀리여사를만났다.한국원정대에대해부정적인선입관을가지고있던그녀는그의성공담을믿지않고꼬치꼬치캐물었다.그녀의상식으로는한국대가서릉루트로의성공은불가능에가까운것이었다.
그러나나중에본대가카트만두로나온후고소포터들로부터등정소식을전해듣고서야‘금세기최고의등반’이라는칭찬을아끼지않았다.당시국내산악계도원정대장을제외한모든대원들이히말라야초행자이기에그들의쾌거에찬사를아끼지않으면서도이엄청난결과에대한의구심을떨쳐버리지못하고있었다.
귀국후원정대가제시한사진에나온정상은이미여러팀의수많은산악인이올라너무나도낯익은세계최고봉의정상은아니었다.에베레스트정상은두사람이서고도평평한설면이많이남아있는사진속의그곳이아니라는것이앞서등정한사람들의증언이었다.무엇보다
이에대해이석우대장은정상파노라마사진을갖고있으며마땅한기회가있다면공개하겠다고말했으나그사진은공개되지않았다.국내외산악계는이팀의등정은여러정황증거로보아미등정으로보인다고결론내렸다.
폭설과이상기온으로40일이상을고전한끝에1,000m에이르는급경사의설벽과대암벽지대를돌파,마지막캠프(7,500m)를설치하면서정상공략을위한준비를모두마친원정대의
1988년이래한국인에게여섯차례나패배를안겨주었던낭가파르바트의등정소식은1991년도히말라야등반중에서가장뛰어난성과로꼽혔다.그러나놀랄만한등정에대한의혹이함께등반에참여했던대원들이등정을부인하고나섰다.
김대장일행의등정을믿지않는이유는크게세가지였다.첫째함께등정한홍콩인들의체력과고소적응상태가다른한국대원들보다못했는데도1차등정에실패한후하산하지않고7,500m고도에서3일간이나머물고도다시정상등정을했다는점,둘째정상200m전부터정상을다녀올때까지전혀무선교신을하지않은점,셋째굳이야간등반을택해확실한등정사진을촬영하지않은점등이그이유였다.
이에대해김대장은“등반에불만을품은몇몇대원이퍼트린소문에불과하다”며“홍콩산악인들이기술적으로는한국대원보다뒤졌지만끈기가있고등반에대한열의가더강해등정에성공한것”이라고강조했다.하지만이후여러정황과증거미비로등정의혹을불러일으키다가이듬해등정한한국팀들에의해거짓으로밝혀져한국산악인들의안타까움을샀다.
그러나한국대가등정한3일후폴란드-이탈리아합동대(대장크리스토프비엘리스키)가북동릉변형루트로등정에성공한후한국대의등정의혹을제기한다.등정자중의한사람인이탈리아인마르코비안치(MarcoBianchi)는홀리여사와의인터뷰에서“한국팀이오른봉우리는주봉에서북쪽으로약500m못미치는곳으로그주위에는주봉보다50~80m낮은봉우리가많으며그중한봉우리를올랐다”고주장하면서발걸음이멈춰진곳의사진을공개했다.
원정대는귀국후국제적으로인정받을만한증거자료나정황증거를수집해공식루트를통해신속하고논리적으로대응하는모습은보이지않고등반보고서에서만등정을주장하는무모함을드러냈다.이후조선대팀은국제적으로정상등정을인정받지못하고8,125m지점까지도달한것으로기록되었다.
국내8000m급14좌완등자중의한사람으로현재‘8000m급신루트프로젝트’를수립,왕성한등반활동을펼치고있는박영석역시한순간의판단착오로오점을남겼다.
1997년한왕용과한팀을이룬박영석은로체에도전,정상에올랐다고발표했다.하지만이후동료대원에의해의혹이제기되면서,아이러니하게도1997년그에의해로체등정의혹이제기됐던이탈리아등반가마르티니와스테파니와같은처지가된다.당시박영석은정상40m전에서“이정도면다올라간것이나다름없지않겠는가”하는동료의격려에정상을밟지않고돌아섰던것이화근이었다.뒤늦게박영석의로체등정의혹의소문을접한동국대학교산악부선배들의설득으로4년의세월이흐른후인2001년봄14좌완등을목전에두고로체재도전에나선그는등정에성공해명예를회복했다.
당시홀리여사가왜로체에재도전하느냐는질문에박영석은“대부분의한국인들이왜로체등정사진이없느냐고물었다.이번에는좋은카메라와비디오를가지고왔다.카메라맨과함께정상에올라등정사진을촬영하겠다”라는조크로프로산악인답게즉답을피했다.
로체와함께안나푸르나1봉(1996년등정),마나슬루(1998년등정)등정의혹도네티즌들에의해제기됐다.마나슬루의경우,“정상에섰을때는너무춥고강한바람이몰아치는상황으로,만약사진을찍으려고장갑을벗었다가는곧바로동상이걸려손가락을잘라내는불상사가생겼을것”이라며“때문에정상에서조금내려와바람을피할수있는장소에서사진을찍은것”이라고해명했다.그리고안나푸르나는베이스캠프에서정상까지등반하는모습이한눈에보이기때문에거짓말을할수없다고밝혔다.
박영석은2001년로체등정에이어같은해여름K2등정에성공하면서,1993년에베레스트등정을시작으로8년만에통산여덟번째,한국최초로8,000m급14좌완등자로기록되는영광을안았다.
8,000m급16좌완등(14좌+로체샤르+얄룽캉)으로국내산악인중최고의영예를누리며엄홍길휴먼재단을설립해국내외적으로활발한활동을벌이고있는엄홍길도젊은시절인간의한계를벗어나지못하고무모함을드러냈다.
엄홍길은1993,1994년연속으로시샤팡마(8,027m)에도전하지만중앙봉(7,998m)에오르는것으로그쳤다.당시8,000m급14좌완등에대한국내의관심도는매우낮았다.그런상황에서도엄홍길은시간이되면등정사진을공개하겠다고했으나여러해를넘기면서명백하게결론지을자료를제공하지않고그냥넘어갔다.그러나당시일본의‘산악연감’과미국산악회의연감인‘아메리칸알파인저널’은그의시샤팡마주봉등정을인정하지않았다.
1996년‘엄홍길8,000m14좌완등추진위원회’가탄생되면서그의8,000m급봉등반은계속돼,1999년안나푸르나1봉과2000년봄시즌캉첸중가등정이후14좌완등을눈앞에둔그의태도는돌변한다.그는모언론사와의인터뷰에서당시시샤팡마등정의혹에대해관심이없었고또한정신이없어주봉을중앙봉으로착각했다고변명했다.또한등정을입증하려는노력은보이지않으면서“인맥과학연에의한배타적인파벌이있다”고5년전의주장을되풀이하면서등정시비를엉뚱한방향으로몰고가엄청난파문을일으켰다.
시샤팡마등정의혹에휩싸여있을때또다른봉우리초오유(1993년등정)와로체(1995년등정)등정의혹이제기되고있었으나시샤팡마등정의혹에묻혀수면위로떠오르지않고잠재해있었다.당시엄홍길은스페인대원2명과함께로체정상에올랐다고강력히주장한다.그러나이듬해인1996년스페인팀은유럽의히말라야기록전문가인사비에르(XavierEqueskitza)를통해“엄홍길이정상에섰다고주장하는이유는등정에실패하면스폰서를잃는다는두려움때문이었다”고밝혔다.이에엄홍길은홀리여사측과의인터뷰에서자신이정상에서지못했다는주장을단호하게부인했다.
당시엄홍길은“함께등반한바스크팀대원들이정상에먼저올랐고,뒤이어정상에올랐을때는카메라가없는상황이었기에등정사진을찍을수없었다”며“만약그때로체를등정하지못했다면우선그들이내가등정했다는주장에대해가만히있었을리없을것이고,또한만약바스크대원들이나에대해그런불신을가졌더라면어떻게그후가셔브룸1·2봉(1997년등정)과안나푸르나(1999년등정)를함께등반할수있었겠느냐?”고반문했다.
그의주장에도불구하고12년이지난2007년에이르러,엄홍길은당시로체정상을오르지못했음을밝히는강력한증언이나왔다.1995년가을엄홍길과함께등반했던후안발레조(JuanVallejo)와후안오이아르자발(JuanOiarzabal)은“로체정상을향하고있을때우리는같은로프를묶고있었다.그러나약8,300m지점에서엄홍길은스스로로프를풀고돌아섰다.그곳은정상이아니었다”고당시스페인등반가이나키오초아(InakiOchoa)에게실토했다.오초아는이러한사실을홀리여사측과의인터뷰에서밝혔다(2007년3월28일).
초오유등정의혹역시등정사진이없어시비에휘말렸으나등정하지못했다는증거도없는상태에서더이상의논란없이조용히넘어갔다.하지만아직까지도의심의눈초리로바라보는이들은많다고한다.
엄홍길은2000년K2등정후14좌완등을공식발표했으나이후국내외여론에무릎을꿇고말았다.2001년봄로체와그해가을시샤팡마에재도전,등정에성공한다.그는1988년에베레스트등정을시작으로12년만인2001년시샤팡마등정을끝으로박영석에이어통상아홉번째,국내두번째8,000m급14좌완등자로기록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