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남산의고위봉을오르는이무기능선과금오봉을오르는거북능선이가장시야가트인암릉구간이다.이무기능선의경우90년대초남산리지란이름으로경주전문산악인들만알음알음다니던길인데지금은로프줄이깔려있어웬만한리지경험이있는등산객들이장비없이누구나오를수있다.그러나이능선으로오를경우유물을볼수없다는단점이있다.특히경주사람들은보름달이뜨는때달빛산행이란이름으로야간산행을즐긴다.
이때달맞이코스로으뜸으로삼는곳은서남산의용장사지다.용장사지에서용장골로내려오는길은달의기운을가장충만하게받아안을수있는곳이라고경주의산악인들이귀띔하는곳이다.서쪽기슭포석정에서동쪽남산동통일전까지남산순환도로가산을동서로가르고있는데비포장임도지만일반차량통행은할수없다.고위봉과금오봉을잇는코스에서는이임도구간을일부지나야한다.
남산산행들머리는주차시설과대중교통이용이편리한서남산의삼릉과용장골입구,동남산의통일전입구를가장많은사람들이찾는다.문화유적답사를중심으로신라문화원에서추천하는답사코스는다음과같다.서남산삼릉에서출발할경우등산로상에유물이가장많고여름에는냉골이라불릴만큼시원한계곡인삼릉골을이용해‘삼릉~선각여래좌상~상선암~냉골암봉~상사바위~금오봉~용장사터~용장사3층석탑~용장마을’의긴코스와‘삼릉~경애왕릉~삿갓골석불입상~삿갈골능선~금오봉~도깨비능선~잠늠골탑~비파마을당수’의보다짧은코스가있다.
동남산통일전에서출발할경우‘통일전~서출지~남산동쌍탑~칠불암~신선암마애불~백운암~천룡사터~와룡사~틈수골마을’또는‘통일전~서출지~지바위불상~탁자바위~남산부석~전망대~부흥사(늠비탑)~황금선각좌상~포석정’으로동쪽에서서쪽으로산을넘을수있다.참고로남산에서가장규모가큰불상군은탑골부처바위와칠불암,선각육존불이고,가장큰불상은약수골마애불상이다.가장많은불상을볼수있는코스는삼릉골이다.
남산종주산행들머리로잡은용장골은금오봉과고위봉에서흘러내린물이만나이룬,남산에서는제법큰골짜기다.계곡은크게열반골과절골로나뉘고다시탑상골과은적골,비석대골등무수한골짜기로나뉜다.여느산이라면무슨골이라할것도없을작은지류에까지저마다의이름이붙은데는남산의이력이깊은탓이다.열반골로난포장도로를따라가는길은천우사앞민가가있는너른공터에서멈춘다.
산행을함께하는경주코오롱산악회이용숙씨의말처럼차를세우자할아버지한분이집에서나와주차료천원을받아간다.“전엔텃밭이었는데등산객들이많아지며이제주차장이됐지요.”차10대면꽉찰만한주차장에서수입이야노인의쌈짓돈에지나지않을테지만이작은일에는많은것이담겨있는듯했다.남산이세상에널리알려지며찾는이들이늘지않았다면그는지금밭을일구고있었을것이다.
열반골은그이름도심상치않거니와골짜기마다줄지어선비파바위,이무기바위,곰바위,흔들바위그리고‘분암(糞岩)’이라고표시된똥바위까지예사롭지않은바위들이줄지어늘어서있는꼴이었다.지도를따라열반재를넘으면천룡마을이있는너른천룡사터로이어진다.완만한계곡길은예부터많은사람들이넘나들었던통로였을것이다.
세속의유혹들을멀리하고부처를찾아산속에들어길을찾을때수많은맹수들이나타나위협했지만굴하지않고고개를넘어부처님나라에들었다는것이다.일행은열반골에서왼쪽능선을따라붙는,지도에‘이무기능선’이라표시된길로오르기로했다.이무기능선으로이어지는길은남산의유일한암릉길이다.이무기능선오르막에도등산로가훼손되어나무뿌리가허옇게드러난곳들이곳곳에있어지나는발길을무겁게했다.
경주시산악연맹사무국장차극돌씨에따르면이곳은전부터경주지역산악인들이‘남산리지’라고부르며다니던길로주변에마땅한암장이없는가운데바위맛을볼수있는유일한장소였다고한다.하지만찾는사람이늘며위험한구간에는고정로프를설치해놓아이제는누구나오를수있는길이되었다.떡고물처럼부서지는남산의산길은쉽게길을넓혀나간다.1시간여크고작은바위턱을넘자남산에서가장높은고위봉이눈앞에모습을드러냈다.
남산은고위봉과금오봉두개의큰봉우리로이어진능선이다.높이로치면고위봉이높지만주봉은금오봉으로여긴다.위치상으로도금오봉이중앙부에있을뿐더러고위봉의이름이야말그대로높은위치에있는봉이라는뜻이지별다른의미를지니고있지는않다고한다.신라사람들이20여m밖에차이나지않는그높이를두고산을보았겠는가.정상표지석과‘밟지말라’는메모가적혀있는봉분도희미해진무덤이있는고위봉정상을지나10여분이면백운재에닿는다.
백운재는백운암에서올라오는길과길게늘어진용장골최상류,봉화대가는길과만나는사거리다.이정표가있는사거리에서왼쪽으로내려가면사자봉(432m)아래있는산정호수와만난다.인공저수지인이호수는농업용수를목적으로1950년대에만들어졌다고한다.하지만지금용장리산비탈에는농사짓는이들이거의없어그저저수지로만막혀있는상태다.
봉화대방향으로발길을튼다.고려시대,또는조선시대의것으로추정하는봉화대는서울남산의봉수대와같은모습은찾아볼수없고기초가되는돌무더기만아주조금남아있을뿐이다.그런데봉화대라고하면봉화를피워올려사방에보일만큼트여있어야하는것아닌가.아름드리소나무로막혀있는봉화대가궁금해물어보니김구석경주남산연구소장은“이나무가몇년이나된것처럼보입니까?”라며오히려되묻는다.
아,무릎을칠일이다.한아름이넘는나무라야고작100년.남산의시계로는바로엊그제와같은시간이다.지금은제법울창하기도하고산정상까지소나무가주종을이룬숲이덮혀있지만불과50년전만해도남산은벌거숭이의모습을하고있었다고한다.근현대를겪으며생활을위한벌목과채취가진행된까닭이다.남산을들어서며유독작은소나무가많다여겼었다.지금적당히휘어지며뻗은나무들은경주가관광지로개발되며인공적으로심은것들이다.
봉화대에서칠불암까지는완만한능선을따르다급경사의암반길을내려가야한다.멀리서보면길이끝나는곳이아닐까하는생각이드는벼랑에다다르면그곳에신선암마애보살상이있다.남산종주중처음으로만나는유적이다.예전엔신선암이라는암자가있었다고전해지는이곳은가장좁은곳이폭50여cm에불과하다.바위벼랑을사이에두고부조로새겨진마애보살은‘유희좌’라고하는편안한자세로앉아구름을탄모습을하고있다.
마애보살과의첫대면은박물관도아닌데나라에서정한보물을이렇게가까이서볼수있다는것이가슴벅차기도하거니와한번슬쩍만져보고싶은짓궂은생각이들기도한다.하지만이런감동은앞으로펼쳐질무궁한남산의모습에비하면시작에불과했다.마애보살상을지나절벽을끼고돌아100여m를내려가면칠불암이있다.칠불암이라는이름은수십년전이곳에지어진암자가이이름을썼기때문이지원래이곳에있던절이어떠했는지는전하지않는다.
절마당에불상일곱개가나란히새겨있어칠불암이라부르는것이다.천년이넘은불상은코가조금깨진것말고는깨끗이보존되어있다.마당에얼기설기쌓아둔석탑은지금의기단으로사용되는돌이본래옥개석(탑의지붕돌)으로본래4개를모아하나가되도록설계한것인데온전한모습을상상해보면바위벼랑에이렇게큰탑이있었다는사실이신기할뿐이다.내려간길을거슬러올라와다시남산의등허리에올라붙는다.
봉화대능선을따라이영재에다다르면순간좁았던산길이뻥뚫리고임도가나타난다.서쪽포석정에서동쪽서출지까지남산을가르는순환도로다.1960년대경주일대를관광지로개발하며뚫었다는이도로는아직포장은되지않아긴급한일이아니고는차량을통제하고있지만최근까지산악마라톤코스로사용한다거나가로등을놓아시민들의산책로로만들겠다는계획을발표해논란을사기도햇다.
풀한포기자라지않고흙먼지이는울퉁불퉁한임도를걷는느낌은사라진신라의황망함처럼가슴을두드린다.넓은길은금오봉발치까지800여m를이어진다.하지만앞만보고걷기에앞서오른쪽으로나있는골을따라용장사터에들러보지않을수없다.비석을세워두기위해바위를파낸자리만남아있는비석대를지나200m쯤가면용장사터로내려가는길과만난다.용장사터는사슴뿔처럼갈라진용장골(茸長谷)의어원이된절이다.
조선생육신중한사람인김시습은이곳에머물며최초의한문소설<금오신화>를썼다고한다.능선에서내려오면가장먼저만나는삼층석탑은남산전체를기단삼아쌓은탑이다.굳이불교를믿지않더라도절벽에서서천년비바람을맞고도당당히서있는탑을보면그장엄한위엄에잠시발걸음을멈추게된다.탑이바라보는산아래세상은먼과거와같다.이곳은천상의세계,속인은머무를수없는상상의땅유토피아가된다.
팽팽한절벽의수직과발아래보이는서라벌너른수평의조화는더할것도덜것도없는신라인들의정신세계가고스란히보이는것같다.부조로새긴마애여래좌상을지나다보면곳곳에널린바위조각에쐐기자국을볼수있다.바위비탈에수톤은되어보이는채석흔적을보고미스터리라거나현대과학으로는풀수없는석공술이라는생각은접어두자.그건위대한인간정신과땀이만들어낸노력의결실일테니까.다이너마이트와중장비에익숙해진현대인의시간으로서는쉽게상상할수없는다른개념의시간을살던우리의모습인것이다.
경주황남빵을연상케하는세개의기단위에세워진삼륜대좌불을만나면‘악’하는비명이터져나온다.부처의목이떨어져없는것이다.하지만너무놀랄것은없다.이곳말고도남산의무수한불상들이목없는모습을하고있으니까.유독불두(佛頭)훼손이많은데대해경주국립박물관권강미학예연구사는“불상중목부분이약하기도하지만숭유억불정책의조선과일제강점기를거쳐오며일부러훼손시킨경우도많은것같다”는의견을냈다.
연화대에앉은부처는생김새로보아미륵불이라는의견이높다.미륵불은56만7천년후에세상에나와중생을구한다는미래의부처다.참수된부처는세상을굽어보며이제눈물도흘릴수없다.금오봉에서굽어본발아래는10여년전일어난산불로나무도몇남아있지않아한여름의녹음조차상상할수없다.아직검게그을린나무둥치의화상자국이불어오는바람조차막아주지못하는그곳은남산에서목이잘린수많은부처의공동묘지같다는인상을지울수없었다.
삼릉으로하산길을잡아도더많은문화재를보려면바둑바위까지갔다가내려가는것이좋다.상사바위는남산에서가장작은불상이발견된곳이기도하지만민간신앙터로불교가전해지기훨씬전부터바위를섬기던옛사람들의정취를느낄수있는곳이다.손녀뻘소녀를사랑하던노인의애절한사연이담긴상사바위는민간신앙터에서공통적으로나타나는남근석과여근석이있다.이곳은달리산아당(産兒堂)이라는이름으로불려왔다는데여근석아래에는1856년이곳에서기도해아들을낳았다는기록이적혀있다.
상사바위에서내려보이는마애대좌불을시작으로냉골하산로는눈이즐거운길이다.남산발굴유적이가장많은이곳은그동안다리품을팔아온노력을값아줄만큼보따리가득이야깃거리를담아간다.바위벼랑에새겨진높이7m의마애불은남산에서가장큰부처상이다.누군가그랬다.남산의불상은바위에새긴것이아니라바위속에숨어있는부처를찾아낸것이라고.아마추어의눈으로본불상이예술성이어떻고고고학적가치가어떤지따져묻기도우스운일이지만첫인상만으로도그불상들은예사롭지않은서기를낸다.
머리만양각으로새기고몸통은평면에새긴마애대좌불.‘시간이없어몸통은대충새겼나보다’이런생각이들만도하지만전체를놓고보면산과바위까지도부처로보았던신라인들의불심을엿볼수있다.상선암물줄기에목을축이고아래로난길을따르다주등산로를버리고불상답사코스표지판이있는왼쪽작은길로가면제7절터로이름붙여진곳에석조여래상을만나게된다.그런데얼굴생김새가꼭나병환자같다.복원과정에서시멘트로깨진턱을새로덧붙였기때문이다.
‘배광(背光)’이라고하는부처상등뒤에서나는서광을표현한것은깨져바닥에흩어져있는데수십년전아이들의장난으로떨어져깨졌다고하니아쉬움이더한다.불상이떨어지고깨지는데대해안타까운마음이드는건한번사라지면다시만들수도온전히복원할수도없는바위의성질탓이다.백운암스님에게“목떨어진불상을보면무슨생각이드십니까?”하고물었더니“그깟바윗돌하나깨진걸갖고마음쓰지말라”고했다.
어쩌면더안타까운건천년이아니라만년백만년을하나의모습에가두고자하는욕심같은것이아닐까.바위주름을그대로살려새긴선각아미타삼존상은유심히들여다봐야그모습이보인다.바위결은마치커튼을드리우고현세와바위안의세계를가르는것같다.조각에만눈길을뺏기다보면놓치기쉬운게있다.바위위쪽에올라보면전각을세웠던홈과함께가로로긴홈통이패여있다.부처님얼굴로빗물이흘러내리지않게물길을돌리는수로로사용되던곳으로신라인의지혜를엿볼수있는흔적이다.
이쯤되면발길에차이는돌하나까지조심히밟을수밖에없다.흙속에묻혀있는천년의세월은함부로대할수없는인간이상의시간이다.삼릉으로내려오는길,아예목과두손마저잘린석불좌상은입이없어말할수없고무얼어떻게표현해볼도리가없어답답하기만하다.하지만가슴을칠필요는없다.북쪽마루에걸린관세음보살상은웃는듯웃지도않는듯희미한표정으로천년그자리에서서라벌을내려다보고있을뿐이니까.따져묻지않으련다.아,바위의미소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