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 숲 변천사 [1] *-

우리숲변천사

우리숲의복구는세계적자랑거리

“한국은산림녹화의세계적성공작이다.6·25전쟁뒤만해도황폐해있던산림이울창한숲으로변해있다.한국처럼지구도다시푸르게만들수있다.”

이내용은한국에서도번역출판된환경분야의세계적저술가이자지구정책연구소장인레스터브라운박사가쓴<PlanB3.0>(2007)에기술된내용이다.

<PlanB3.0>처럼환경관련도서에소개되는것과는별개로,한국의국토녹화성공사례는국제학술지를통해서도전세계학자들에게소개되고있다.캐나다브리티시컬럼비아대학교산림경영학과폴우드교수등은영국에서발간되는국제학술지<InternationalForestryReview9(1),2007>에“세계역사를통틀어서정부주도로가장잘조직되고결집된재조림사업은1970년대와1980년대에한국인에의해서일제강점기와6·25전쟁으로헐벗은국토를다시울창한숲으로복구한사업이다”고밝히고있다.

▲우리숲의옛모습을간직한경기도포천소리봉의천연활엽수림.세조의능역주변이라지난500년동안철저하게지켜온숲이다.
세계적인환경운동가나또는외국의산림학자들은이처럼복구된우리숲의가치를높이평가하는한편,한국의국토녹화성공사례를이런저런매체를통해서국제적으로널리소개하고있다.숲이파괴된중국,파키스탄,우즈베키스탄,타지키스탄,미얀마,라오스,캄보디아,베트남,파푸아뉴기니,에티오피아,케냐,엘살바도르,파라과이,페루,온두라스의산림공직자들이한국의국토녹화사례를배우고자매년한국을찾는이유도다르지않다.하지만오늘을사는우리들대부분은주변의숲이자연이만들어준선물인양그저즐기고향유할뿐,우리숲이어떤과정을거쳐서파괴되고복구되었는지에대해서는관심도없다.

우리숲의옛모습을유추해보고,파괴과정과복구과정을살펴보는일은유엔이정한‘세계산림의해’를맞이해나름으로의미있는일이라할수있다.

우리숲의옛모습…농경문화정착이후소나무가주종

우리숲의옛모습을추정할수있는방법은제한적일수밖에없다.숲의종류나목재이용에대한구체적인옛기록이많지않기때문에더욱그렇다.오늘날우리숲의옛모습을추정할수있는방법은호수의밑바닥에가라앉은화분을채취해옛날번성했던수종을추정하거나또는목조문화재의목재절편을해부학적으로조사해그당시재목으로사용된수종들을분석하는방법들이주로활용되고있다.

화분분석은1978년한국과일본의학자들이공동으로강원도속초인근의영랑호바닥을지하12m까지파내려가호수밑바닥의퇴적물을조사한사례를참고할수있다.영랑호퇴적물의화분분석에의하면,지금부터4,500년전에서1,400년전까지의시기는서늘한기후를선호하는참나무속,소나무류,서어나무류,개암나무,느릅나무,가래나무등이많이분포했던것으로나타났다.1,400년전에서현재에이르는기간에는퇴적물에소나무류와풀꽃의꽃가루가주로나타나서,농경문화가정착된삼국시대이후는우리숲의구성수종이소나무가주종이었음을간접적으로확인할수있다.

이시기에소나무의꽃가루가주로많이나타난이유는조상들이영위했던농경생활때문이다.오늘날처럼화학비료가없던먼옛날,농경지를비옥하게만들수있는수단은가축이나사람의배설물,온돌아궁이의재,농가주변의산에서채취한풀이나활엽수의잎을베어썩혀서만든퇴비였다.그러나사람이나가축의배설물이나나무나풀을태워서만든재는그양이얼마되지않기때문에농경지에퇴비로사용하기에는충분하지않았다.그래서자연스럽게야산의풀이나농가주변의산에서자라는활엽수의잎이나가지를채취해퇴비로사용했다.

▲1984~1986년사이에강원도거진에서시행된사방사업전후의모습.
농사에필요한퇴비를생산하고자인가주변의활엽수를지속적으로채취한결과,활엽수가자라던산림은차츰척박해졌다.이렇게척박해진산림은활엽수가자랄수없는불량한토양으로변하고,그결과척박한곳에서도살아갈수있는소나무들만이활엽수들이자라던곳을점차차지하게되었다.다시말해농경생활을하면서농경지를비옥하게하고,온돌을이용한난방으로겨울을지내는행위는농가주변에자라고있던우리숲의모습을낙엽활엽수림에서점차소나무숲으로바꾸는데중요한동인(動因)이었던셈이다.

화분분석에의한연구와는달리,지금까지출토된목조문화재나또는고건축물의부재로사용된목재를해부학적으로분석한최근의연구는사용된목재를구체적으로밝히고있다.목재의해부학적연구결과는선사시대부터삼국시대까지사용된목재는주로참나무였고,고려시대에는느티나무와소나무가참나무보다더많이사용되었으며,조선시대에이르러대부분의건축물은주로소나무로지어졌다고밝히고있다.

최근국립산림과학원에서수행된연구에의하면부석사무량수전(국보제18호)의배흘림기둥,수덕사대웅전(국보제49호),해인사장경판전(국보제52호),미황사대웅보전(보물제947호)등의축조에사용된재목들중일부가느티나무로밝혀졌다.

사찰을비롯한남아있는목조건축물이나목조유물중,시대에따라사용된목재의종류가참나무에서느티나무로,느티나무에서다시소나무로점차바뀐이유는무엇일까?그답은먼저역사발전에따른인구증가에서찾을수있다.고려시대부터조선시대에이르기까지인구는계속늘어났고,그에따라목재의수요도함께늘어났다.인구증가에따른곡물생산을위해개간을늘리다보니,마을주변의산림은점차황폐해졌다.증대된목재수요를충당하고자운반이용이한마을주변의참나무나느티나무와같은활엽수부터사용했지만,공급보다는수요가더많았다.설상가상으로마을주변의산림은농경에필요한퇴비생산에필요한임상(林相)유기물과활엽수의지속적채취로점차척박해졌다.

결국척박한곳에서도살아갈수있는생명력이강한소나무만이살아남게되었고,다행스럽게도소나무는건축재로서의재질도나쁘지않았다.조선시대에이르러참나무나느티나무같은활엽수재대신에소나무가주된건축재로자리잡게된배경은우리농경문화의발전에따른인구증가와산림황폐도한몫을했기때문이라고유추할수있다.

▲소,말,지게를이용해묘목을나르고,나무를심는모습.
고려와조선시대의산림황폐

고려시대의대표적산림황폐원인은13세기몽골의침입과70여년의지배기간동안에자행되었던목재수탈에서찾을수있다.<고려사>에는‘산천임수의7할이상이벌채되었다’는내용과함께‘3년에한번꼴로풍수해와기아가계속되었다’는내용이수록되어있다.당시의극심한산림황폐는종국에고려의멸망에까지직·간접적으로영향을미쳤다고학자들은추정하기도한다.

고려가망한후,조선을건국한태조는치산치수의중요성을인식해개인의산림소유를금지하고적극적으로산림보호정책을시행했다.그러나이러한정책은조선초기100여년동안만제대로시행되었을뿐이었다.땔감을채취하던인가주변의산림은백성누구나사용할수있게나라에서허락한공리지(共利地)였지만,조선건국100여년이후부터왕족을비롯한세도가들이산림을사사로이점유했고,그에반비례해백성들이자유롭게이용할수있는산림면적은축소될수밖에없었다.따라서축소된공리지의면적에반비례해단위면적당땔감채취량은점차많아졌고,그결과숲의훼손은더욱촉진되었다.

설상가상으로16세기말일본의침입과17세기초청나라의침입으로한반도의산림은더욱황폐해졌다.조선정부는임진왜란과병자호란으로파생된막대한산림파괴의후유증을보완하고산림이용을극대화하기위한새로운산림제도를숙종때부터도입했다.그러나늘어난인구를부양할만큼충분한산림축적을갖지못한여건에서새로도입한산림제도역시좋은성과를얻기어려웠다.그결과인구밀집지역인서·남해안주변의숲은점차더황폐해졌다.

이런황폐화과정을거쳐,이땅의산림은조선후기에이르러본격적으로헐벗기시작했다.특히조선후기산림황폐가극심했던주된이유는수백년동안지속된정치부패및사회적혼란으로왕족과권세가의산림사점(山林私占),사회적약자들에의한화전과개간에서그원인을찾을수있다.

마을공동체를단결시키고협동을이끌어왔던상부상조의전통이병자호란과임진왜란을거치면서피폐해진현실적생활고때문에더욱치열한생존경쟁을유발시켰고,극심한생존경쟁에도태된사회적약자들은종국에는공동체에서이탈해원시림이나천연림을화전으로개간해삶을영위할수밖에없었다.화전이동경작은조선말기를거쳐광복이후사회적혼란기까지이어져대면적산림황폐의주된원인으로작용했다.

글·사진|전영우국민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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