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히말라야 50년 등반사 [4] *-

[한국히말라야50년사특집|장비]

’77에베레스트팀짐무게18톤…
이제는2인용텐트무게1kg안팎.
초경량고기능장비가첨단등반가능케했다

▲히말라야등반의최대의적은무게다.경량화된장비로거벽을등반중인2008년서울시립대바투라2봉원정대.

히말라야의깊은산골마을사마가온은마나슬루가가장잘보이고베이스캠프에도착하기전마지막마을이다.이곳에서마나슬루정상까지는불과9km밖에되지않는가까운거리라정상부가올려다보인다.

2009년3월29일,전날이곳에도착한우리는베이스캠프로가는길에눈사태위험이많다며주민들이운행을늦췄다.덕분에하루를더머무르고있었다.티베트계보테족이사는마을은라마교곰파가언덕위에섰고실개천옆으로지저분한집들이다닥다닥붙어있었다.

마을을돌아보다베틀에앉아야크털로천을짜고있는어느집마당으로들어섰다.아낙네옆나무기둥에기댄빈산소통하나.노란색페인트는벗겨지고통을촘촘히감았던철사줄이풀려있었다.철사줄이필요해보관했던모양이었다.들어보니강철통이라무게가엄청났다.

통에새겨진글씨에시선이멈췄다.프랑스제로생산연월일이찍혀있다.그때까진그저오래된것이려니해서서성호와나는마나슬루를등정하고내려오면이산소통을기념으로한국에가져가기로마음먹었다.

사마가온에서사라진빈산소통


4월28일우리둘은마나슬루를등정하자마자마을로뛰다시피내려왔다.산소통을손에넣어야했다.그런데거기에있어야할산소통은신기루처럼사라져버렸다.마을여기저기수소문해봤지만허사였다.

그물건이우리에게너무나소중하게다가온때는베이스캠프에서였다.쉬는날<집념의마나슬루>(김정섭저,1975년익문사)를읽으며우리는후회했다.처음봤을때미리건네받거나아니면약간의금액을지불하고샀어야했다.그것은바로김정섭대장이이끈1972년마나슬루원정대가사용했던것임에확실했다.1971년부터1976년까지한국대가세번을시도할때까지사마가온을지나마나슬루북동면으로등반했던외국대는없었기때문이다.

마나슬루팀은원정전유럽으로건너가산소를포함해그곳에서각종장비를주문했고,1971년제1차때에는프랑스제이중등산화를사용했는데1972년제2차때는일본에서주문제작하고또방한용우모오버슈즈도특별주문했다고그책에기록하고있다.

예나지금이나히말라야등반의절반은그준비를얼마나철저히하느냐에달렸다.이들은만전을기해준비된10톤의화물을보낸다.제1차마나슬루원정에서친형제김기섭을차가운얼음크레바스속에묻어야했던김호섭등반대장은1972년제2차원정을떠나면서그취지문을쓴다.

▲11960년대장비를갖춘등반가.22009년사마가온에서발견했던72년한국마나슬루팀이사용했던산소통.

“저희들에게한시도잊을수없는숙명의산이되어버린히말라야의거봉마나슬루(8,156m)에다시도전의깃발을들었습니다.작년이숙명의설봉에도전했던우리한국의일곱대원들은70년래의폭설과최악의일기에도굴하지않고굳은의지로싸웠으나폭설과폭풍으로세번의걸친정상공격도무위로끝나고,끝내는고김기섭대원의원혼만을마나슬루빙하에묻은채되돌아서고말았습니다.‘내가못하면나의형이,나의형이못하면80만한국의산악인이기어코이산에태극기를날리고말것’이라는유언을남긴채마나슬루빙하에홀로남아우리를기다리고있는고김기섭대원이나돌풍에찢기고폭설에묻힌처참한텐트를한시도잊지못하고설욕의날을고대하기한해,이제저희들은다시태극기를들고마나슬루를향하게되었습니다.”

비장함과원한이가슴을후벼판다.책의내용이아닌그들의흔적물을,그것도산아래에서찾았지만그것은이제사진안에서만나무기둥에기대서있다.

산악인상징-피켈


히말라야를오르는산악인에게가장소중한것은,첫째는자일파트너요,둘째는파트너사이를연결하는자일과의지에차움켜쥔피켈이아닌가싶다.자일과피켈은장비다.그러나이것은단순한장비가아니다.등반자와함께슬픔과기쁨,그리고생명을함께나누는파트너가되고인격화된다.그래서산악인들은함부로취급하지않으며심지어는죽으면서까지자신의피켈이치욕스럽지않게저산정위에서영원히은빛으로빛나길원하는것이다.

또한인간이극한의환경을극복하고정상을오를수있게만드는것도알고보면미지에대한도전정신과의지를바탕으로하지만실질적으로그행위를가능하게만든주역은장비다.그만큼장비는중요하다.

히말라야등반은장비의발전에따라변모해왔다고해도과언이아니다.1962년한국히말라야등반첫진출부터1970년대까지는약간의의류를제외한등반에필요한대부분의장비를서구나일본에서수입하는형편이어서외국대가사용했던장비와함께살펴보자.

8,000m위의신사들-제2차세계대전이전


남극은노르웨이에,북극은미국이정복하면서,영광을빼앗겨버린대영제국은자존심이구겨졌다.이제남은제3의극점은세계최고봉에베레스트였다.여기서만은두번째가될수없었다.

1921년봄정찰대로나선제1차원정대에조지말로리(GeorgeLeighMallory)가있었다.그는영국을떠나기직전런던의유명양복점을찾는다.그곳에서두꺼운회색털양말세켤레와감청색스웨터두벌,새클턴(남극탐험가)의이름을딴방풍방한용스포츠점퍼한벌,실크셔츠서너장,안에털이들어간최신등반화용구두한켤레를구매한다.

그가구매한모직옷은지금향하려는히말라야산록의산양털로짠캐시미어였다.그리고말로리는공군파일럿인동생에게서비행모와고글을빌린다.이당시에히말라야를오르는보온복장은대부분모직물이었다.등산화는가죽구두에쇠징이박혀있어설·빙벽을오르는데요긴했다.바지와구두사이에눈을방지하기위해각반을둘렀다.

▲1위성전송단말기등최신전자장비를갖춘베이스캠프.22009년스판틱골든필라를알파인스타일로개척할당시의등반장비.3발전된산소장비를사용하여에베레스트정상에등정한한국산악인.41982년대전쟈일클럽대가카트만두에서장비를정리한모습.

제2차원정이었던1922년북동릉8,000m대를오르는말로리의복장은흡사런던의겨울거리를걷는신사와같다.모직중절모,모직스웨터에모직재킷과바지를입었다.손에는1m가넘는긴피켈하나를들고있다.그는1924년어빙과함께에베레스트정상으로떠났다가실종됐다.그리고75년이지난후에모습을드러냈다.1999년미국의에릭시몬슨이이끄는말로리탐사등반대가5월초그의시신을발견한다.이름첫글자(G.L.M)가새겨진손수건,고도계,포켓나이프,메모장등도함께발견됐다.발목이부러진채그는징이박힌가죽구두를신고있었다.

나일론등반대-1950년프랑스안나푸르나1봉


전쟁은문명을파괴하지만빠른시간에발전시키기도한다.제2차세계대전으로등산의류와장비에도대변혁을가져온다.그혜택을십분활용한팀이1950년프랑스대다.원정대는최초로8,000m급안나푸르나1봉을초등한다.그들이그렇게재빠른정상공격을할수있었던것은여름계절풍몬순이다가와촉박하기도했지만가벼운장비덕을많이보았을것이다.즉그들은경량등산대라느니나일론등반대라고별명이붙을정도로당시최신장비를구비하고있었다.

지금에와서는나일론장비(의류텐트,자일등)나경(輕)두랄루민과티타늄,유리탄소섬유따위의장비는보편화되었지만당시에는아주새로운것이었다.모리스엘조그대장의등반기를읽었을때그들의가벼운장비에놀라지않을수없었다.현대과학기술의정수를종합해서개발된신장비는제2차세계대전후히말라야등산에있어서큰진보를가져오게했다.

해발고도8,848m,9,800m고정로프-’77한국에베레스트


1977년한국에베레스트원정대는해발고도8,848m를오르는데9,800m고정로프를준비했고,알루미늄사다리100개를비롯해,알루미늄스노하켄500개,텐트30동,식량등을30kg단위로포장해총18톤을부산에서선박편으로인도캘커타로보냈다.아마이수치를보면2000년대이후에에베레스트를등반한젊은등반가라면엄청난물량이도무지믿기질않을것이다.

그러나한국대는총19명으로이당시의외국등반대에비하면소규모(?)였다.1973년이탈리아팀은대원수만64명(8명등정),일본팀은대원수48명이었다(등정실패).1975년영국크리스보닝턴남서벽팀은대원22명에고소포터41명,아이스폴셰르파29명,BC고용인14명에원정대가직접운반한물량은산소통143개를비롯해총28.8톤이었다(5명등정).

이렇게대규모원정대가꾸려질수밖에없는이유가있었다.요즘은에베레스트베이스캠프는티베트측이나네팔측에거의1,000여명이머물러원정대간에서로협조를하고또쿰부아이스폴에는네팔사가르마타환경보존위원회(SPCC·SagarmataPollutionControlCommittee)가미리사다리를설치해놔각원정대가3,000달러의이용료를지불하면된다.고정로프는아예준비하지않는팀도있다.따라서많은사다리와로프,그리고그것을설치할고소포터가필요없게되었다.

그러나1977년당시에는시즌에한팀만입산허가를내주어베이스캠프에는당연히한팀만머물러등반했기때문에대원과고소포터가많은대규모원정일수밖에없었다.아이스폴통과에만도엄청난시간과노력과장비가필요했다.따라서인원수도,식량과장비도넉넉해야만했다.

카트만두를떠나람상고에서걷기시작한지꼭21일만에베이스캠프에도착했다.1980년대말부터는로컬항공을이용해루클라까지40여분이면도착해걷는일수는절반으로줄었다.또카라코룸의발토로빙하에위치한8,000m급원정대들도로컬항공과지프도로의개설로도보캐러밴일수가현격히줄었다.

▲1977년에베레스트원정대장비들1가죽이중화.2휘발유스토브와코펠.3산소마스크.4끈으로묶는아이젠.5키슬링형태의배낭.6우드샤프트의피켈과아이스햄머.7다운침낭.

’77에베레스트팀은우모복,등산화등상당수의개인장비와고소텐트,가스카트리지등은일본에서구입했고,프랑스산소50통은문제가생겨전년도정찰때미국원정대로부터구입한나사(NASA)제품산소50통을사용했다.등산화는프랑스제‘가리비엘마칼루’로무거운가죽이중화를신었고,아이젠착용은일일이끈으로묶어야했으며,등반도중휴식할때마다끈이느슨해져있지않나점검은필수였다.배낭은키슬링형태와프레임이달린지게형태를사용했고정상등정일에는우모복을입었고우모침낭을썼다.

통신장비로는세계최고급의일제소니무전기를사용했는데2㎏이넘는무게였다.에베레스트정상에서태극기를높이든고상돈대원의사진을보면커다란무전기가가슴에매달려있다.

베이스캠프에메일러너(MailRunner)를고용해원정대원들의편지나메모를가지고남체바자르에있는간이전신소에내려보내카트만두전신국으로무선통신을취하면,전신국에서이를주네팔한국대사관으로전달해한국으로텔렉스전문을보냈다.

원정등반후장비팔아원정비용충당하기도-1980년대


1980년대등산장비는그기능은발전하고무게는경량화된다.등산화는무거운가죽신발에서가벼운플라스틱이중화로대체되고스틸카라비너는두랄루민으로,철소재의바르트훅과스나그등확보장비들은티타늄소재로바뀐다.

이때까지만해도한국은가난했고원정대는어느팀이나할것없이자금난을겪었다.그래서원정등반후에카트만두에서장비를팔아비용을충당하기도했다.이것은한국뿐만아니라유럽국가도마찬가지였다.특히동유럽국가들이심했다.폴란드의보이체크쿠르티카는아예자신의직업을원정밀수업자라고하며당해원정에서물건을팔아다음원정비용을벌어서등반했다고한다.

이러한행태는심해져폐해가나타난다.장비판매에재미를붙인일부원정대는한국에서값싼국산배낭과신발등을선박컨테이너에가득싣고가카트만두에서판매차액을남겼다.심지어트럭몇대분을가져다파는장사를한원정대도있었다고한다.이는,원정대물품은세관통관시소모품을제외하고재반출을담보로무관세의무환물품으로간주돼통관되는것을악용한것이다.이러한형태의원정도이후네팔의장비유통망이정착되고운송수단이점차선박에서항공편으로바뀌며사라졌다.

첨단등반을가능케한첨단장비-1990~2000년대


고산등반의최대의적은무게다.공학과소재의발전은장비와의류의무게를초경량화하고기능은극대화된다.이첨단장비는첨단등반을가능케했다.

방수투습의고기능원단으로제작된재킷,가벼우면서보온성이뛰어난다운의류,조작이간편한원터치아이젠,1kg무게의2인용텐트,유리섬유소재의가벼운산소통,에어매트리스,신소재로개발된삼중화,밝으면서전지수명은긴LED헤드랜턴,휴대폰크기의무전기등이다.또베이스캠프에서위성전송인터넷으로일기예보를받으며정상에서스마트폰으로자신의모습을담은사진을실시간전송하는시대가되었다.

이러한의류와장비의발전은히말라야등반자에게안전성을높여주었고알파인스타일과단독등반등극한적알파인등반을실현케하는바탕이되었다.1970년대의김정섭대장이지금의베이스캠프모습과휴대장비를보면어떤느낌일까!

-글·김창호기획위원서울시립대OB/월간산-



Leave a Reply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