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 한양도성 걷기 ④ *-

서울한양도성걷기④어둠에빛나는성곽이예있으니…

  • 혜화문~낙산~흥인지문~광희문3.2㎞
  • 혜화문-숙정문대신북쪽의큰통로가되다

    사소문(四小門)중의하나로북동쪽에지어진혜화문(惠化門)은실질적인큰문으로기능했다.본래북대문으로만들어진숙정문이북악산깊은산중에위치한탓에실질적인통로의역할을하지못했기때문이다.또혜화문이사람들의왕래가많았던경원가도상에있었던것도대문의역할을하는큰이유가되었다.애초에지어진혜화문은구한말까지명맥을유지하며지금의창경궁로언덕위를지켰으나일제강점기때전차로를낸다는명목으로완전히헐리고말았다.지금의혜화문은1992년에새로복원한것으로원래자리는차량소통이많아북쪽으로20m정도옮겨져서세워졌다.

    ▲낙산야경의제1경으로꼽는흥인지문방향앵글.

    혜화문과낙산은창경궁로너머로지맥이이어지지만찻길을건너는횡단보도가없어서200m정도떨어진한성대입구역을통과해서돌아가야한다.갈곳을코앞에두고돌아가는것이못내아쉽지만서울시에서혜화문과낙산을잇는구름다리를계획하고있어몇년후에는원래의성곽을이어걸을수있을것으로보인다.

    아무튼지금은한성대입구역5번출입구로들어가서4번출입구로나와야혜화문에서낙산성곽으로진입할수있다.그나마다행인것은복잡한좁은골목을굽이굽이돌아가야오를수있었던낙산을2010년전체적으로정비해창경궁로에서곧장낙산성곽을따라오를수있도록했다는것이다.

    ▲낙산성곽은밤마다화려한빛의드레스를입으며놀라운변신을한다.

    낙산성곽-조선왕조의장자계승이어려웠던이유

    낙산은쉬엄쉬엄걸어도20분이면정상에닿을수있을만큼짧고도유순한길을내어놓는다.내사산중에가장낮다는것보다는작은언덕이라고칭하는것이더적확한표현이겠다.본래낙산이자리한한양도성의좌청룡자리는남자와장자(長子)를관장하는곳인데,낙산이인왕이나북악에비해상대적으로기가낮고허하다보니조선왕조내내장자보다는지손들이잘되었고,여인들과외척의기세가등등했다고보는풍수적인시각이오래전부터입에오르내리고있다.또외적의침입이잦았던것도풍수가들은이낙산의지세에서이유를찾곤한다.

    이런이유로한양도성의건축을구상할당시정도전과무학대사는북악산주산론과인왕산주산론을놓고의견이대립했다고한다.인왕산주산론을편무학대사는지금처럼도성이남향으로서면낙산인좌청룡이허약해져서장자계승에큰어려움이닥칠것이라고보고동향을주장했다.결과적으로유학자인정도전의‘군자는남쪽을향해정치를한다’는주장이받아들여져서지금처럼종묘와사직단,궁궐이남쪽을향해들어섰고,각방위에맞춰사대문과사소문이건축되었다.

    ▲서울성곽길3구간개념도*일러스트제공및저작권자:(사)한국의길과문화www.tnc.or.kr-(사)한국의길과문화홈페이지자료실에서‘서울한양도성걷기’소책자PDF를국·영·일문으로다운로드받을수있습니다.

    실제로조선왕조는27대를이어오는동안장자계승을단일곱차례밖에하지못했다.그마저도대부분단명하거나단종처럼왕위를찬탈당하고,연산군처럼불행하게일생을마감한경우가대부분이다.장자로서보위를물려받아제대로치적을이뤄낸왕은숙종한명뿐이라고해도무방할정도다.

    낙산이조선왕조의장자계승을막고환란을불러일으켰다는주장과달리성곽을따라이어지는길은부드럽기그지없다.낙산은봉긋솟은봉우리가낙타와닮았다고하여낙타산이라고도불렸고지금도낙타낙(駱)자를이름으로쓴다.그밖의이름으로는우유를생산하는목장이있었다고하여우유의한자표기인타락산(駝酪山)이라고도불렸다는기록이있다.

    화강암으로되어있는낙산은예로부터산수가아름답고계곡의암석이수려하기로유명했다.덕분에도성5대명승지의하나로이름을올리기도했으며조선시대문인들과세도가들의별장과정자가여러곳들어서있던별천지이기도했다.

    ▲원래자리에서20m정도북쪽으로옮겨져서복원된혜화문.새에의한피해가많아홍예에봉황을그려넣었다는이야기가전해진다.

    근대들어낙산은성곽가까이아파트건축과같은개발에밀려성곽이훼손되는등부침이있었으나공원녹지확충5개년계획의일환으로아파트가철거되고근린공원으로지정됨은물론성곽까지완벽하게복원되어수많은시민들이찾는쉼터가되었다.특히밤에바라보이는야경은북쪽자락과남쪽자락모두훌륭하다.성곽에비춘야간조명너머로바라다보이는서울의야경은600년역사의산물과묘한대비를이루며신기루같은풍광을그려낸다.

    최근들어서울성곽과관련된대규모조성공사가벌어진곳도바로낙산의남쪽자락이다.흥인지문과연결되는낙산남쪽에있던병원건물을철거하고그곳에성곽복원과더불어공원을조성한것이다.덕분에흥인지문과낙산이연결되는통로가한층시원하고간결해졌다.

    ▲1광희문(光熙門)은빛나는이름과달리시신이나가는곳이라고하여시구문이라고많이불렸다./2낙산은공원녹지확충계획에따라순차적으로조성을마쳐누구라도편안하게걸을수있는산책로로탈바꿈했다.

    흥인지문~청계천~광희문


    유일하게옹성방어장치를한한양의성문

    동쪽에있어동대문이라는별칭으로도많이불렸던흥인지문(興仁之門)은2008년숭례문화재로인해한양도성에서유일하게원본으로남은대문이되었다.또도성의여덟문중에유일하게옹성(문밖으로반원형으로빙둘러친방벽)이축조된문이기도하다.이곳의방비를다른곳보다특별히튼튼하게한것은동쪽의지세가무르고낮기때문이다.

    즉,흥인지문이있는곳은청계천의하류로배후습지지역이기에땅이다른곳보다무른편이다.그런탓에기초공사때부터지반을단단하게다지는사전작업이필요했다.다른곳보다서너배더공이들어가다보니공사기간도길었다.실록에따르면농번기때다른곳의인부들은모두공사를마치고귀향했으나유독흥인지문일대만공사가늦어져서인부들의원성이많았다고했을정도다.

    ▲1낙산은지세가낮아조선왕조의장자계승이어려웠다는등의여러가지풍수에따른구설에휘말렸다.하지만지금은작은언덕에불과한높이로인해서울성곽탐방로중에가장편안한탐방로로자리매김했다./2비비추가반기는낙산성곽의7월.

    결과적으로취약한지형은다른곳보다서너배더공을들여가며갖가지방어기제를갖추게된다.이런현상은흥인지문에서청계천을거쳐광희문에이르는구간에서도발견된다.동대문운동장철거를하면서그밑에숨어있던성곽의방어장치인치성이드러났다.치성은성곽에서툭튀어나와성곽을효율적으로방어할수있도록도와주는구조물이다.그만큼한양도성은지형적으로취약한동쪽방어에크게신경을써서건축했다.

    물론아쉽게도이런훌륭한방어장치는정작전란이일어났을때는한번도제대로써먹질못했다.전쟁이나서외적이도성가까이접근하기도전에임금이재빨리몽진을한탓이다.그바람에도성에남아있던양민들만크게희생되는일이반복되었다.

    태조5년에건립된흥인지문은단종1년인1453년에고쳐지었고,고종6년인1869년에대대적인개축을통해지금의모습이이른다.이런이유로흥인지문의문루는조선후기의대표적인목조건축물로대접받는다.

    흥인지문을지나성곽의흔적을따라가면청계천을건넌다.예전에는다섯개의문이물길을막는청계천오간수문(五間水門)이있었으나지금은청계천변으로그축소모형만남아옛이야기를전한다.하지만오간수문의모습을짐작하게할수있는발굴터가동대문운동장터에서나왔다.거의온전한모습그대로문이두개인이간수문(二間水門)이발굴된것이다.두개의수문이남산에서흘러내려온물을통과하던곳에있었던것이다.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에조성된여러조형물들을보며계속해서성곽의흔적을따르면이번구간의종점인광희문(光熙門)을만난다.서울성곽마지막네번째순성구간인남산이바로이광희문에서시작된다.

    ▲한양도성여덟개문중에유일하게옹성으로방어에만전을기했던흥인지문.사대문중에유일하게원본이남아있는대문이다.

    -글·사진윤문기걷기여행작가,(사)한국의길과문화사무처장,/월간산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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