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경주,강릉등전국각지에남산은즐비하다.
애국가중‘남산위에저소나무철갑을두른듯~’에나오는남산은어디일까?흔히서울의남산이라고생각하지만정답은‘그럴수도있고,아닐수도있다’이다.이말은곧우리나라에남산이란이름을가진산이서울에만있는것이아니라는말이다.
서울사람들이야제집드나들듯다니는명동의남산(262m)이가장친근할터이지만경주사람들은금오산(495m)과고위산(467.9m)사이의능선과계곡전체를아울러부르는남산이더친근할것이다.이밖에도전국에걸쳐
남산의‘남(南)’이란한자로남쪽이란의미를가지고있다.
반면남쪽이란뜻말고도‘앞쪽’이란뜻도있다.1527년(중종22)최세진(崔世珍)이어린이의한자학습을위해지은책인<훈몽자회(訓蒙字會)>에서는‘앞은南,뒤는北,좌를東,우를西’라서술했다.이는북방에서내려온민족이뒤를북쪽이라칭하고,앞을남쪽이라칭한것에서기원한다.또한풍수지리상주산을마주보는산을일컫기도한다.
이렇게따져보면남산은‘남쪽에있는산’을말하기도하고,‘동네앞에있는산’을지칭하기도한다.또한남산은‘도읍이있는곳의앞산’을지칭하는보통명사이기도하다.조선의도읍지였던서울(한양)은물론이고,신라의도읍지였던경주(서라벌),백제의도읍지후보였던충주,고려의도읍지였던개성(개경)에는어김없이남산이있다.
이러한다중적인의미때문에남산이라불리는산은전국적으로셀수없을정도로많다.말하자면우리나라산중‘남산’은사람으로치면‘김아무개’정도랄까.그중에서도가장잘알려진곳은서울남산과경주남산이다.서울남산은도심한가운데에떡하니버티고서있으면서시민들이여가를즐기는랜드마크중하나이며,경주남산또한신라시대불교의중심지로서‘노천박물관’경주에서빼놓을수없는명산으로이름을날리고있다.
남산정상에서는봉수대를볼수있다.봉수는나라에외세가쳐들어왔을때이를신속히알리려는일종의통신수단이다.낮에는봉수대에연기를피우고,밤에는불을피워신호를전달했다.
봉수대는지방5개처에서부터서울의남산사이를약수십리간격으로잇고있었다.서울남산의봉수대는전국각지에서올라온봉수신호가집결하는중앙봉수대였다.전국어느지역봉수대부터신호가시작되었건약12시간이면궁궐이있는남산봉수대까지도달할수있었다하니수도한양에서남산의역할이매우컸음을알수있다.
임진왜란때일본군은남산을‘왜장터’라부르면서주둔지로삼았고,자신들의성역처럼여겨1897년무렵에는남산일부를‘왜성대공원’이라이름짓고산길을닦아일본벚꽃수백그루를심었다.이때문에원래남산을지키고있던소나무가반이상사라지기도했다.또한앞서언급했듯이조선총독부가서울성곽을비롯한기존건축물들을파괴하고남산자락에조선신궁을세웠다.
이렇듯한반도의중심에서역사의희로애락을모두몸으로받아들인남산이건만,지금은명실상부‘
서울남산과유명도를견주는또하나의남산은경주남산이다.
경주남산은서울남산처럼시민들이여가를즐기거나휴식을취할수있는장소는많지않다.하지만경주남산은신라시대불국토를이룬곳으로역사적의미가있는장소다.
신라시조박혁거세의탄생설화가있는곳으로신라개국이래줄곧신라인과호흡을같이하며신성시되었으며,불교가신라에전파되면서부터는사찰이나암자등이집중적으로지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