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벽에세이 4

[암벽에세이|아름다운시절4]

8자매듭,카베스탕매듭,프루지크매듭,매듭,매듭들…

첫만남

열의가통했는지나는탈없이등산학교에입학하게되었다.

첫수업이있기전,수요일에예비모임이있었다.나는수유리등산학교사무실을찾아갔다.예비모임은저녁8시였다.거리에는어둠이내리고있었고,퇴근하는발자국소리가여기저기에낭자했다.

나는오랜만에사람들속으로들어가는기분이었다.집안에서오직글자들과싸우던시간이억겁처럼여겨졌다.설렘과두려움을안고나는지하계단을내려갔다.

문을여니,새로운풍경이나를맞았다.그곳은실내암장이었다!나는실내암장이라는곳을,벽에박힌신기한돌들을처음보았다.그것들은각양각색의모양으로경사가다른벽들에아기자기하게박혀있었다.나는눈으로돌들을좇았다.저마다의돌들이살짝웃으며제존재를알려왔다.이때까지만해도나는내가이들과깊은인연을갖게될줄몰랐다.낯선세계로가는배가‘뚜우’하고뱃고동을울리는것같았다.

이미몇명이와있었다.나는주춤주춤그들사이에가서앉았다.모두들젊은사람들이었다.생머리를뒤로묶은상큼한아가씨가들어왔다.그녀는모여있는우리들을일별하더니,여자인내곁으로와서앉았다.어색한침묵이우리들사이를메웠다.내옆에앉은그녀가내게목례를했고,나도그녀에게목례를보냈다.그녀가소곤소곤말을건네왔다.우리는어느새더붙어앉아있었다.그녀가자기의프로필을간략하게소개했다.의사소통을하기위한최소한의정보였다.자기는결혼을했고,직장에다니고있으며,아기는없다는것.직장이원주였는데서울로오게되어먼저서울에와있던신랑과근래에합쳤다는것.대학시절암장운동을한경험이있는데,이제제대로암벽을하고싶어등산학교에오게됐다는것등을얘기했다.꾸밈없고활달했으며,상큼했다.

나도말을풀었다.나는소설가인데,암벽을해보고그경험을소설로쓰고싶어왔다고했다.물론그럴마음이있기는했다.그러나나는이런식의소개를하는것이처음이었다.나는어디에가서도소설가라는것을여간해서밝히지않는편이었다.사람들의관심과시선이불편했고,그런분위기에서는자세와마음가짐이굳어지기때문이었다.나는군중속의한사람으로드러나지않게앉아있으면서사람들을관찰하고상상을펼치는게취미였고,그런시간들을즐겼다.그러노라면소설가로서의내목적이달성되곤했다.

이것은아마내출생이나성장과관련있을텐데,하여튼나는자라는동안내내유독남의시선을끄는것을싫어했다.초등학교시절에는선생님이반장을시키면다음날학교에가지않았다.어머니아버지가학교에가서어떻게든해결을하고와야그다음에학교에갔다.다행히도아버지는너무도작고허약한나의막무가내고집을저살기위한필연성으로이해하셨던것같다.그래서나는부반장은한적이있지만반장은한적이없다.수업시간에선생님이문제를내고“아는사람?”하고물으면아이들이“저요,저요!”하고앞다투어손을드는데나는한번도손을들지않았다.답을몰라도마구일어나며손을드는친구들도있었다.그러나나는항상답을알면서도단한번도손을들지않았다.친구들이틀린대답을하면‘저건아니야,답은이거지’속으로생각만했다.선생님이나를지목해시키면일어나야하고대답을하는동안모두들쳐다보는게싫어서였다.

지금같으면자폐에해당할만한성벽이었지만나는그런방식으로나를지키며요행히도잘성장해서입학시험에도붙고기자시험에도붙고결국소설가가되었다.그러나체질로굳은‘시선거부병’만은여전했고,공식적인자리가아닌한소설가라고밝히지않는데등산학교에와서는처음부터그걸밝히게된것이다.아마도너무이질적인존재인나를상쇄시키기위한본능적인도모였으리라.내옆에앉은어린그녀는나를보는순간나이가꽤많다는것을느꼈을텐데도세련되게나이를묻지않았다.또거북하게될까봐서인지자기나이또한밝히지않았다.잠깐사적인이야기를나눈우리는낯선무리속에서순간단짝이되었다.나중에,자기소개를할때보니,그녀의이름은이상미였고,나이는서른다섯,나의딸과같았다.

지금도등산학교생각을하면맨처음상미의인상이상큼하게떠오른다.그녀는직장생활과가정생활,산행활동을힘있게끌어나가고,틈틈이책을읽고,소설도아주좋아하며,1주일에한번씩멀리있는대학에강의하러나간다.나는그녀에게내소설책을사인해서주었고,그녀는무슨대회에선지상으로탄초크백과모자를내게선물로주었다.나는지금도암벽을할때헬멧안에그녀가준챙모자를쓰고그녀가준초크백을찬다.

그녀는지금은우리바로옆산악회인산빛산악회로갔다.나는골수회의멤버가되었는데,같은정승권등산학교산하이고친척집같은곳이긴하지만매주그녀를볼수없어서아쉽기그지없다.

우리는그날예비모임에서앞으로5주동안받게될등산학교수업에대한오리엔테이션을받았다.또매듭법에대한강의를들었고,그것을익혀오라는과제를받았다.

나는집에와서8자고리매듭,8자연결매듭,8자따라매기매듭,카베스탕매듭,프루지크매듭등을연습했다.잘되지않았다.

인연

첫수업이있던일요일에나는김성임과알게되었다.그녀가우리조로배정되었고,나와짝이되었던것이다.그녀는서른살정도로171센티미터의늘씬한키에아름다운외모를지니고있었다.저런처녀가어떤연유로암벽산행을하러왔을까궁금했다.그녀의말로는정승권등산학교산하에있는암벽클럽인등반사랑에아는사람들이있다는것이었고,그들이추천해서등산학교에왔다고했다.기초를익혀등반사랑으로가서그들과같이산행하고싶다고했다.

포돌이광장에서선인봉으로올라가며나는그녀와많은대화를나눴다.그녀는그날아침포돌이광장에30분가량늦게온터였다,그래서정승권선생님이그녀와여러차례통화를했고,우리모두기다렸다.그녀가헐떡거리며도착하자마자선인봉으로오르기시작했다.그날수업은선인봉앞면오른쪽에있는경송길1피치에서실기중심으로진행될예정이었다.성임은숨을몰아쉬며다가와자기가늦은이유를설명했다.바로어제가여동생의결혼식이었는데친척친지등밤늦게까지일이엄청많았고,오늘도저히올수없었지만억지로왔다는것,게다가도봉산역에서길을잘못들어엄한데로가다가돌아왔다는것등을얘기하며미안해했다.

아닌게아니라그녀의얼굴은좀부어있었다.그러나몸에밴교양이느껴졌고,부모의수준까지짐작되어좋은남자가있으면중매하고싶었다.그녀는사이를두었다가여동생이먼저결혼한데서오는미묘한심정을살짝내비쳤다.자매둘이자라다여동생이먼저결혼했으니허전하기도하고착잡하기도할것이다.나는충분히이해가되었다.그녀는나에대해이미알고있었다.예비모임후집에가서컴퓨터로내이름을쳐본모양이었다.“선생님,책많이쓰셨데요.”그렇게말하고는자기가국립중앙박물관학예사라는것을얘기했다.우리는산에오르며느닷없이문화적인대화에빠졌다.그녀는학부에서는인문학을공부한모양이었고,지금은미술사학전공인것같았다.석사인지박사학위논문을쓰는중이라고생각되었다.그녀는인문학,문학,사회과학등에대해폭넓은지식을가지고있었고,출판시장에대해서도잘알고있었다.나는마음이편해졌다.산에와서이런상대를만나기는어려운일이었다.나는그녀의연구분야를물었다.그녀는고려불화의아미타불이생각나느냐고하면서,아미타불손에쥐어져있는내가알수없는어떤것에대해얘기했다.나는순간수월관음도를떠올렸고,아미타불손에쥐어져있는버드나무가지같은것의상징을연구하지않나싶었다.대화가더깊어질사이없이우리는선인봉아래에도착했다.

오전에는암벽등반전반에대해,등반장비들에대해,확보하는법과매듭법에대해이론적인강의가있었다.현장에서실감나게교육하기위해정승권선생님은등산장비일체를모두지고올라오신것같았다.줄에죽걸어놓은장비의양이엄청났다.

점심을먹은뒤실기수업이시작되었다.우리들은하네스를착용하고헬멧을쓰고암벽화를신었다.서로의모습을쳐다보며웃었다.네사람씩조를이루어톱로핑방식으로슬랩을오르는연습을했다.암벽화의마찰력을이용해한발한발체중을실어가며바위를올랐다.성임이올라갈때는내가확보를보고,내가올라갈때는성임이바꾸어확보를봤다.우리조에는성임보다몇살많은송민영과송민영보다몇살많은양규옥이배정돼있었다.그들은둘이조를이루어연습했고,나중에는네명이섞여서연습을했다.그들은모두삼십대들이었다.

나는이들과하루종일경송길근처4개루트를오르락내리락했다.강사선생님들이중간중간에매달려무서워벌벌떠는우리들을격려하고지도했다.바위아래서볼때는경사가엄청나서도저히올라갈수없을것같았는데,막상모두들올라가고내려오고,나중에는선수처럼된친구도있었다.내게도뿌듯한하루였다.

성임은지금은의사와결혼해서청주에살고있다.시간의눈부신활약을실감하지않을수없다.우리모두내일어떻게될지누가알겠는가?

어디서무엇이되어다시만나랴

매주수요일저녁에등산학교사무실에서실내암벽교육이있었다.직장에서퇴근해오는시간에맞추어8시에수업을시작했다.집이인천등으로먼친구들은오지못했고,그러나대부분참석했다.

민경오강사선생님이직벽에서우리를지도했다.여자중에서는이상미와박방자씨가가장잘했다.상미는힘있게홀드들을짚어나갔고,다음스탠스가멀어도자신있었으며,방자씨는무용수가무용하듯이동작이아름다웠다.방자씨가할때는모두들감탄하며바라보았다.방자씨는아직40대로시원시원한경상도말씨에타고난친근함으로사람들의사랑을독차지했다.

김미연과김은영이제일어렸는데,은영은스물한살이었다.두사람은역시아직어린터라암장경험이없는데도열성적으로곧잘따라했다.

나는앉아서지켜보기만했다.강사선생님이해보라고해서한두번올라가보기는했지만동작이어설프고팔에힘이없어서과제를따라하지못했다.등산교육이끝나면나도따로실내암장에다녀야겠다고결심했다.실내암장에서팔힘을키우고밸런스를잡는것이내게꼭필요하다고생각되었다.돌아오는길에는모두뿔뿔이흩어졌다.

어느날은김미연과둘이수유역쪽으로걸어가게되었다.그녀는굵은뿔테안경을쓰고있었다.나는안타까워서입을뗐다.

“눈이너무예쁜데요.오늘은안경을썼네요.”

그녀의눈은정말너무나예뻤다.크고,둥글고….많은이야기를담고있었다.평소에도나는그녀의눈을자주쳐다보았다.그런데오늘은그눈을다가리는굵은테안경을쓰고있는것이다.

그녀는개의치않고깔깔웃었다.눈이피로해서저녁에는그냥안경을쓴다고.그러니까다른때는렌즈를끼고있었던모양이었다.알고보니그녀는초등학교선생님이었다.이제스물네다섯정도로,학교에부임한지오래되지않은것같았다.아이들을가르치는일과기타업무때문에예쁜눈을가리는것따위는안중에도없는것같았다.나는그녀의직업에임하는진정한자세와털털한성격에매료되었다.그녀는나를결혼하지않은사람으로여기고있었다.어쩐지그렇게느껴졌다고했다.우리는또깔깔웃었다.사실나는그런오해를상당히많이받는편이다.말하지않고그냥가만히있으면결혼하지않은사람이라고여겨진경우가종종있었다.

탄력있는공처럼젊음이팽팽했던스물한살은영은등산학교를졸업할때우리모두에게밤새정성들여쓴편지를주었다.인생이라는대양앞에선어린그녀가저보다먼저산우리들한명한명의얼굴을떠올리며편지를썼을그푸른새벽을나는지금도잊을수없다.
-글이청해님월간산20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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