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정에 흔들린 조선조 10대 왕 연산군

정치보다풍류를사랑했던연산군


[개설]
연산군(燕山君)은성종(成宗)의장남으로태어나1494년12월29일부친을이어왕위에올랐으나,두차례의사화를포함한각종폐정,그리고개인의향락을추구하면서정치를등한시한결과,1506년9월중종반정(中宗反正)에의해왕위에서쫓겨났고그해11월에세상을떠났다.연산군의묘소는서울특별시도봉구방학동산77번지에있다.[연산군의묘가방학동에위치하여방학동이야기를하면서한많은삶을살다간연산군의이야기를빼놓을수가없어그개요를간단하게소개하기로한다.누가뭐래도연산군이어머니를그리는모정을무조건나무랄수만은없다.성종인아버지가아들연산군을이렇게만든것은아니라도어느정도예측은하였을것이다.그가어머니의한을풀어드리는것이아들의도리라는것을알았으면,어머니를복위시킨것으로멈추었어야했다.그는삶에회의를느꼈고,임금으로써의한계를의식하면서그의명석한두뇌는술에찌들어갔고,유흥에빠져들게되어그는가슴에맺힌한을극복하지못하고임금으로써의무와책임을다하지못한것은그스스로가반증을불러왔다고봐야한다.]

[탄생과즉위]
연산군[재위1495~1506년]의이름은이융(李㦕)으로1476년(성종7)11월7일에성종[재위1470~1494]의장남으로태어났다.모친은폐비(廢妃)윤씨(尹氏)로봉상시판사(奉常寺判事)윤기견(尹起畎)의딸이다.폐비윤씨는1473년(성종4)3월19일에후궁으로간택되면서숙의(淑儀)에봉해졌다가,1476년(성종7)8월9일에왕비에책봉되었고,11월7일에연산군을출산하였다.하지만연산군이4살때인1479년(성종10)6월2일에폐서인(廢庶人)되었다가,1482년(성종13)8월16일에사사(賜死)되었다.

모친이폐서인되어사사되었음에도불구하고장자였던연산군은8세가되던1483년(성종14)2월6일에왕세자로책봉되었다.14살이었던1488년(성종19)2월6일에는병조판서(兵曹判書)신승선(愼承善)의딸을세자빈(世子嬪)으로맞아들이며그지위를공고히했다.1494년(성종25)12월24일에성종(成宗)이38세의젊은나이로승하하자,12월29일에창덕궁(昌德宮)에서왕위에올랐다.

[사화(士禍)와폐정(廢政)]
성종대에새로운정치세력으로김종직(金宗直)의제자들인사림파가득세하면서,기득권층이라할수있는훈구대신세력과대립관계를구성하였다.연산군즉위이후훈구대신세력들의사림에대한대대적인공세가펼쳐지면서두차례에걸친사화(士禍)가일어났다.첫번째무오사화(戊午士禍)는『성종실록(成宗實錄)』편찬과정에서김일손(金馹孫)의사초(史草)에실린김종직의「조의제문(弔義帝文)」을문제삼으며,1498년(연산군4)7월에일어났다.이는세조(世祖)에게왕위를찬탈당한단종(端宗)을항우(項羽)에게죽은의제(義帝)에빗댄글로,연산군의증조할아버지인세조를비난하였다고할수있다.

이에이와연루된사림인사들을대대적으로처단하였다.김종직은부관참시(剖官斬尸)를당하였으며,김일손(金馹孫),권오복(權五福),권경유(權景裕)는능지처사(陵遲處死),이목(李穆),허반(許磐)등은참수(斬首)되었다.죽음을피한인사들도유배등중형을받았다.두번째갑자사화(甲子士禍)는연산군의생모인폐비윤씨의폐사와관련하여일어났다.1504년(연산군10)3월20일에폐비윤씨의모친인장흥부부인(長興府夫人)신씨(申氏)로부터모친이폐사된사유를전해들은연산군이한밤중에모친의폐사를도모하였다고지목된성종의후궁소의(昭儀)엄씨와정씨를창경궁뜰에서손수때려죽이는패행을시작으로,모친의폐사와관련된인사들을참혹한형벌로죽이는사단을일으킨것이다.

심지어친할머니인인수대비(仁粹大妃)를들이받아죽이는패륜을저지르기도하였다.또세조대의공신이었던한명회(韓明澮),정창손(鄭昌孫),심회(沈澮)등을폐비논의에참여한12간(奸)으로몰아부관참시한후에효수하기에이르렀다.훈구와사림가리지않고많은인사들이처형당한사건이었다.두차례에걸친사화이후에도폐정은계속되었다.자신을비방하는한글벽서가나붙자한글사용을금지하고언문청(諺文廳)을폐쇄하기도하였다.


또1504년8월15일에경연(經筵)을정지하는것을시작으로,12월4일에는야대(夜對)와윤대(輪對)등도정지하였고,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을혁파하고,12월27일에는홍문관(弘文館)을폐지하였으며,나아가교육기관이었던성균관(成均館)을폐하여유흥장으로삼는등자신의행동을비판하는인사들을탄압하였다.이후연산군은정치에신경쓰기보다는개인의향락을추구하였다.1504년갑자사화이후에팔도로채홍사(採紅使)를보내아름다운여자들을강제로징발하여흥청(興淸)또는운평(運平)이라칭하고향락에동원하였다.

1505년(연산군11)에는장악원(掌樂院)을원각사(圓覺寺)로옮기고,그곳에서가흥청(假興淸)200,운평(運平)1000,광희(廣熙)1000을상사(常仕)하게하면서이들에게기예를가르치게하였는데,당시연산군이향락에빠져있었던것을잘보여준다.나아가기녀출신장녹수(張綠水)를후궁으로삼는등부적절한행위를많이했다고알려져있다.이렇게풍류에빠져있던연산군은정치를등한시할수밖에없었고이는백성들의고통으로이어졌다.

자신의향락을위해경치좋은곳에금표비(禁標碑)를세우고민간의출입을통제하였는데,그범위가너무넓어백성들의생업에지장을줄정도였다.『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12년7월18일기사에따르면,왕이금표안길을따라두모포(豆毛浦)에놀이를가므로궁녀1천여명이따랐었는데,왕이길가에서간음하였다고하니,자신의유흥을우선시하고정사를소홀히했다고할만하다.

[중종반정과사망]
이와같은연산군의폭정과방탕이지속되자,나라안이어지러워졌고민심은소란해지기시작하였다.이에1506년9월2일에성희안(成希顔),박원종(朴元宗),유순정(柳順汀)등이주동한중종반정이일어났다.연산군은폐위되어강화도교동(喬洞)에안치되었고,숙용(淑容)장녹수등후궁들은참형(斬刑)에처해졌으며,이복동생인진성대군(晉城大君),곧중종(中宗)이왕으로옹립되었다.이어9월24일에폐비신씨는친정집을수리하여옮겨가게하고아들폐세자이황,창녕대군(昌寧大君)이성(李誠)등이사사되었다.

연산군자신도반정두달후인1506년11월6일에31세의나이로병사하였다.이에강화(江華)에왕자군(王子君)의예에따라장사지냈다가,1512년(중종7)12월12일에폐비신씨의상언(上言)으로1513년2월20일에양주(楊州)해촌(海村),곧지금의서울연산군묘(燕山君墓)로이장하였다.서울연산군묘는도봉구방학동산77번지에위치하며,사적제362호로지정되어관리되고있다.슬하에자녀는부인인폐비신씨소생으로6남1녀가있었으나아들중네명은일찍죽었다.또후궁소생으로2남6녀가있었다.중종반정시아들네명은모두사사되었다.

[연산군에대한평가]
일반적으로연산군에대한평가는부정적이다.두차례에걸친사화와갖가지패행들의원인으로연산군개인의나쁜성품이지목되기도하였다.이러한평가는『연산군일기』의논찬(論贊)이큰영향을미쳤다.연산군의친모폐사사건에의한정신적충격,혹은편집증과같은정신질환등을원인으로지목하기도하지만,이역시연산군의성품이포학하고사치와향락을즐긴것을부정하는것은아니다.반면분명연산군대의폭정은도를넘어선감이있는것을부정하기는힘들지만,이를온전히연산군의포악한성격으로돌리기힘들다는의견들도있다.

즉두차례에걸친사화는당시정계가가지고있었던대립구도가중요한원인이었고,연산군은왕권강화차원에서이를활용한것이었다고보는것이다.당시정국은사림들이중앙정계에본격적으로등장하면서강력한왕권보다는사대부들이중심이되는정치를추구하였는데,이는필연적으로왕권과의대립을가질수밖에없었고그것이사화로이어졌다는것이다.연산군이자신을비판하는세력을탄압하기위해언관직을폐지한것이아니라,해당관청과관직은사림들이추구하는정치구조에서핵심적인역할이어서이를견제한것이었다고보는것이다.

아울러연산군의향락추구와여러가지음행들은반정이후에연산군을폭군으로몰기위한음해였다고보기도한다.흥청과운평등을육성한것도개인의향락이주목적이라기보다는왕권의위엄을보여주기위한의전용이라고이해하기도한다.즉연산군은군주중심의전제정치를추구하였고,이에대한반발로반정이일어났으며,이후반정을정당화하기위해연산군의치세를과도하게부정적으로몰아갔다는것이다.이러한견해에따르면연산군은풍류를즐기면서패도주의를지향한군주라할수있겠다.

하지만이러한견해들도당시연산군의행위들이지나쳤다는것에는동의하고있다.군주로서의책무를다하면서풍류를즐기는것이아니라,정치를등한시하면서개인의향락을추구하여결국왕위에서쫓겨나비참한최후를맞이했다고이해하는것이일반적이라하겠다.


[출처]향토문화전자대전도봉구의특별한이야기집필자홍승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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