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재지 : 충청북도 진천군 문백면 도하리 510-10
충청북도 문화재자료 제83호
[표암 강세황 선생 묘소 안내판]
[안내판과 묘소로 가는 길 입구]
근처 공터에 주차를 해 놓고 여기서부터 걸어
한 구비 돌면 곧장 표암 강세황 선생의 묘소가 보입니다.
[豹菴(표암) 姜世晃(강세황) 묘소 전경]
본관은 晋州(진주). 자는 光之(광지), 호는 添齋(첨재). 豹翁(표옹).
路竹(노죽). 山響齋(산향재). 豹菴(표암), 시호는 憲靖(헌정).
숙종 39년(1713) 한양에서 태어나 정조 15년(1791) 세상을 떠났다.
[신도비와 안내판 묘소 전경]
조선 후기의 대표적 문인 화가이다.
진주 강 씨 5대 가운데 강세황은 조선 후기 유명 화가인
김홍도와 신위의 스승이자 그는 詩(시). 書(서). 畵(화)에 고루 뛰어난
三絶(삼절 : 3가지 재주에 뛰어난 사람)이었고,
높은 안목을 가진 감식안이 자 서화 평론가로 이름이 높았다.
진경산수화를 발전시켰고 풍속화와 인물화를
유행시켰으며 새로운 서양화 법을 수용하는 데도 기여하였다.
[남편이 담은 신도비와 안내판 묘소 전경]
남편이 디카로 담은 표암 강세황 선생 묘소 전경
디카로 담은 사진이 휴대폰으로 담은 것보다 때깔이 더 좋은 것 같네요.
남편이 담은 답사 사진 속에는 제가 있네요. ㅎㅎ
[안내판 글 내용]
[姜世晃(강세황) 神道碑(신도비) 전경]
신도비는 거북 대좌 위에 높이 173㎝, 너비 61㎝, 두께 31.5㎝의
烏石(오석) 비신을 세우고 두 마리 용이 여의주를 다투는 형상의 이수를 얹었으며,
그 주위는 화강암으로 보호 난간을 둘러놓았다.
[좌측에서 담은 姜世晃(강세황) 神道碑(신도비) 전경]
신도비는 4면 비로 비제는
‘正憲大夫漢城府判尹諡憲靖豹菴姜公世晃神道碑銘’
(정헌대부 한성부 판윤에 헌정 표암 강공 세황 신도 비명)이다.
[姜世晃(강세황) 神道碑(신도비) 뒤 전경]
비문은 문학박사 李家源(이가원)이 지었고
글씨는 姜亨植(강형식)이 썼으며 8세손 강태수와 강태관이 세웠다.
[豹菴(표암) (강세황) 선생 묘소 전경]
할아버지는 판중추 부사를 지낸 姜栢年(강백년)
아버지는 예조판서를 지낸 姜鋧(강현). 어머니는 광주이 씨 李翊晩(이익만)의 딸이다.
[豹菴(표암) (강세황) 선생 묘]
할아버지, 아버지에 이어 강세황 자신까지 71세에 耆老所(기로소)에
들어감으로써 이른바 三世耆英之家(삼세기 영지가)로 칭송받았다.
耆老所(기로소)는 조선시대에 연로한
文臣(문신)들을 예우하기 위해 설치한 명예 기구이다.
8세에 시를 짓고 13, 14세에 쓴 글씨를 얻어다
병풍을 만든 사람이 있을 정도로 일찍부터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32세 때 가난으로 安山(안산)으로 이주하였다.
이곳에서 처가인 진주유씨 집안으로부터 물질적, 정신적
도움을 받으며 그의 예술 세계를 형성해 갔다.
[좌측 문인석과 망주석 전경]
[우측 문인석과 망주석 전경]
床石(상석)과 香爐石(향로석)을 세우고 좌우로
文人石(문인석), 望柱石(망주석) 각 1조를 갖춘 配置形態(배치 형태)는
묘소의 형태와 석물들로 별다른 특징이 없는 조선시대 일반형 묘소라 합니다.
[우측 文人石(문인석)]
[좌측 文人石(문인석)]
[묘소 뒤에서 담은 안산 전경]
평생 동안 추구한 그의 서화의 세계는 궁극적으로
習氣(습기)도 俗氣(속기)도 없는 경지에 이르는 것이었다.
산수. 화훼가 그림의 주 소재였으며, 만년에는 묵죽으로 이름을 날렸다.
[묘소 뒤에서 담은 안산 전경]
작품으로는 ‘添齋畵譜(첨재화보)’, ‘벽오청서도’,
‘표현연화첩‘, ‘송도기행첩‘, ‘삼청도‘, ‘난죽도‘, ‘피금정도‘,
‘臨王書帖(임왕서첩)’등이 있으며, 54세 때 쓴 ‘豹翁自誌(표옹자지)‘에 있는
자화상을 비롯하여 7~8폭의 초상화를 남겼다.
李瀷(이익), 沈師正(심사정), 姜熙彦(강희언) 등
여러 사람들과 교유하였으며, 그에게서 그림을 배운 제자로는
金弘道(김홍도)와 申緯(신위)가 주목된다.
[조부 翠適堂(취적당) 姜桂年(강계년) 묘소 전경]
강세황 묘역 뒤편에는 조부 翠適堂(취적당) 姜桂年(강계년)의 묘소이다.
[좌측 문인석]
[우측 문인석]
[묘비와 조부 翠適堂(취적당) 姜桂年(강계년) 묘]
2개의 봉분 중 강계년 선생과 初娶(초취) 화순최씨와 합장 봉분과
그리고 二娶(2취) 파평윤씨와 三娶(3취) 강진 유 씨 합장 봉분으로
4위 합묘 쌍분으로 조성되어 있다 합니다.
[조부 翠適堂(취적당) 姜桂年(강계년) 묘 뒤에서 담은 안산 전경]
[내려오며 다시 담아 본 豹菴(표암) 姜世晃(강세황) 선생 묘와 안산 전경]
다시 시작하게 된 답사가 참으로 고맙고 행복합니다.
영원히 함께 할 수는 없겠지만, 좀 더 오래 누리고 싶은 작은 욕심입니다.
아니 어쩌면 큰 욕심이기도 하겠지만, 주어진 몫의 내 삶을 충실히 살아가려 합니다.
데레사
2018년 4월 20일 at 7:56 오전
안산의 단원구는 김홍도가 강세황에게서 그림을 배우러 다닌곳이라
해서 그렇게 이름을 붙였다고 해요.
안산에는 단원구도 있고 단원고도 있어요.
강세황의 묘는 진천에 있군요.
이제 많은곳을 다니시게 되어서 축하합니다.
초아
2018년 4월 20일 at 9:07 오후
안산의 단원구가 그런 뜻이 깃들어 있는 곳이었군요.
첨 듣습니다.
예, 진천에는 많은 명당장소가 있다합니다.
살아 용인 죽어 진천이란 말도 그래서 생겼다 합니다.
그러나, 그건 틀린말이라 하네요.
살아 진천 죽어 용인이 맞다 합니다.
뜻 풀이를 하려면 길어서 생략합니다.
아직은 조심 또 조심스럽습니다만,
그래도 이만하기에 얼마나 다행인지 참 고마운일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