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회루, 1867 (고종 4)년에 재건.]
[경회루, 1867 (고종 4)년에 재건.]
[나는, 2015년 12월에, 한국에 볼 일이 있어서,
서울 한복판에 있는 호텔(Hotel)에서, 며칠간 머무른 적이 있다.
그 때, 나는 세종로를 걸어 다니면서…
그곳에서 ‘데모하는 수많은 사람들’도 보게 되었고,
‘미국 대사관을 겹겹으로 포위하여 지키고 있는 경찰들’도 보게 되었고,
‘경복궁(景福宮)’도 들어가 보게 되었다.
사십수년(四十數年)만에 들어가 보게된 경복궁은,
그야말로, 아주 많이 변해 있었는데…
단장(丹粧), 정리 정돈, 그리고 관리 상태가 아주 잘 되어 있었다.
위의 사진은, 바로, 그 때, 그곳에서, 찍은 사진 中의 하나인데,
그 곳에서 사진을 찍으면서…
나에게 떠오른 생각
또는 내가 느낀 점을, 적어 놓은 것이 바로 다음의 글이 되리라.]
신미양요(辛未洋擾)
~ 이상봉 / 철학박사, 문인
한국 교과서에 실린 내용-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내용:
서구 열강 中의 하나인 미국이, 제너럴 셔먼호 사건을 빌미로,
조선과의 통상 관계 수립을 목적으로,
1871년 6월 1일 (고종 8년, 음력 4월 14일) 조선의 강화도를 침략 하였다.
그러나 어재연 부대가 광성보에서 끝까지 항전하여 미군을 물리쳤다.
신미양요 이후 조선은 척화비(斥和碑)를 세우고 쇄국정책을 강화하였다.
[* 그 누가 읽어 보아도… ‘조선측의 100% 승리’로 기술(記述)되어 있다.]
[참고:
제너럴 셔먼호 사건은 1866년(음력 7월 12일) 평양의 군민(軍民) 들이
미국의 상선(商船) General Sherman(제너럴 셔먼) 호(號)를 불태워버린 사건이다.
이 배는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가, 평양에서 통상(通商)을 요구하다가,
거절 당하자 행패를 부렸는데,
이에 관민들이 배를 소각하고, 美國 선원들을 처형 하였다.
그 때의 미국은 제 17대 대통령 Andrew Johnson (재임기간 1865-69) 때 였다. ]
미군(美軍) 측의 기록:
[필자 주:
1871년, 당시의 미국은,
제 18대 대통령인 Ulysses S Grant (재임기간 1869-77) 때 였는데…
제 16대 대통령인 Abraham Lincoln (재임기간 1861-65) 때에,
남북전쟁(Civil War)이라는 것을 겪은 후 얼마 지나지 않은 시기였기 때문에…
사실상 다른 나라와의 전쟁에는 아무런 관심 조차도 없었던 시기였다.]
미군(美軍)의 공식 보고서에 실린 내용과
기록으로 남겨진 사진을 아주 간단하게 요약(要約)하면 다음과 같다.
병력
조선군(朝鮮軍): 약 500명
미군(美軍): 군함 5척, 대포 90문, 병력 800명
피해 규모
조선군: 243명 전사, 100명 익사, 20명 포로
미군: 3명 전사, 10명 부상 (강화도의 갯벌에 넘어지고 빠져서 사망)
(조선군 시체)
(조선군 포로)
이 外에,
당시 참전 군인 William Greenpeace 의 기록과
가족에게 보낸 편지들이 보관되어 있다.
다음은 그린피스(Greenpeace)가 기록하여 놓은 것이다.
“흰옷을 입은 243명의 시체가 성채 안과 주변에 누워 있었다.
그들 중 다수는 이제는 다 밖으로 튀어나온 흩어진 솜 갑옷을,
아홉 겹으로 솜을 두른 갑옷을 입고 있었다.
살이 타는 역겨운 냄새가 공기 중에 진동했다.
어떤 부상자들은 자신의 고통보다
미국인들을 더 끔찍이 두려워하며 서서히 불에 타 죽어 갔다.”
결과:
광성보에서의 전투는 미군의 승리로 아주 쉽게 끝났다.
미군은 광성보 진중(陣中)에 게양되어 있던
조선군 대장(大將)의 군기(軍旗)인 ‘수(帥)’자(字)기(旗)를 끌어내리고,
대신 성조기(星條旗)를 달았다.
그리고 나서,
조선측에서 통상(通商)에 대한 아무런 대답이 없자,
6월 12일 아침에, 다음의 목적지를 향하여,
미군은 강화해협을 빠져 나갔다.
그들이 휩쓸고 지나간 광성보에는 남아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다만 최후의 순간까지 싸우다 죽어간 조선軍의 시신(屍身)만이
무너지고 깨진 광성보를 지키고 있었다.
좀더 자세한 당시의 상황은 다음과 같다:
조선군(朝鮮軍)은 창과 칼로 미군(美軍)과 대적했다.
여러가지 악조건 속에서도 조선군(朝鮮軍)은 분전(奮戰)했다.
함포를 맞은 진지는 부서지고 불타 올랐으며,
최신예 무기 앞에 조선 군사들은 쓰러져 갔다.
그래도 누구 하나 물러서는 사람이 없었다.
최후의 순간까지 그들은 목숨을 다해 싸웠다.
무기가 떨어지자 돌멩이를 집어 던지고
심지어 모래와 흙을 집어 뿌리기도 했다.
최후의 순간에, 바다에 뛰어들거나 스스로 목을 찔러 자결하는 사람도 있었다.
조선군은 적의 포로가 되느니 차라리 죽음을 선택했다.
후기:
신미양요 당시, 미군에게 빼앗긴 ‘어재연 수자기(帥字旗)’는
그후 어떻게 되었을까?
어재연 帥字旗는 2007년 부터 ’10년 대여’ 조건으로
한국에 들어와 있다!고, 되어 있다.
’10년’ 이라는 기간 제한과 ‘대여’ 라는 표현에
반감(反感)이 드는 건 어쩔수 없겠지만…
약탈 문화재의 세계에서는 ‘10년 대여’ 조건도
결코 박(薄)하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달갑지는 않겠지만 받아 들일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그리고,
사실상 열악하기 그지없는 한국의 군사 유물 보존 실태를 고려한다면…
냉정하게 말해서, 저 깃발은 미군이 가져가서 잘 보존해준 덕분에,
그나마 지금까지 살아 남을 수 있었던 것이지…
안 그랬으면 한국은 ‘어재연 帥字旗’를 영영 다시 보지도 못했을 것이리라!
엄연한 사실이 한가지 더 있으니…
전시 교전(戰時 交戰)으로 인해 빼앗은 정당한 노획품-
민간에서 약탈한 물건이 아닌, 군사의 병기나 군 피복, 서류 등 군사 및 정부 물품-은
國際法 上(국제법상) 별도의 조약으로 규정되어 있지 않은 한,
상대국(相對國)에 반납해야 될 의무가 전혀 없다!는사실이다.
~ Sang Bong Lee, Ph. D,
Dr. Lee’s Closing Arguments,
Dr. Lee’s Lessons: Discovering Your Nature,
Dr. Lee’s Iconocla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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