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상봉 박사의 영성강좌: “나, 지금 바로 여기에!”
유일신교(唯一神敎)와 이단(異端)논쟁
~ 이상봉 / 철학박사, 문인
유일신교(唯一神敎)에는 교리(敎理)라는 것이 있다.
인간이 살아가야 할 목적과 방향을 지시하는 것이,
바로, 唯一神(유일신)이라고 정해놓고 있는데…
그러한 교리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 바로, 교조(敎祖)의 언행이다.
그런데, 그 교리에 대한 해석이 다양(多樣) 할 수 밖에 없으니…
그 이유는?
교리를 해석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사람이니까…
(이미, 죽은 교조가 되돌아 와서 교리를 해석해 줄 수가 없으니까…)
자연히 그 해석이라는 것이,
사람의 숫자만큼 다양해 질수 밖에 없지 않은가!
따라서,
그러한 해석의 차이를 조정하지 않고, 그대로 방치하게 되면,
그 조직은, 수많은 해석과 다양한 의견의 차이로 인하여,
공중분해(空中分解) 되어 버릴 수 밖에 없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해석의 차이를 감독하고 조정하고 통제하여,
종교조직의 분열을 막아야만 되게 되어 있으니…
바로, 그러한 일을 하는 사람이 전문적인 성직자(聖職者)다.
그래서, 유일교에는 전문적인 성직자가 반드시 필요한 존재가 된다.
그리하여, 유일신교의 교리는, 전문 성직자의 해석을 통해서만,
교도(敎徒)들에게 연결이 되어있게 정해져 있는 것인데…
만약에, 그와는 전혀 다른 식으로 해석을 하게 되면,
그 때에는 이단(異端)으로 몰리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유일신을 믿는 종교일수록 異端(이단)에 대한 통제와 감시가
심할 수 밖에 없기에…
이단논쟁이 많은 곳, 그곳이 바로 유일신교다!
그 반면에,
다신교(多神敎)- 즉, 온갖 제신혼재(諸神混在)을 믿고 있는 교- 는
인간을 수호해 주는 神들을 모시는 경우- 이기에…
“神의 계시가 가져다 준 진리” 라는 것이 있을 필요 조차도 없기에…
敎理라는 것이 존재할 이유도 없고, 실제로 존재하지도 않는다!
그렇다!
개개인이 각자의 신(神)을, 자기의 방식대로, 믿는 것이기에…
계명이라는 것이 없어도, 교리라는 것이 없어도,
하다못해 체계화된 가르침이라는 것이 없어도, 아무런 지장도 없다.
그러한 것들이 없으니 그것을 해석할 성직자도 필요없다.
그래서… 다신교에는 ‘이단논쟁’이라는 것 자체가 없다!
자아! ‘이단(異端)논쟁’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 김에…
이단논쟁에 대한 본질(本質)에 대하여, 간단하게나마, 살펴보기로 할까?
원래, 같은 종교 內에서의 ‘이단(異端)논쟁이나 불화(不和)’가
전혀 다른 종교 間에 생기게 되는 논쟁이나 불화보다,
훨씬 더 잔인하고 치열한 법이다.
즉, 종교가 전혀 다른 이교도(異敎徒) 보다도,
같은 유일신교 內에서의 이단(異端)을,
더욱 더, 증오하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이것에 대해서는 별도로 다루어야 될 만큼 이야기가 길어질 수 밖에 없지만…
이 글에서는 아주 본질적인 것만 간단하게 언급하기로 하겠다.)
예(例)를 들어서,
유일신교의 대표가 되는 예수교를 보게 되면…
“종교가 전혀 다른 異敎徒는,
아직 예수의 가르침에 눈을 뜨지 못한 사람이기에,
따라서 눈을 뜨게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이지만…
같은 종교內의 異端은,
예수의 가르침에 이미 눈을 뜨기는 했지만,
그것을 잘못 해석하고 있으면서도,
그러한 자기의 잘못된 解釋을 전혀 인정하지 않고,
자기네의 교리가 잘못된 敎理라는 것을 아예 의심조차도 하지 않기에,
참된 가르침에 눈을 뜰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이유에서,
그렇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내가 그들에게
아량(雅量)을 가지고 선의(善意)로 좋게 설명을 한 것이고…
철학적이고 이성적(理性的)이고 또한 깨달은 사람들의 안목에서 보게되면…
다음과 같이 “마음의 본성 통하여” 추리해 보는 것이,
가장 빠르고 올바른 지름길이 될 것이다.
사람이 가지고 있는 “마음의 본성(本性)”에는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마음은 항상 반대편,
그것도 가장 먼거리에 있는 것을 갈망한다!”는 점이다.
일반 사람들을 위하여, 좀 더 쉽게, 이해를 돕기 위하여…
‘사랑과 미움’을 예로 들어서 설명을 하여 보겠다.
“그대가 그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대의 마음은 그를 더욱 더 사랑하기 위한 에너지를 축적하기 위하여…
자기 자신도 모르게 사랑의 반대편으로 이동하면서
그를 미워하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먼저 친구가 되지 않으면, 결코, 적(敵)이나 원수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이의 연인들도 자주 싸우게 되어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이에서 가장 무서운 적(敵)은,
미움이 아니라, 바로 무관심(無關心)이다!
그대!
그대는 전혀 모르는 낯선 사람을 미워하거나 증오하여 본 적이 있는가?
그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사랑과 미움은 동전의 앞면과 뒷면과 같은 것이란다.
[ ~필자의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불려지는 미움 (2000년)” P. 51에서 인용.]
하지만… 아주 확실한 사실이 있으니…
“이단논쟁”을 현실적이고 사실적인 면에서 바라보게 되면,..
이단(異端)논쟁의 밑바탕에는, 바로 그 내막의 밑바탕에는…
“ ‘고객수의 확보라는 것’이 자리잡고 있음”을,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
자! 이제야 내 말을 어느 정도 알아 들었는가?
~ Sang Bong Lee, Ph. D,
Dr. Lee’s Closing Arguments,
Dr. Lee’s Lessons: Discovering Your Nature,
Dr. Lee’s Iconoclasm (sblee707@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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