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들춰보는 그때 그 사람들

* 이상봉 박사의 영성강좌: “이런 사람, 이런 일도 있었지?”

다시 들춰보는 그때 그 사람들

~ 이상봉 / 철학박사

카톨릭이 로마제국의 국교(國敎)로 되다

테오도시우스 황제 (Theodosius I, Theodosiun the Great.
347-395, 재위기간, 379-395)가, 388년에,
그리스도교(敎) 신앙의 대상이 아닌 것들에 대한 파괴를 허용하면서,
로마제국의 국교(國敎)는 카톨릭으로 정해진다.

[로마제국에 종교의 자유가 허락된 것은,
콘스탄티누스(콘스탄틴 大帝, 272-337, 재위기간 306-337 CE)가
313년에 발표한 “밀라노 칙령”에서다.]

그리스도敎 外의 신, 신전, 신상들의 파괴를 허용함으로서…
여기저기에 있었던 신전(로마 神, 그리스 神, 이짚트 神, 시라아 神)이나
조각상들이… 사교(邪敎)의 상징으로 간주되어 파괴를 당하게 되었다.

[유일신(唯一神)을 믿고 있는 그리스도교에서는 Yahweh(야훼)라는
자기네의 神 外의 것은 절대로 용납을 할 수가 없기에…
고대 로마의 초기시대 부터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유피테르(Jupiter 쥬피터, 태양신)를 비릇하여,
Apollo, Minerva, Diana, Juno, Venus 등등의 로마神과
그리스에서 유입된
제우스(Zeus), Poseidon, Aphradite, Hermes, Dionysus, Hera 등등의 神들을
모두 다 배척하게 되는 것이다.
唯一神(One and only deity)- 그것이 Yahweh든,
아니면 나중에 나오게 된 Allah든-을 믿고 있는 사람에게는
자기의 것만이 One and only deity(유일 무이한 神)일 뿐이기에,
독단적이고 배타적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유일신교와 다신교의 차이점”은 필자의 글을 참조 하시라.]

제 아무리 아름다운 조각상 조차도…
美의 표현이나 예술작품으로 인정하지 않은 채,
단지 사교(邪敎)의 상징일 뿐이었으니까!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로마 그리스 시대의 거의 모든 예술작품들이,
팔다리가 파손되었고 여기저기가 훼손된 상태인 것은,
바로, 이러한 과거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뿐만이 아니었으니…
이어서, 문학 예술 도서관 등등도
“그리스 神이나 로마 神에 관한 내용” 이라는 이유에서
폐쇄를 당하게 되었고…

하다못해, 393년에는
기원전 776년 부터 열렸던 올림피아 경기대회도 폐지되게 된다.
(예수교의 신이 아닌 제우스 신에게 바쳐지는 것이라는 이유에서…
무려 1169년 동안이나 이어온 운동경기 대회를 폐지시킨 것이었다.)

그리하여… 서양사(西洋史)에서는
“393년이라는 해가, 그리스와 로마 문명이 공식적으로 끝난 해” 로
불리워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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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라노 주교 암브로시우스

이러한 일을 하는 황제를, 뒤에서 조종한 사람이,
밀라노 주교 암브로시우스(영어 Ambrose, Latin語 Ambrosius)였다.

Ambrose(330-397, 주교기간 374-397)는,
그의 나이 43세 때에 리구리아 주(州)의 주지사(州知事)였다.
그 때(374년), 그의 주(州)에 속하는 도시, 밀라노에서,
천주교도들 간에 의견 충돌로 크게 소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미 325년에,
니케아 공의회에서 ‘3위일체설’이 채택이 되기는 하였지만…
그후에도, 아리우스 파(신과 예수는 동위가 아니다 라는 주장파)와
아타나시우스 파(삼위일체설 주장파) 간에는,
여전히 의견의 충돌이 심하게 계속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암브로스 주지사가 그 수습에 나서게 되었는데,
그 사람이, 삼위일체파 신도들의 마음에 들게 되었는지…
삼위일체파 신도집회에서, 그 주지사(州知事)를 주교로 선출하였다.
(다시 말해서,
아리우스파들 보다, 아타나시우스파(삼위일체파)가 먼저 손을 써서,
주지사를 자기네의 주교로 선출한 것이었다.)

그러자, 그는 자기는 천주교도가 아니라!고, 사양을 하였지만…
그런데도, 삼위일체파 신자들은 물러서지를 않고서,
“그렇다면… 지금 당장 영세(領洗)를 받으면 되는 것 아니냐?” 라고,
하면서, 계속 요구를 하자…
그가, 영세(領洗)를 받았고,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그리고 나서, 일반 신자에서 주교가 되려면
여러 단계를 거쳐야만 되었기에…
그러한 여러 단계를 재빨리 거쳐서- 일주일 만에 거쳐서-
드디어 주교관(主敎冠)을 머리에 쓰게 되었고,
밀라노 대주교(Archbishop of Milan)가 된 사람이다.
그의 밀라노 주교 취임식이 374년 12월 7일에 거행되었다.

[밀라노에는 스카라 극장(La Scala, 1778년 8월 3일에 개관됨)이 있다.
이 스카라 극장의 시즌 개막일이 12월 7일로 정해져 있는데…
그 이유는, 주교의 취임일이 그날이었고
또한 나중에 밀라노의 수호 성인이 된
암브로시오의 축일이 바로 그날이기 때문이다.
이 극장에서 마주 바라다 보이는 곳에, 밀라노 주교 성당인
두오모(Duomo di Milano, 1386년에 설립됨)가 있다.]

그렇다면… 암브로시우스의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바로,
“황제의 권력과 권위에 대하여,
천주교회의 우위(優位)를 확실하게 만들어 두는 것” 이었다.

쉽게 설명을 하면…
제 아무리 황제라고 해도, 일단 황제를 천주교 신자로 묶어 놓은 이상,
천주교 신자는 성직자인 주교의 권위에 따라 갈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암브로시우스는 이미 파악하고 있었던 사람인 것이다.
신자라는 어린 양을 다루는 양치기가 바로 자기가 아니던가?

덧붙이는 말이지만…
암브로시우스 주교는 카톨릭(천주교)를 위해서,
아주 많은 일을 해놓은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천주교의 성인(聖人)이 되었다.
그렇다!
천주교회의 기반이 되는 것들의 대부분을 그가 조직한 것이라고 보면된다.
아주 간단하게 몇 가지만 열거를 하여도 다음과 같이 많다.

이단이나 사고방식이 다른 사람과 논쟁하고 토론하는 교본(방법론)
성직자 계급의 윤리 향상을 목적으로 한 방법론,
수도사나 은둔자를 교회조직에 편입시키는 제도의 확립,
종교 교육의 방법론 확립,
교회 행사와 각종 의식의 재편성,
무직자나 고안에 대한 자선사업의 편성,
순교자에 대한 신앙의 이론 확립,
성인(聖人) 제정과 성인 신앙의 확립 등등이었다.
(유일신인 야훼만을 인정하는 예수교에,
여러 신이나 수호신 같은 것을 부활시킬수 없으니까…
새로운 수호자로 성인들을 대량으로 생산하여,
수호신 대신에 수호성인을 대치하여, 민중의 소박한 소망을
만족시키는 아이디어를 짜내서 성공한 것이다.)

그리하여,
성인(聖人, Saint)들의 수가 자꾸만 늘어나게 되다보니…
일년 12달 365일을, 모두 다,
성인들의 축일로 할당해도 모자랄 지경이 되자…
축일을 할당받지 못한 성인들을 위해서,
한꺼번에 모든 성인을 추모하는 날을 만들었으니…
그것이 바로 All Saints’ Day (모든 성인의 날) 인데, 11월 1일 이다!
그리하여, 바로, 그 전날의 밤- 전야제(前夜祭)-가 Halloween 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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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오도시우스 황제는
모든 정책을 카톨릭(천주교)를 위하여 시행하는 한편,
이교(異敎) 배척에 열을 올리고 있었는데….
이러한 황제를 보고서, 용기를 얻게 된 카톨릭 교도가
시리아 북동부에 있는 유대교회당을 불태워버리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러자, 나라의 치안을 책임지고 있는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그곳의 행정관에게, 범인을 엄중히 처벌하라!”고, 명령을 내리는 한편,
그곳 주교에게는 “교구의 비용으로 불탄 유대교회당을 재건하여
유대교도들에게 기증하라!””고 명령했다.

그러자, 밀라노 주교가
“이교(異敎)에 관련된 시설을 건설하는데, 천주교 재산을 사용하는 것은
천주교에 대한 모독이며 모욕” 이라고 엄중한 항의문을 보냈다.
하지만, 황제는 자기의 결정이 공정하다!고, 판단 내리고는
그 주교의 항의를 무시하였다.

그런데,
그 후에, 황제가 밀라노에 가지 않으면 안될 일이 생기게 되었고,
그리하여, 밀라노에 가서 교회의 귀빈석에 앉게 되었는데…
암브로시우스 주교는, 바로,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서,
그 곳에 모여있는 모든 교인들 앞에서,
“神의 은혜를 잊는 것은 누구에게도 용납이 되지 않는다.” 라고
단호한 어조로 힘주어서 강론을 하는 것이었다.
[그 말은, “네가 누구 덕분에 황제자리에 앉아 있느냐?
神의 은혜가 아니냐? 그런데 神의 은혜를 잊으면 되겠느냐?
결코 용납할 수가 없다!” 라는 소리였다.]

그리하여, 황제는,
자기가 내린 명령(범인의 처벌과 유대교회당의 재건)을 취소하였고…
한 걸음을 더 나아가서
“비(非) 예수교도에 대해서는 로마제국의 법에 따른 보호가 제한된다!” 라는,
새로운 칙령까지 내놓게 되었다.

암브로시우스 주교의 힘이 이 정도였다!는 소리다!

그리고,
그 후에, 또 이런 일들도 있었으니…
한번은 인기있는 마차경주(전차경주) 선수가 감옥에 갇힌 사건이 있었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경찰서로 몰려가서,
그 선수를 석방하라!고 요구 하였지만…
경찰이 거부를 하자, 사람들이 폭도로 변하여…
테살로니키 지방 장관을 비릇한 많은 행정관리들을 죽였다.

그러자, 사건을 보고 받은 황제는 폭동으로 단정하고,
“군대를 파견하여 집압을 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 폭동 진압 과정에서 적지 않은 시민들이 희생되었다.

그러자, 암브로시우스는 항의문을 보내서 거세게 항의했다.
“강경진압을 명령한 황제가 책임을 져야한다!
황제는 그 죄를 씻기 위해 속죄의 뜻을 공개적으로 보여야만 된다.
그렇지 않으면 神의 제단에 갈 수 없다!”
다시 말하면…
“공식적으로 속죄를 받지 못하면, 교회에 들어가는 것을 금한다!” 라는
말이었다.

그러자, 황제는 8개월 동안 버팅겼지만,
결국은, 황제가 먼저 화해를 제의(提意) 하여야 하였다.
그리하여, 그 황제는 황제의 지위를 상징하는
왕관과 장검 그리고 화려한 복장 등등을 제거한 후,
교회의 門 앞에서, 공손하게 한참을 기다리고 있고…
주교관(主敎冠)과 화려한 수로 장식된 복장과 망토를 걸친 주교가
門을 열고서 나와서, 무릎을 꿇고있는 대죄인(大罪人)에게
뉘우치는 마음, 참회의 뜻을, 묻고 또한 듣고 난 뒤에야…
비로소 교회에 발을 들여 놓는 것을 허락하면,
그 때에야, 교회 안으로 들어가서,
성체(聖體)라고 불리우는 밀가루 조각을 받을 수가 있었다.

[* 카노사의 굴욕이라는 것이, 나중에, 즉 중세에, 있었으니…
1077년에 카노사(이태리아 중부에 있는 도시)에서
신성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가, 사흘 낮 사흘 밤을 꼬박 눈속에 서서,
고리우스 7세의 용서를 빌었던 일이 있었다.
이것을 카노사의 굴욕이라고 하는데….
이것의 전주곡이, 이미, 700년전에 시작된 셈이다.]

테오도시우스는, 황제가 되기 전에,
아주 심한 병을 앓아서, 몸이 몹시 허약해졌을 때가 있었는데…
그 때, 테살로니키 주교에게서 영세(領洗)를 받은 적이 있는데,
그 때, 그의 나이는 30대 초반이었다.
이렇게, 일단 예수교 신자가 되고 나면,
그 다음부터는 누구나 다 한마리의 양(羊)일 뿐이다!
그러니, 그 이후에 일어나는
“羊과 양치기” 간의 게임은 뻔한 것이 아닌가?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이렇게, 천주교를 위하여
많은 일들을 행하였기 때문에…
천주교 측에서, 테오도시우스 황제에게도,
Magnus(마그누스)- The Great- 대제(大帝)-라는 호칭을 붙여 주었다.
[세계史에, 대왕(the Great) 대제(Magnus)라는 호칭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여러명 있는데… 그들 중에서 Alexander the Great (356-323 BCE) 外에는,
모두 다, 천주교에서 내려준 것들이다.]

테오도시우스 대제는 395년에 세상을 떠났는데…
(그리고 나서, 81년 후에, 로마는 멸망하게 되지만…)
그 때,
맏아들인 아르카디우스(18세)에게는 동로마 제국을,
둘째 아들인 호노리우스(10세)에게는 서로마 제국을 남겨 주었다.
로마제국을 이두체제(二頭體制) 처럼, 나누어서,
다스려 나가도록 하려고 나누어 주었겠지만서도…
결국은, 이로 인하여,
로마제국은 東로마제국와 西로마제국으로 분할이 되게 되는 것이다.

西로마 제국이 멸망한 해는 476 CE 로 모든 책에 명기 되어 있다.
하지만, 연도는 476 CE 라고, 분명하게, 나와 있지만…
망한 날자(日)와 달(月)은, 어느 책 어느 역사기록에도 나타나 있지 않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어느 누구도 모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아주 서서히 시들어 가다가 멸망을 하였기 때문이다.
아무튼, 로마제국의 역사는 흔히 1,000년 이라고 말하고 있다.

[Roman Republic (로마 共和政, 509 BCE- 27 BCE)
Roman Empire (로마 帝國, 로마 帝政, The post-Republican period,
27 BCE- 476 CE). 따라서 정확한 햇수는 985년이지만…
로마국가가 건립된 해인 753 BCE로 부터-
서(西)로마제국이 멸망한 해인 476 CE 까지로 보면 1,229년이 된다.]

혹자는, 틀림없이, 이렇게 말할 것이다.
로마제국이 멸망한 것은 476년이 아니라 1453년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동(東)로마제국이라는 나라가 망한 해일 뿐이고,
로마라는 도시가 있는 로마제국은 476년의 어느날 망해버렸다.
그렇다!
로마라는 도시가 없는 로마제국을 그대는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로마제국이 카톨릭(천주교)를 국교(國敎)로 정하고 난 이후부터,
로마제국의 세력이 기울어지면서, 마침내는 멸망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 반면에, 다음과 말이 있게 되었으니…
“로마는 세계를 3번 지배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로마제국의 군사력을 통하여,
그 다음에는 법률(로마법)을 통하여,
그리고 마지막에는 카톨릭 종교를 통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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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 “왕권신수설(王權神授說)’’ 이라는 것을,
로마제국에 도입한 사람은 콘스탄틴(재위기간, 306-337) 이었다.

이미, 다른 글에서 설명을 하였던 적이 있지만,
일반인들을 위하여, 내가 알기 쉽게, 설명을 하면…
“황제는 인간이 定하는 것이 아니라, 神이 정하여 내려주신 것이다!” 라고,
해놓고 나서… 예수교 지도자를 자기편으로 만들면,
자연히 神의 뜻도 자기편이 되어 버리니까…
통치와 帝位세습의 정통성을 획득하는데에 목적이 있었다!는 것이다.

“王權神授說”이, 왕에게 얼마나 편하고 좋은 것이냐? 하면…
제 아무리 바보 등신같은 왕이라도, 제 아무리 어린 왕이라도,
그 무슨 짓이나 그 어떠한 잘못을 저지르드라도,
거역하거나 반대할 수 없게 되어 있으니…
그 이유는, 바로, 神이 내려준 왕에게 거역하거나 반대를 하는 것은,
곧, 창조주이고 전지전능한 神을 거역하고 반대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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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聖) 아그스티누스 (Augustine of Hippo)

참고로… 한가지 덧붙여야 될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밀라노의 주교인 암브로시우스의 이야기가 나오면,
반드시, 따라 붙게 되어 있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의 이름이 바로
St. Augustine (Augustine of Hippo, 354-430 CE) 다.
[카톨릭교 內에서 뿐만이 아니라,
고전작품인 City of God(神國),
Confessions(懺悔錄)으로 널리 알려진 사람이다.]

이 사람은, 로마의 속령(屬領)과 속지(屬地)인 北아프리카 사람이었는데,
(그 당시, 아프리카의 북부지방인 지중해 연안지역은 로마제국의 속지였다.)
이탈리아의 Milan(밀라노)로 와서, 학원을 차리고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밀라노 주교(主敎)인 암브로시우스의 영향을 받고서,
그의 나의 33세 때인 387년 4월에, 영세(領洗)를 받아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그리고 나서,
아프리카 타가스테로 돌아가 수도사로 종교생활을 시작을 한 후,
수도원으로 들어가 9년간 수도원에서 생활을 하다가,
그의 나이 43세 때인 397년에 히포레기우스 주교(主敎)로 선출되었다.

주교가 된 아우구스티누스가 맡고 있는 北아프리카 지역 내에는,
“아주 엄격하고 철저한 신앙생활을 강조하는 도나투스 파(Donatists)”가
널리 퍼져있었다.

도나투스 파(Donatists)는,
그곳에 있었던 도나투스(Donatus 313-347) 主敎의 주장을 따르는
종파를 일컫는 말인데…

도나투스 주교는 얼마나 철저한 신앙생활을 강조 하였는지…
“교회는 순수하고 죄없는 사람들만으로 구성하는 신앙조직이기에,
죄를 저지른 경우- 죄라고 해야 법적인 죄가 아니라 신앙적인 罪지만-에는
참회만으로 끝나지 않고, 다시 영세(領洗)를 받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만 된다!”는 입장을 고수하였고…
그 뿐만이 아니라,
303-305년에 있었던 그리스도교 박해 때에,
박해를 견디지 못하고서 종교를 버렸던 사람들(주교, 사제, 신자)이 있었는데…
그 후- 박해가 지나간 후- 교회로 되돌아 온 그런 사람들을
받아 들이지 않고서, 배교자(背敎者)로 규정하고 색출작업까지 하였다.
바로, 그러한 도나투스에 동조하고 함께 행동한 신자들을
도나투스 파(Donatists) 라고 하는 것이다.

[그 반면에, 카르타고(Carthage) 교구의 성직자들은
천주교를 버렸던 신자들의 복귀에 관대하였는데…
카르타고 교구 주교(Bishop of Carthage)인
키프리아누스(Cyprianus, 200?-258)는,
자기 자신도 한때 기독교 탄압 때에 도망치기도 하였지만,
主敎인 이상 피할 수 없다!고 마음을 고쳐먹고, 자진 출두하여 순교한 사람이다.

그는, 그와 거의 동시대에, 그곳(Carthage, Tunisia)에서 살았던
Tertullian(115-240)의 영향을 아주 많이 받은 사람이었다.

Tertullian은 카톨릭의 교부(敎父)에 해당되는 저술가였고, 명언이 많다.
그의 말로 널리 알려진 것에
“불합리(不合理)하기 때문에 나는 믿는다.
Certum est quia impossibile est
(It is certain because it is impossible)” 가 있다.
즉, 오히려 불합리하기 때문에, 부조리(不條理)하기 때문에,
말이 되지 않기 때문에, 나는 믿는 것이다! 라는 의미다.
그리고
“사람은 그리스도人이 되는 것이지,
그리스도人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가 있다.
그렇다! 말도 안되는 모태신앙(母胎信仰) 운운하는
저질의 믿음을 내세우는 자들이 깊이 새겨 들어야만 될 명언이다!
[하지만, 그는 “성령 강림의 체험적 현상을 중시하는 운동인
Montanus의 주장”인 Montanism에 동조 하였는데…
천주교 측에 의하여 Montanism 이 異端으로 축출되게 되자,
그도 천주교를 떠났다.]

키프리아누스는 “양치기에게는 양치기의 책무가 있지만,
羊에게 까지 그러한 책무를 요구하는 것은 인간성에 어긋난다!” 는
생각을 지니고 있었던 사람으로 보여진다.
아프리카 교구는 그의 영향을 아주 많이 받았다.
(그는, 카톨릭 교회에는 교부로 되어 있고,
희랍정교회에는 성인(St. Cyprian)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도나투스는 이런 사람을 아주 ‘미지근한 신앙인’ 으로 취급하면서
강경노선(强硬路線)을 취하였다.]

그리하여,
천주교 측에서 도나투스 파(派)를 이단(異端)으로 규정하자…
도나투스 파는 천주교로 부터 스스로 분리되어 나가서,
교회를 따로 운영하게 되었고, 서로 간에 반목(反目)이 심해지게 되었다.

그러자, 아우그스티누스 주교에 동조하는 카톨릭 교도들이,
이단(異端)인 도나투스파의 교회를 불태웠고, 또한 그쪽 사람들도 죽였다.
그래서, 도나투스 파의 증오가 더욱 깊어 질 수 밖에 없었고…
도나투스파에서는 아우구스트누스 주교를 살해할 음모까지도 꾸미게 되었다.

그런데, 로마제국의 방어(防禦)가 기울기 시작하면서,
여기 저기서 외적의 침략과 침입을 심하게 받게 되었고…
마침내, 北 아프리카인 그곳까지 쳐들어온
북방 야만족과 반달족(Vandals) 에 의하여,
430년 8월 28일, 도시 전체가 파괴될 때에,
그 도시와 함께, 아우구스투스도 생(生)을 마감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때, 그 침략자들의 편에 서서,
침략과 약탈 행위를 같이 하였던 도나투스派의 손에,
그가 잡히지 않고 죽은 것이 그나마 다행일 뿐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그의 시신(屍身)은 갈기 갈기 찢어져서
아에 아무런 자취 조차도 없어졌을 것이리라!
바로, 그점을 두려워했는지,
천주교신도들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시신(屍身)을 몰래 배에 실어서,
지중해에 위치한 사르데냐 섬으로 옮겼다.
그 후, 중세 때에, 사르테냐 섬을 습격한 사라센 해적들이
아우구스티누스의 유골(遺骨)을 탈취하였고,
그것을 되찾으려면 몸값을 치러야만 되었고,
몸값을 치르고 난후, 천주교 신자들의 손에 돌아온 유골은
북(北) 이탈리아의 파비아 성당에 보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Sang Bong Lee, Ph. D,
Dr. Lee’s Closing Arguments,
Dr. Lee’s Lessons: Discovering Your Nature,
Dr. Lee’s Iconoclasm (sblee707@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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