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때 • 그 순간 • 그 시기를 알 수 있다! 고?
‘줄탁지기(啐啄之機) • 줄탁동시(啐啄同時)’ 라는 것이 맞는 말이라고?
그리고 ‘하느님의 사랑’이 있다고?
~ 閑超 이상봉 / 철학박사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스스로는
“자기가 아는 것이 아주 많으며, 선량하고, 또한 자기가 믿고 있는 것은
‘틀림이 없다!’” 고, 믿으면서 살아가고 있다!
그렇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그 ‘성적, 평가, 학력’이라는 것에 상관이 없이,
자기는 ‘아는 것이 많은 사람’이라고 자부 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그 학력이라는 것이 전무(全無) 하거나 미천(微賤)할 때 조차도
자기의 이런 저런 경험과 연륜을 내세워서,
‘자기는 제법 아는 것이 많은 사람 축에 속한다!’고 믿고 있다.
어디 그뿐인가?
온갖 사람들이, 모두 다, 자기는 인생을 선(善)하게 살아가고 있는
선하고 선한 ‘선량한 사람- 선인(善人)’ 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다.
그리하여…
다른 사람들의 출세는, 모두 다,‘아부, 교활, 뇌물, 부패’의 산물일 뿐이다!
라고 하면서… 자기가 출세를 하지 못한 것은,
자기에게는 그러한
‘아부 기질이나 부정(不正)과 타협하는 성격이 없기 때문일 뿐’ 이라고,
위로를 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사람들이 내세우고 있는 그 ‘知識(지식)이네 • 실력이네’ 하는 것들을
좀 더 자세히 살펴 보면…
한낱 ‘단어들의 나열에 지나지 않는 것일 뿐’ 임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렇다! 사람들은 겨우 단어만 알고 있는 것을
그것에 대하여 다 알고 있는 것으로 착각을 하고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대! 그대가 이러한 내 말을 믿거나 말거나…
그대도 또한 그러한 사람 중의 하나일 뿐임을 결코 잊지 마시라!
그 점에 대하여, 내가 아주 쉽게 설명을 하여 보면…
그대! 그대가 ‘알고 있다!’고 하는 것들을,
지금 당장, 하나 하나, 살펴보시라.
즉, 그대가 ‘알고 있다’고, 자랑 할 수 있는 것들을-
즉 ‘자기의 지식’이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을-
지금 당장, 하나 하나, 종이 위에 써 놓아 보시라!
그리고 나서…
그 써놓은 단어들을, 하나 하나, 지워 버리고 나면,
그 때에, 그 곳에 남는 것이 과연 뭐가 있는가?
이와같이…
그대가 가지고 있는 그 지식이라는 것들은,
결국은, 단어들의 암기에 지나지 않는 것일 뿐이다.
그렇다!
그대가 믿거나 말거나… 그대가 가지고 있는 그 많은 지식이라는 것들은,
결국은, 그 단어들의 나열에 지나지 않는 것일 뿐이다.
이 점을 결코 잊지 마시라!
그러니까…
지금 부터, 자기가 가지고 있는 그 오만한 ‘지식’과 ‘실력’에 대하여,
스스로 철저하게 의심하고 또한 냉혹하게 비판하여 보도록 하시라.
철저하게 의심하고 냉혹하게 비판 하여야만
그대는 크게 깨우칠 수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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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지금부터, 한가지 예(例)를 살펴 보기로 할까?
일부의 사람들이 즐겨서 사용하고 있는 말에,
‘줄탁지기(啐啄之機) • 줄탁동시(啐啄同時)’ 라는 말이 있는데…
아마, 그대도 그 말을 들어 보았거나 또는 사용해 보았을 것이리라.
자기 자신는 그와같은 제법 어려운 ‘한자(漢字)’도 알고 있기에
그 무슨 대단한 지성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행동하면서…
또는 선(禪)이나 도(道)에 대하여 제법 깊은 지식이나 가지고 있는 것처럼…
그 말 – 줄탁지기(啐啄之機) • 줄탁동시(啐啄同時)’-을 사용하여 왔고,
앞으로도 계속 사용할지도 모르겠는데…
자! 지금 부터 그 말에 대하여 간단하게 나마 짚어 보기로 할까?
[ ‘줄탁지기’ 라는 단어는, 불교의 중(僧), 또는 道나, 氣나, 丹이라는 것에
관심이 있다는 사람들이 主로 사용하고 있으며…
그 바람에, 일반 사람들도 그것을 그대로 모방하여 쓰고 있게 된 말이다.]
내가 볼 때에…
그 말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하나 같이,
줏어 들은 풍월만 흉내 내어서 그대로 옮기고 있을 뿐이지…
그 말의 ‘잘못된 점’을 전혀 모르고 있는 사람들임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그 줄탁지기에 대한 뜻이나마 제대로 알고 있다면,
그 때부터는 그 한자어(漢字語)를 사용하지 못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자아! 그대들의 이해력을 도와주기 위하여…
내가 쉽게 설명을 하여 보기로 할까?
‘줄탁지기(啐啄之機) • 줄탁동시(啐啄同時)’ 라는 한자어(漢字語)는,
“알에서 병아리가 부화되어 나올 때에,
그 부화되어 나오는 ‘정확한 시간’을 맞추어서…
밖의 어미닭과 알속의 병아리가 ‘동시에’ 알의 껍질을 쪼아,
껍질을 깨고서,
병아리가 밖으로 나오게 되는 것이다! 라는 의미에서…”
그것을 줄탁지기(啐啄之機) • 줄탁동시(啐啄同時) 라고,
하고 있는 것인데…
내가 볼 때에,
그것은 – 그 말과 그 설명 자체가 – 아주 크게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어미닭과 알속의 병아리가, 서로, 정확하게 그 때를 알고서,
그 시간을 맞추어서 껍질을 깨는 것도 아니고…
알속의 병아리가 정확하게 그 때를 알고서 나오는 것도 아니다!
(나도, 직접, 암닭이 달걀을 품고 앉아 있는 것도 보았고,
어린 병아리들이 나오는 것도 실제로 보았는데…
병아리가 알에서 나오는 바로 그 상황-에서,
어미닭과 알속의 병아리가 동시에
그 시간을 맞추어서 껍질을 깨는 것이 아니고…
어미닭이 없더라도, 부화조건만 맞으면,
병아리는 알에서 스스로 나오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다! 100% 정확한 과학적인 실제의 사실이야,
그 상황을 고스란히 기록해 놓은 필름을 보면 되는 것이지만…
(하긴 요즈음에는 그것에 관한 영상을 얼마던지 쉽게 찾아 볼수 있지 않은가?)
누구나 가지고 있는 일반적인 판단력만 가지고서도,
아주 쉽게 상식적으로…
“어미닭이 정확한 시각에 알을 밖에서 쪼아서 깨어 주어야만,
알속의 병아리가 그 안에서 죽지 않고서
살아서 나오게 되는 것이 아니다!”
라고, 단언 할 수가 있다!
하지만, 좀 더 쉽게 설명을 하기 위하여 예(例)를 들어보면…
부화장에서는 어미닭이 없이도
부화기에서 병아리들이 수없이 나오고 있지 않은가?
즉, 부화기만 있으면(어미닭이 없이도),
누구나 다, 병아리를 부화 시킬 수 있지 않은가?
이와같이 부화기에서는 어미닭이 없어도,
얼마든지, 병아리가, 21日만에 나오고 있는데…
어떻게, 그 ‘줄탁지기’ 라는
엉터리 한자어(漢字語)가 통용될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
한마디로 해서… 그 어미닭이나 부화기가 없어도,
부화의 조건만 맞는다면,
병아리는 얼마던지 나올 수가 있는 것이란다!
따라서
‘줄탁지기(啐啄之機) • 줄탁동시(啐啄同時)’ 라는 말은
틀린 말일 뿐이다!
자! 이제야 내말을 제대로 알아 들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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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화의 조건과 달걀의 구조:
그 부화의 조건을 좀 더 과학적인 수치로 말해 본다면…
가장 적합한 온도는 37.5℃ ~ 37.9℃, 습도는 78% ,
달걀을 회전시켜 주어야 되고, 기간은 21일 이다!
하지만 그러한 조건에서 많이 벗어나 있어도 병아리가 나오는 경우가 많다!
그 때, 병아리가 스스로 껍질을 깨고서 밖으로 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달걀을 보게 되면 그 껍질이 제법 단단하기에
칼슘(Ca)으로만 되어 있는 것으로 보이겠지만…
그 껍질에는 무려 8,000개의 작은 구멍들(microscopic pores)이 있다.
바로 그 구멍을 통하여 달걀 속으로 산소(Oxygen)가 들어가고
이산화탄소(Carbon dioxide)가 나올 수 있는 것이다.
그래야만, 달걀 속의 Embryo(胚 배, 태아) 가 숨을 쉴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달걀은 외부 Bacteria(세균들)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몇 개의 막(膜)을 가지고 있다.
Shell (껍질), Outer membrane (外膜) + Inner membrane (內膜),
Thin albumen (엷은 알부민), Thick albumen(진한 알부민),
Yolk (노른자), Yolk의 한쪽 끝에 Germinal disc라는 것이 있다.
(이 Germinal disc 가 바로 embryo start 지점이다.)
Chalaza- anchors yolk (알끈), Air space (공기 주머니)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까지의 나의 설명은…
그나마, 내가, 아량을 베풀어서, 아주 친절하게 설명을 해준 것일 뿐이고…
그 ‘줄탁지기(啐啄之機) • 줄탁동시(啐啄同時)’ 라는 것이,
말도 안되는 헛소리인 것을 알아보려면 그것은 아주 간단하다!
T.V에 나오는 Nature Film 중에서-
새나 오리의 부화 장면을 찍은 Film을 보게 되면-
알속의 새끼가 직접 껍질을 깨면서 기어 나오는 장면들이 생생하게 방송되고 있다.
그렇다! 어미의 도움이 전혀 없이, 새끼 스스로 알의 껍질을 깨면서
직접 기어 나오는 장면들이 생생하게 T.V 방송을 타고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줄탁지기(啐啄之機) • 줄탁동시(啐啄同時)’ 라는
헛소리를 크게 떠들고 있는 얼빠진 작자들이 있는데…
도대체, 어떻게 된 두뇌의 소유자들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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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의 자연 현상- 생명 현상- 중에 고귀하고 신비하지 않은 것이
어디 있단 말인가? 그리고, 생명 현상이라는 것은, 모두 다,
자연의 섭리와 법칙 대로 진행되는 것이 아닌가?
따라서…
그 ‘줄탁지기(啐啄之機) • 줄탁동시(啐啄同時)’ 라는 말은
맞는 말이 아니고 전적으로 틀린 말이기에,
별다른 의미가 있는 말이 못된다!
줄탁지기라는 말이 이렇게 틀린 말이 확실한 이상,
그 말은 폐기하여 버렸어야만 되는 말이다!
그렇다!
이미 그 부화기라는 장치가 등장 하면서 부터
그 말은 벌써 폐기되어 버렸어야 될
그런 잘못된 말일 뿐이다! 알겠는가?
그런데도 불구하고…
아직 까지도, 일부의 사람들이, 그 ‘줄탁지기’라는 단어를,
‘스승과 제자’와의 사이에다 인용하여서 사용하고들 있는데…
그것은 아주 잘못된 것이다.
선(禪)의 세계든, 도(道)의 세계든, 그 무슨 깨달음의 세계든 간에…
가르치는 선생은 절대로 어느 때에 제자에게
깨달음이 오게 되는지 그 시기를 알 수가 없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마찬가지로,
배우는 제자도 언제 깨달음이 오게 될런지?
그 때를 전혀 알 수가 없다!
깨달음은 그 무슨 전조를 나타내면서 오게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 누구도 결코 알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줄탁지기’ 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크게 잘못된 것이다.
스승이 많은 노력을 하고, 애를 써서, 제자를 깨우쳐 주려고 하지만…
제자가 ‘스승의 노력에 비례하여’ 깨우쳐 지게 되는 것이 아니다.
또한 제자가 열심히 선생을 따라 다니고,
하다못해, 그 모든 가르침을 고스란히 실천 하였다고 해서
깨달음이 틀림없이 오게 되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깨달음에 있어서 그 선생이라는 것이 꼭 필요한 것도 아니다!
마찬가지 이다!
부모가 제 아무리 노력을 하고, 애를 쓰고,
부모의 역활을 잘 하였다고 하더라도,
자기의 자식이 언제 철이 들런지?는 전혀 알 수가 없다!
더군다나… 인류가 언제 철들게 될런지?
그것 만큼은, 하다못해, 전지 전능하다(?)는 그 神 조차도 알 수가 없다!
그래서… 나는,
예수가 인류를 구원하는 구세주(救世主)라는 것을 전혀 믿지도 않지만…
‘이미 죽은 예수가 재림하고, 신자들이 부활한다!’ 라는,
이상한 교리는 더욱이나 더 믿지 않고 있다.
이 세상의 모든 만물은, 그냥 자연의 법칙에 의하여,
오고, 가고, 또한 움직일 뿐이지…
어느 누구의 지시나 명령에 의하여 이루어 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더군다나 ‘하느님의 사랑’ 이라는 말을,
時도, 때도 없이 늘상 써먹고들 있는데…
나에게는, 그야말로, 황당무계한 헛소리로만 들려올 뿐이다.
왜냐하면,
그 ‘하느님의 사랑’ 이라는 것은, 오직, 말만 무성할 뿐…
그 실체가 전혀 없는 가설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 ‘하느님의 사랑’이라는 헛소리가 통할 수 있는 곳은 딱 정해져 있는데…
그 곳이 어디인가? 하면…
그 교리를 만들어 낸 곳과
그 교리를 믿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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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회에 ‘부모의 사랑’이라는 것도 한번 살펴 보기로 할까?
‘사랑’이라는 그 단어 자체만 놓고 본다면…
그 단어 자체는 아무런 의미도 없고 또한 가치도 없는 죽은 말일 뿐이다.
왜냐하면…
그 사랑이라는 단어는 오직 사전적인 낱말의 범위를
스스로 벗어 날 수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부모의 자식 사랑’ 또는 ‘자식의 부모 사랑’ 이라는 것은…
부모와 자식이 함께 살아 가면서, 그들의 행동과 행위 속에서,
‘실천적인 情’으로 표현이 되는 것일 뿐이지,
‘사전적인 의미’의 단어로 되어 지는 것이 결코 아니다!
자아! 내 말을 알아 듣겠는가?
마찬가지로…
그와 같은 맥락에서…
부모와 자식간의 사랑은, 행동과 행위 속에는 분명히 들어 있지만…
그것을 굳이 ‘孝道(효도)’ 라는 낱말을 써서 표현하게 되면,
그 때에는 또다시 죽은 낱말로 되어 버릴 뿐이다.
그리하여…
소위 그 ‘孝道(효도)’ 라는 표현은,
너무나도 인위적이고 가식적이고
또한 조작된 죽은 단어로 전락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가식적인 단어- 孝道(효도) 라는 단어-가 통용되고 난무하고 있으며
또한 강요 되기까지 하고 있는 그런 사회가
내 눈에는 오히려 이상스럽게만 보일 뿐이다!]
마찬가지 이다!
예수교도들이 오직 말로만 그토록 내세우고 있는 것들-
그 ‘하느님의 사랑’ •‘하느님이 인류를 지극히 사랑하사…’ 라는,
그러한 사랑은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까나?
그들이 주장하고 있는 그들의 교리 外의
그 어느 곳에서 그것을 볼 수 있고 또한 느낄 수 있단 말인가?
알고보면…
본체가 전혀없이, 단지 입으로만 떠드는 모든 것들은,
하나같이 사전 속의 죽은 단어 만도 못한 것이고,
그래서 헛소리에 지나지 않은 헛깨비만도 못한 것일 뿐이다!
자아! 이제야 내 말을 어느 정도나마 알아 들었는가?
[ “의심하라! 끝까지 의심하라!” Pp.130-136 에서 인용.]
https://blog.naver.com/sblee7070/222479616232
~ Sang Bong Lee, Ph. D.
Dr. Lee’s Closing Arguments,
Dr. Lee’s Lessons: Discovering Your Nature,
Dr. Lee’s an effable and ineffa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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