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g tree and figs)
(*철학자가 본 宗敎)
예수가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여 죽게하다
~ 이상봉 / 철학박사
『단 하나의 선(善)이란 아는 것 뿐이며,
단 하나의 악(惡)이란 모르는 것 뿐이다. ~소크라테스
There is only one good: knowledge,
And only one evil: ignorance. ~Socrates (470~399 BCE)』
아직도, 그대들은, 삶(Life) 속에
선(善)과 악(惡)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고, 믿고 있는가?
과연, 그대의 삶(Life)속에 회개(悔改)해야 할 부분이 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가?
더군다나,
그대의 삶을 어느 누가 심판할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는가?
아직도,
그대의 몸속에는 태어나기 전(前)부터 낙인 찍힌,
씻지 못할 원죄(原罪)가 들어있다!고, 그렇게 믿고 있는가?
우리들의 삶이라는 것은,
그 어떤 종교단체에서 정해놓은 敎理(교리)대로 사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태어나서, 그 무슨 용도(用途)대로 살다가, 죽어가는 것이 아니다.
삶 자체에는 아무런 目的(목적)이 없다!
삶에는 “정해진 目的”이라는 것이 있을 수 조차도 없다!
오로지, 목적用 도구用으로 만들어진 공구(工具), 도구(道具), 기계 따위나
용도와 목적이 정(定)해져 있을 뿐이다!
그렇다! 사람은 道具(도구)가 아니다.
따라서… 그 어떤 종교단체에서 정해놓은 기준이나, 교리(敎理)가,
비록, 그럴 듯하게 보일지라도…
그런 기준, 그런 교리는,
그 종교단체 내(內)에서 통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지나친 것일 뿐이다!
그대들의 이해력을 도와주기 위하여, 例(예)를 들어 보기로 할까?
축구의 규칙은, 축구의 경기 중(中)에만 그 가치와 효력이 있을 뿐이다.
마찬가지로,
야구의 규칙, 농구의 규칙, 권투의 규칙 등등의 모든 규칙은,
그 경기장 밖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예수교도들이 자랑스럽게 여기는 이야기 중(中)의 하나에…
마태오(21:19)와 마르코(11:14)가 있다.
예수가 배가 고픈데, 무화과 나무에서, 열매가 열렸는지 찾아 보았더니,
열매가 열리지 않았다.
그랬더니… 예수가 그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고, 심판하여, 죽게 하였다.
예수교도들은, 그런 예수의 저주와 심판 조차도,
위대한 ‘초능력의 연출 행위’ 처럼 생각하고 있으며…
오히려, 그와같은 만행을 자랑스럽게까지, 여기고 있는데…
참으로, 한심하고 부끄러운 일일 뿐이다!
(인간인 예수가 自然을 심판 할 수 있다고?)
다시 한번 더 이야기 하건데…
자연(自然)은, 종교단체의 敎理(교리)대로 있는 것도 아니고,
종교단체의 교리를 따라서 흘러 가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
자연(自然)은,
그러한 교리(敎理)라고 하는 것이 생기기 이전부터 있어 온 것이다.
다시 말해서, 自然은 종교단체를 위하여(For)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예수가 행하였다는 그런 식의 ‘초능력(?)의 연출행위’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고…
또한, 아무런 의미도 부여하지 않고 있는 사람이기에…
예수가 그 무화과 나무를 심판하고, 저주해서, 말려 죽이기 전(前)에,
그가 이성(理性)이 있는 자(者)라면…
그 나무에 열매가 열리지 못하게 된 원인을,
어느 정도나마, 찾아 보았어야만 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 보는 것일 뿐이다!
그렇다!
그 보잘 것 없는 무화과 나무나 말려 죽이는 짓을 하기 前(전)에…
최소한
「아직 시기가 이르지 않은가?
(실제로, 시기도 일러서 그 때는 무화과 철이 아니었다.)
그 나무가 다른 나무의 그늘에 가려져 있어서,
햇빛을 제대로 받지 못해서 그런가?
길가에 서있는 나무가 되어서, 사람들이 건드려서 그런가?
토양이 나빠서 그런가? 비료는 제대로 주었는가?
수분은 충분 했었나? 나무에 병이 있었나?
나무에 벌레는 없었는가?」등등을…
살펴 보았어야만 되지 않을까?
어떻게 해서…
그 무화과 나무의 운명을,
오직 ‘자기의 기준 (예수의 배고픔)’ 에만 두어야만 했을까나?
왜? 모든 자연(自然)이, 예수를 위하여(For) 있어야만 한단 말인가?
사람이란, 단지, 자연의 일부분일 뿐인데…
그러한 사람이, 어떻게, 자연을 심판할 수 있단 말인가?
[만약에 말이다…
그 예수에게 ‘超能力(초능력)’ 이라는 것이 정말로 있었다면?
그리고, 예수에게 ‘이웃을 생각하는 마음’이 조금이나마 있었다면?
그 황막한 사막 위에서 아주 궁색하고 비천한 생활을 하고 있는
‘자기의 이웃들’을 위하여…
그 황막한 사막을 沃土(옥토)로 변하게 하였어야만 되는 것이 아닌가?]
마찬가지 이다.
사람은, 그 어떤 종교의 敎理(교리)를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삶이라는 것은, 자기의 행복을 찾아서,
한 평생을 흘러가는 것이기에,
‘善과 惡’ 이라는 것이 함께 섞여서 이루어지는 것이지…
선(善)과 악(惡)이, 그 무슨 기찻길 처럼, 평행선을 이루면서,
따로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善과 惡이라는 것이 서로 교차되듯이…
기쁨과 슬픔, 웃음과 눈물, 쾌감과 고통, 사랑과 미움 등등이…
늘, 끊임없이, 얽히고 설키고 또한 풀리면서…
삶의 旅程(여정)을 이루어 나가는 것일 뿐이다!
그것은, 마치, 빗방울이 하늘에서 떨어져,
그들 나름대로의 마지막 도착지에 이르게 되기까지는…
높은 곳, 낮은 곳, 추운 곳, 더운 곳, 더러운 곳, 깨끗한 곳,
급한 곳과 느린 지점을, 골고루, 모두 다, 거치면서,
수 천 마일의 먼거리를 거쳐서 바다에 이르게 되듯이…
사람의 삶도, 善과 惡, 기쁨과 슬픔을 모두 다 거치지만…
결국에는, 마지막 도착지에 도달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인간들의 삶, 그리고 인생을 통한 모든 노력은,
이렇게 저렇게 ‘자기 자신의 행복’을 찾는 것일 뿐이다!
자기 자신의 행복을,
「자기의 능력과 지식 內에서, 제 몸에 맞게, 찾다 보니까…」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큰 잘못으로도 보이고,
씻지 못할 실수로도 보여 질 수는 있으나…
그것들은, 모두 다, ‘한때의 물거품’일 뿐이다.
그러한 ‘한때의 물거품’을, 심판하고 있다!는
‘종교단체에서 내세우는 신(神)’을
그대들은 까닭없이 두려워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두려운 신(神)’ 그것은 바로 종교의 산물이다!
나는,
그대들이, 과연, 어떤 종류의 신(神)을 믿고 있는지? 모르겠으나…
제발, 그 교활한 발상에서 나온
‘신의 속성(屬性)’ 만큼은 피해 주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이왕, 신(神)을 믿으려면… 굳이 神을 믿고 싶다면…
삶의 원동력, 삶 자체의 근원, 그 Creativity(창조력) 자체를,
믿어보는 것이 어떨까?
그렇다!
모든 것은,
그대 자신의 지식과 경험과 삶속에서 얻어지는 모든 지혜를 통하여,
그대 자신이 결정하는 것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대는, 아직도, 그리고 앞으로도,
하느님, 神, 야훼, 알라, 예수 또는 어느 누군가가,
그대의 삶을 심판할 수 있다고 믿고 있는가?
[“이상봉의 “예수는 바로 이런 사람, Pp. 14-19” 에서]
Sang Bong Lee, Ph. D,
Dr. Lee’s Closing Arguments,
Dr. Lee’s Lessons: Discovering Your Nature.
* All rights reserved and copyrighted
(무단 복제 사용을 금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