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용(中庸) • 중도(中道)
~ 이상봉 / 철학박사
중용(中庸)과 중도(中道)는, 같은 중(中) 字를 사용하고 있으나…
두 단어는, 서로 서로, 다른 의미의 單語(단어)이기도 하지만,
또한 사용되는 용법도 서로 다른 用語(용어)일 뿐이다!
그러니, 그 用語의 차이점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할까?
우선,
중용(中庸)은 공자(孔子)의 논어(論語), 옹야(雍也) 제27장,
子曰:「中庸之為德也,其至矣乎! 民鮮久矣!
자왈: 중용지위덕야, 기지의호. 민선구의.」에 나오는 말이다.
“중용은 바로 덕(德)이며, 그 값은 지극하고 극치하다.
사람들이 이를 소홀히 한 지 너무나 오래다.” 라는, 의미다.
中庸(중용)은 “지나치거나 치우치지 않은 것”이라는 뜻인데…
자고(自古)로, 한국 사람들은, 孔子를 숭배하고, 공자 왈(孔子曰) 하면서,
論語에 나오는 어휘나 구절들을, 자주, 인용하고 사용하다 보니…
中庸(중용)이라는 단어도 그만치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이다.
하지만, 中庸(중용)이라는 단어는,
論語 속에, 이곳, 한 군데에만 나타나 있을 뿐이다!
[그런데, 주자(朱子)가 예기 中의 1편을 뽑아서,
‘논어, 맹자, 대학, 중용’을 四書(4서)라고 하여, 유교 경전의 하나로 추렸다.
그 후로, 中庸은 書目(서목)인 동시에,
또한 유교의 가장 중요한 德目(덕목)으로 꼽히고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토록 중요한 德目으로 간주되고 있는 그 中庸이,
전혀 통할 수 없는 경우가 있으니…
그러한 경우를, 내가 이 글 속에서, 설명을 하기는 해야만 되겠다!]
그 반면에,
中道(중도)라는 단어는,
“두 극단을 떠나서, 어느 한 편에 치우치지 않는 공명한 길”
이라는 의미이지만…
이 단어는, 불교(佛敎)의 교리에서는,
1) 有나 空에 치우치지 않는 절대한 진실의 도리.
2) 고뇌(苦惱)의 양편을 떠난 올바른 행법(行法)이라는 의미로
쓰이고 있는 불교 用語(용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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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용과 중도가 쓰이고 있는 용법을,
좀 더, 분석적으로 구분하여 보아야만…
그 두 가지의 차이점을,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게 되겠으니…
지금부터, 그것에 대한 차이점을 짚어보기로 할까?
만약에, 두 가지 中에서,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만 될 경우가 있게 되었을 때에-
즉, 서로 상반(相反)되는 경우를 만나게 되었을 때에-
어느 쪽을 선택하고, 어느 쪽을 버려야 되나? 하는,
그런 경우가 생겼을 때를 놓고서…
한번, 깊이 생각해 보기로 할까?
우리가, 흔히, “서로 相反되는 경우”라고 하는 것이…
단 한 가지의 경우만 있는 것이 아니고…
다음과 같이, 두 가지의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즉, “서로, 대립되고 상반되는 경우”가…
1) “상대적인 경우- 비교의 경우”와
2) “서로 모순된 경우- 반대 개념의 경우”가 있다!는 사실이다.
1) 상대적인 경우의 대립- 비교 개념의 대립-이라는 것은…
“많다 / 적다” “크다 / 작다” “높다 / 낮다” “두껍다 / 얇다” 등등처럼…
서로 간의 비교에서 나온 것으로…
이러한 경우에는, 그 중간 지점에,
중간치(中間値)에 해당되는 수치나 지점이 있을 수가 있기에…
그 중간치에 해당되는 것- 중간이나 중간치-를 선택할 수가 있기에…
이러한 경우의 선택을, 中庸(중용)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즉, “크지도 않고, 작지도 않고”, “많지도 않고, 적지도 않고” 하는 式의
“가장 적당한 것- 가장 적절한 것-에 해당되는 것을 택한다!”는 것을,
소위 中庸(중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 그런데…
이러한 중간지점이나 중간치(中間値)가 있을 수 조차도 없는 경우-
즉, 비교에서 나온 상대적인 대립의 구조-가 아닌 경우가 있으니…
바로 다음과 같은 경우다.
즉,
“서로 반대되는 개념의 경우- 서로 모순되는 개념의 경우”의
대립된 구조에는,
중간지점- 중간치- 라는 것이, 아예, 있을 수 조차도 없다!는 사실이다.
그대들의 이해를 도와주기 위하여… 좀 더 쉽게 설명을 하여볼까?
“있다 / 없다” “神이 있다 / 神이 없다” “옳다 / 그르다”
“같다 / 다르다” 라는, 경우처럼…
서로 모순되고, 서로 반대되는 개념에서 나온 대립의 경우에는…
그들 사이에, 중간지점이나 中間値(중간치)라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
그렇다!
“있다” 와 “없다”의 경우에, 그 중간지점이라는 것이 있을 수가 있는가?
즉,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式(식)의 중간지점이라는 것은, 아예, 있을 수가 없다!
따라서,
이러한 경우에는, 中間値(중간치)라는 것이 아예 없으니…
이러한 구조에서는…
소위 “中庸(중용)”이라는 단어가 있을 수도 없고,
또한 사용할 수 조차도 없는 것이다!
하긴, 이러한 구조에서는,
中道(중도)네, 中道 路線(중도 노선)이네, 하는 용어도,
사용할 수가 없는 것은 마찬가지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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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러한 경우에…
이러한 난처한 問題와 이러한 모순(矛盾)을 설명하고 해결한답시고,
석가모니는, 이렇게 가르쳤으니…
“이러한 반대의 개념에서 나온… 서로 대립된 구조는…
무명(無明)에서 비롯된 사견(邪見)에서 시작된 것일 뿐이기에…
어느 하나를 선택하지 말고, 둘 다, 버려야만 된다!” 라고, 하였다!
그러니까…
석가모니의 가르침은,
“대립된 모순의 명제- 두 가지 견해-를, 모두 다 떠나서…
즉, 두 가지를, 모두 다, 버린 상태에서 수행을 하면…
열반에 도달하게 된다!”라는 것이다.
쉬운 例(예)를 들어서 설명을 하면…
강물을 따라서 흘러가는 뗏목을 보면,
이쪽 강기슭에도, 또한 저쪽 강기슭에도, 걸리거나 멈추지 않고서…
강(江)의 중간 부분을 따라서만 흘러가게 되면,
마침내 바다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가 이야기 하는 中道(중도)란,
바로, “江의 양쪽을 벗어난 곳-
강기슭(서로 대립되고 상반된 모순)을 벗어난 곳”-을 일컫는 것이다.
강변이라는 것은, 서로 대립되고 모순된 것으로…
어차피, 서로 서로, 만날 수가 없도록 되어 있으니…
그 강변을 벗어난 곳- 강의 중간 부분- 을,
中道(중도)라고, 갈파한 것이다.
그렇다! 교리 上으로는 그렇게 설명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쯤에서… 내 생각을 하나 첨부하여 놓으면…
강물이라는 것이, 사실상, 강변(강기슭)을 버릴 수도 없고,
또한 강변을 떠날 수도 없지만…
혹시, 아주 짧은 기간이라면,
양쪽 강변을 피하여- 또는 소위 그 娑婆世界(사바세계)를 떠나서-
어느 정도까지는 갈 수도 있겠지만서도…
인생이라는 긴 旅程(여정)에서, 어떻게, 양쪽 강변을 모두 다 피하여,
오직, 中道(중도)로만 갈 수가 있단 말인가?
도대체, 양쪽의 강변을 피한 그 中道의 뗏목 위에서,
과연, 얼마나 버티어 낼 수 있단 말인가?
도대체, 生計(생계)는 어떻게 꾸려가며, 生存(생존)은 어떻게 하란 말인가? 에효!
그대! 그대 같으면, 그것이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유교(儒敎)든, 불교(佛敎)든, 모든 종교라는 것이,
나하고는 無關(무관)한 것이지만서도…
나로서는, 그러한 敎理(교리)네 가르침이네 하는 것 뿐만이 아니라,
그러한 用語(용어) 자체도 별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렇다!
그대나 나나, 生計(생계)를 꾸려나가기 위하여…
中庸(중용)도, 中道(중도)도, 그리고 그토록 대단한 예의범절이라는 것도,
어쩔 수 없이, 때때로, 멀리할 수 밖에 없게 되는 것이 아니던가?
그렇지 않은가? 내 말이 틀렸는가?]
아무튼,
漢字語(한자어)로, 좀 더, 명확한 의미의 단어를 찾아서 쓰고 싶다면…
중정(中正)이라는 단어는 어떨까나?
하긴, Perfect(완전한) 이라는 상태가 이 세상에 있을 수가 없듯이…
中正(중정)이라는 상태도, 어차피, 이 세상에 있을 수가 없겠지만서도!
Do not make anyone your ideal
Do not make anyone your ideal.
Otherwise you will start following someone.
You are not to imitate anyone,
Then you are to discover yourself.
When you are acting as someone else,
You can never feel any satisfaction!
You can be in bliss only where you are authentically yourself.
~Sang Bong Lee, Ph.D.,
Dr. Lee’s Closing Arguments,
Dr. Lee’s Lessons: Discovering Your Nature,
Dr. Lee’s Iconoclasm.
Dr. Lee’s an effable and ineffa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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