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항상 기뻐할 수’ 있는가? “항상 기뻐하십시오, 늘 기도하십시오.”

Be joyful always (사진)

어떻게? ‘항상 기뻐할 수’ 있는가?
“항상 기뻐하십시오, 늘 기도하십시오.”

~ 이상봉 / 철학박사, 在美 철학자

“항상 기뻐하십시오. 늘 기도하십시오.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여러분에게 보여 주신
하느님의 뜻입니다. (데살로니카 5:16-18)”

[이것은, Pauline epistle (바오로의 서간)으로,
바오로(Paul)가 Thessalonica 교회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다.]

위의 구절은,
예수敎(Christianity)에서는, 아주, “중요한 가르침”으로-
그렇게, 크게, 내세우고 있는 가르침(?) 또는 指針(?)으로-
예수敎徒(교도)의 집에 가면, 액자 속에 넣어서,
걸어 놓고 있는 것을, 흔히, 보게 되는 句節(구절)이다.

그토록, 대단히 중요한 가르침으로 떠받들고 있기에,
바로, 그런 사람들에게,
내가, 아주 진지하게, 묻겠노니…
자기, 스스로에게, 솔직하게, 대답해 보도록 하시라!

“어떻게? ‘항상 기뻐할 수’ 있는가?”

그대!
그대는 ‘항상 기뻐할 수 있다!’고, 정말로, 그렇게, 믿고 있는가?
그대!
그대는 ‘그것이 가능하다!’고, 정말로, 그렇게 믿고 있기에…
그것을, 실천 하려고, 努力을 하고 있는 사람인가?
그리고, 노력을 해서…
그 무슨 ‘노력의 결과’ 라고, 실제로, 얻은 것이 있는가?

生命(생명)이라는 것을 지니고 있는 모든 삶에는,
슬픔이라는 것이 있을 수 밖에 없다!
그렇다!
“슬픔이라는 것이 없는” 그런 삶(Life)은 있을 수도 없고,
또한 있지도 않다!

한 마디로 해서…
기쁨과 슬픔이라는 것은, 銅錢(동전)의 앞면과 뒷면과 같은 것이다.
이 세상에, 한쪽 面(면)만 있는 동전이라는 것은 있을 수도 없고,
또한 있지도 않다!

그 뿐만이 아니라…
우리는, 슬픔과 기쁨을 동시에 느낄 수도 있다!
그와 같이, 슬픔과 기쁨은, 우리와 결코 떨어질 수 없는 것이다!

그대!
그대는 “기쁨의 눈물(Tears of Joy)”이라는 소리를,
들어 본 적도 없고…
그런 눈물을 經驗(경험)해 본 적도 없단 말인가?

그런데…
어떻게? “항상, 기뻐할 수 있단 말인가?”

엄연히, 이 세상살이가 그렇고,
또한, 우리의 삶이 그러할진대…

바오로(Paul)라는 使徒(사도)는,
어떻게? “항상 기뻐하라!”고,
“(슬픔은 느끼지 말고…) 항상 기뻐만 하라!”고…
그런 式의 强要(강요)나 命令(명령)을 내릴 정도의
정신과 信心(신심, faith)을 지니고서…
같은 敎人(교인)들에게 편지를 보낼 수 있었을까?

그리고,
기쁨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delight, gaiety, bliss, pleasant state…?)

그리고,
슬픔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anguish, grief, regret, woe, sadness,
deep distress, unhappy, unpleasant state, pain…?)

그리고,
슬픔이나 苦痛(고통)이 없이,
어떻게, 成長(성장)을 할 수가 있으며,
삶(Life)을 유지해 나갈 수가 있단 말인가?
(Sorrow and Pain are the touchstones of all growth.)

이러한, 여러 가지의 이유 때문에…
내가, 볼 때에는,
이 세상에는, 너무나도 많은
“잘못된 가르침들”이 널려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러한 잘못된 가르침을,
마치, 그 무슨 대단한 가르침이나
또는 名言(명언)이라도 되는 듯이, 높이, 떠받들면서…

盲信的(맹신적)으로, 무조건, 따라서,
살아 가려고 하기 때문에…
그래서, 人間(인간)은,
그렇지 않아도 힘들고 고달픈 삶이,
더욱 더, 不幸(불행)해 지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다!
잘못된 束縛(속박) 속에서,
奴隸(노예)의 신세로, 스스로, 轉落(전락)하여,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그렇게나, 많고도 많은 것이다!
(물론… 실천할 수 있는 그런 能力이 있는 사람이라면?
얼마든지, 그렇게 실천을 하면서, 살아가도록 하시라!)

하지만… 분명한 것이 있으니…
이 글을 읽는 사람들 中에는,
내 말을, 전혀, 받아 들이지 못하거나…
또는, 憤怒(분노)와 鬱憤(울분)에 차서…
이렇게, 묻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위의 가르침이 ‘어째서 잘못된 가르침’ 인가?”
“‘그 무엇이 잘못된 것’ 인지를… 정확하게 指摘을 하여 보시오!”

라고, 대들 사람들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이것은,
단지, 나의 독백(獨白)에 해당되는 말이 되겠지만…
이 기회에, 덧 붙여 놓으면…

나는, 그 어떤 宗敎에 ‘미친 사람들’이나,
자기의 종교를 편들기 위하여,
“무대뽀로 대들고 있는 그런 사람들’을 念頭에 두고서…
글을 쓰고 있는 사람이 아니다!

나는,
보편타당성(普遍妥當性)과 불편부당(不偏不黨, Impartiality)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나는,
보편타당성(普遍妥當性)과 불편부당(不偏不黨)에서 크게 벗어나고,
빗나간 宗敎的인 敎理나 가르침에
커다란 疑問(의문)이나 疑懼心(의구심)을, 이미, 품고 있거나…
또는, 그러한 종교적인 가르침을 전혀 믿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을 위하여…
이런 類의 글을 쓰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바로 그런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약간의 確信(확신)이나마, 보태 주고 싶은 생각에서…
이런 글을 쓰고 있는 것일 뿐이다!]

자! 그에 대한, 나의 대답은, 이렇다!

“기쁨이나 슬픔은,
우리(사람)의 의지(Will)로, 조종(Control)이 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意志나 努力으로 ‘操縱(조종)이 될 수 없는 것’을,
마치, 그 누구든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조종이 될 수 있는 것’ 처럼, 그렇게 취급하여…
“항상 기뻐하십시오!”라고, 명령을 내리는 것은,
크게, 잘못된 것이다!

그렇다!
努力(노력)을 해도 되지 않는 것을-
다시 말해서, 인간 능력의 限界(한계) 밖에 있는 것을-
도대체, 어떻게, Control(컨트롤) 할 수 있단 말인가?

아니? 어떤 놈은 기뻐할 줄 몰라서…
그래서, 슬퍼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 어떤 놈은 고통스럽고 슬퍼하는 것이 즐겁고 좋아서…
그래서, 슬퍼하고 있는 것인가?

그리고,
다음 句節(구절)만 해도 그렇다!

“Pray continually! (늘 기도하십시오!)”라는 말의 의미는…
“Without interruption, constantly, again and again, always,
All the time, The entire time, repeatedly, perpetually,
방해되거나 전혀 멈춤이 없이,
영속적으로, 계속해서, 늘 기도를 하라!”

라는 소리다.

그래서,
한국 속담(俗談)에 있는 “노는 입에 염불”이라는 것과는,
그 次元(차원)이 전혀 다른 명령이다!

[그렇지 않아도…
혹시나, 或者(혹자) 中에는, “노는 입에 염불”이라는 속담을
들먹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렇게, 설명을 하는 것이다.]

즉, “노는 입에 염불”이라는 말은,
“그냥 노는 입으로 있느니…
입이 놀고 있으니… 念佛이라도 하면 어떤가?
(노는 것 보다는 낫지 않은가?)”
라는 의미이니까…

이 두 가지는, 서로, 비교가 될 수 조차도 없는 것으로…
전자(前者)는,
전혀, 다른 차원의 至嚴(지엄)한 명령에 해당되는 것이라는 소리다!

그대! 그대는, 과연,
“Pray Contunually!
(방해되거나 전혀 멈춤이 없이,
영속적으로, 계속해서, 늘 기도를 하라!)”
를, 실천 할 수 있는가?

그대!
그대, 자신에게, 스스로, 대답하여 보도록 하시라!

~Sang Bong Lee, Ph.D.,
Dr. Sang Lee’s Iconoclasm,
Sang’s Discovering Your Nature,
Dr. Sang Lee’s Closing Arguments,
Dr. Lee’s an effable and ineffable.
All rights reserved and copyrighted.
(무단복제사용을 금함)

Leave a Reply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