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스쿠니 ㅡ 지루하고 길다란 리뷰
BY 푸나무 ON 3. 30, 2011
‘새로움’은예술의속성중에서큰부분을차지한다.
접하기쉬우면서도문화적으로풍성한만족감을주는영화예술도마찬가지다.
새로운대상과새로운소재새로운스토리와새로운결말을찾는것이그리녹녹하지는않다는것이다..
하여익숙한것들의비틀기가시작되고
성스러운것에서조롱거리를찾아내며
진지함에대한경멸과무시는익숙한포맷이되었다.
잔혹하게사람을죽이는방법은범법자들의텍스트가되기도하며
버젓한포르노가영화라는이름으로포장되어사람들의시선을끌고있다.
그러나이런제증상들역시금방익숙해지고단조로워질수밖에없다.
도요토미에게다도를가르쳤던일본의다성(茶聖)센리쿠는
자기집의나팔꽃이아름답다는이야기를했다.
도요토미가센리쿠의집을찾았을때,
나팔꽃은꽃병에꽂힌한송이뿐이었다.
히데요시의황금다실에서마시는차한잔의맛과나팔꽃한송이앞에두고마시는차한잔의맛은
어떻게비교해야할까?
그만족도는?
그풍미는?
평생을화려함의극치에서살았던솔로몬의영광이들에핀한송이백합화만도못하다는비유를체감하기란
현대인에게는매우난해한대목일것이다.
그렇다면우리에게아주익숙한동화치르치르와미치르의파랑새를기억하면서
가능하다면일단의함의ㅡ
모든삶의의미와가치,즐거움행복은그대상에있지않고대상을바라보는나라는주체에있다는ㅡ
를견지하며다큐멘터리야스쿠니를바라보도록하자.
야스쿠니신사는천황을위해죽은약250만명의사람들의이름과출신,
그리고죽은날짜와장소가적힌위패를지닌일본에서가장큰신사이다.
매년8월15일이면야스쿠니신사앞은
과거와현재뿐아니라미래까지혼재된역사의소용돌이가휘몰아치곤한다.
리잉감독은십여년의짧지않는세월동안야스쿠니신사앞에서벌어지는일들을관망하듯조망해낸다.
자신의의견을개진하거나정치적인어떤의도도표현하지않은채
그저많은사람들의이야기를가만히서서듣고바라볼뿐이다.
얼핏흔들리는카메라워크는답답할정도로단순하고정직하다
전형적인마초이즘에젖어있는남자셋은대영박물관이야기를하며
그들은큰해적이고일본은아주작은해적일뿐이라고호탕하게말한다..
두여인도기억속에서죽은형제와어머니를그리며고이즈미의신사참배는옳다고소곤거린다.
누군가는난징대학살,종군위안부,야스쿠니(아마야스쿠니참배반대세력을말하는듯)가
일본을위협하는새로운3개의핵이라고도말한다.
대다수의일본인들은그렇게확신에차있다.
그러나야스쿠니신사앞에서도소수의정의는존재한다.
식을행하는경직된다수앞에서젊은이셋은정의를외치다가피투성이가된다.
대만의원주민유족대표는명징한목소리로묻는다.
당신이라면당신의가족이원치않는다른나라전쟁터에가서죽었는데그곳에그대로두겠느냐고,
야스쿠니신사에는대만사람들은2만8천명,
한국사람들은2만2천명정도가유족의동의없이합사되어있다고한다.
유족들의반환요구에신사쪽은
지금은모르지만죽을때는일본인이었다.
라고한결같이대답한다고한다.
내부비판자인어느승려는군복을입은아버지의영정을절의벽에걸어두고있다.
그의아버지는당시스님이었으나일본이패전기미를보이던1943년징집되어전쟁터로끌려갔다.
그젊은스님은살생의현장에있어야한다는사실을고통스러워했고
그의아들은국가가종교인까지징병하는군국주의에기반을둔통치를비판한다.
일본의비열한한단면을나타내는데이보다더한예는있을수없다며
아들주지는덧붙여말한다.
훈장을주며그훈장과칭송으로가족을잃은슬픔을풀수도없게만든다고,
<다큐멘터리든픽션이든,핵심은우리가엄청난거짓말을하고있다는것이다.
영화예술이란거짓을말하고그것을믿게만드는것이다.(략)
중요한것은일련의거짓을사용하여더큰진실에도달하는것이다.>
이란의감독압바스키아로스타미(AbbasKiastrostami)의말은
영화의단면을정확하게직시한말이다.
키아로스타미의말처럼(그의의도와는혹다른방향일지라도)
야스쿠니는진실이라고포장한거짓된사람들의이야기를사용하여커다란진실에이르게한영화이다.
야스쿠니는진실을외면하는수많은사람을보여준다.
믿고자하는사실을진실이라고외치는사람,
진실은불편하고거짓이편해서진실로믿어버리는사람,
거짓인줄알면서도진실이라고외치는사람,
맹목도있을것이며애국심으로위장된거짓도있고다수라는태풍속에갇힌사람도있을것이다.
그러나진실조차자리하기어려울진대진리는어떠할까,
투명한진실조차자신의삶에합하지않다는이유로거침없이버리는데창조의섭리와구원,
그리고미래를저들이깨달아알것인가,
야스쿠니신사앞의무수한사람들은갈바를몰라여기저기헤매는군중이다.
일련의거짓을사용해더큰진실에도달한다는압바스키아로스타미의말은지극히성서적이다.
이세상에의인은없다하나도없다는말씀을정확하게관통한다.
다만우리는의인으로인정받을뿐이다.커다란진실=진리에도달할때,
이영화의실제주인공은90살의야스쿠니도를만든장인가리야나오하루이다.
주인공가리야나오하루의공간은하염없이정적이다.
칼을만드는대장간임에도불구하고타오르는불은오히려정적을강조해준다.
아마도틀림없이그가수십년동안해왔을
작은병에나뭇가지를씻어담을때들리는수돗물소리조차적막을더해준다.
그는소란스러운세상과는벼리된존재인듯보이고
잘늙은노인들이그러하듯
인자해보이며어느순간아이처럼천진해보이기도한다.
감독은가리야나오하루에게야스쿠니도의정신과동아시아전쟁에서의검의역할에대해질문하지만,
검에대한이야기에는대답하고즐거운듯말하면서도
그검이사용된대목에서는깊은침묵으로일관한다.
참을성많은감독역시그의침묵을길게응시한다.
그제서야관객은그침묵도답이라는것을알게된다.
그리고침묵의대답이얼마나두둑한뱃장의소산이며부끄러움을처리하는,
진실을외면하는약삭빠른처신이라는것도느끼게된다.
그가만든칼은난징대학살당시두일본인장교의포로100명베기경쟁시합에동원된바로그야스쿠니도다.1
백명을베고일백다섯명을베고….
사람의목숨을짚단처럼베는게임을했던시절,사람을많이벨수록
위대해지는칼을든군인들의묵은사진들이주는섬뜩함이란….
루스베네딕트가쓴일본문화서(文化書)<국화와칼>은
모순적인일본인의성품을한마디로표현한제목이다.
일본인은사나우면서도얌전하고섬세한미감과는달리냉혹하며군국적이나탐미적이라고했다.
이이중적인모순을손에는아름다운국화,허리에는차가운칼로표현해냈던것이다.
무엇보다일본인은죄나악에대한개념이일반의정서와배치된다.
가령성적쾌락은자연스러운것이므로죄가아니라고생각한다.
죄나악을극복하거나피해야할것으로여긴다기보다는
상황에따라적응하고그적응에따른일이므로죄에의해평가받지않아도문제가없다고여긴다.
어떤음악을들으세요?
야스쿠니도의장인이아주오래된테이프를튼다..
노래가아닌천황의목소리가그곳에서흘러나온다.
천황이지었던시와함께.
그는진지하고소박한모습으로아주오래된천황의목소리를아름다운찬양처럼경청한다.
칼을벼리는그의소망은명검을만드는것이다.
그러나그는.
보이는칼만이아니라여전히보이지않는칼을만들어내고있었다.
야스쿠니의한획을담당하고있는고이즈미는멋진수사력을지닌사람이었다.
신사참배는그저‘마음의문제’라며
전몰영령앞에서다시는이런전쟁이없어야겠다고다짐하는문제를
왜일본인이혹은외국인이왈가왈부하는가,
당당하게묻는다.
그의논리는인간적이며매력적이고여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