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에서 쓴 편지

길위에서쓴편지

도서관에서책반납일이내일이라는알림문자가왔다.

다섯권빌린책중에서가장마음에드는책인허만하시인의산문집

‘길위에서쓴편지’를다시꺼내든다.

그리고읽는것이아니라여기저기조각품혹은미술품들여다보듯

아니바느질하듯꼼꼼하게들여다본다.

책표지도한참보다가시인의얼굴사진도보다가

스쳐지나갔던‘대적사극락전의기단’이란사진에서한참눈을멈춘다.

돌도오래되면철에녹슬듯이녹이스는걸까?

사진으로봐서는하냥돌녹이라고해도될듯하다.

그오래된돌틈사이에서아주자그마한풀한포기가파랗게솟아나있다.

정말징그럽게도사랑스럽다.

슬그머니한번만져본다.

돌에새겨진커다란꽃도정교하게어여쁘지만

헤엄치는듯한자라의자태는귀엽기이를데없다.

시인은대적사뿐아니라

쌍봉사,여천흥국사에서자라와게를만나곤했다고적고있다.

절의대웅전은

물위에떠있는배라는말을듣고나서야그는석단의게와자라를이해한다.

책도사람비슷하여읽기시작하는순간부터

겁나게좋아지는책이있는가하면

처음엔흐릿하다가읽으면읽을수록‘개미’가있는책이있다.

사실이책,

글씨체도별로마음에안들고편집도왠지엉성한듯,

시인의산문도지극히평범하다.

그래서건방지게이곳저곳을마음가는대로제목내키는대로읽었다.

그러다가풍란향기와겨울숲이란제하의글에서

천상의이야기와조우한다.

여수돌산임포마을에서배를타고한두시간남짓가면

백도라는바위섬이있는데

이섬바위에자생하는풍란이있다고한다.

암벽에붙어있어서손에닿지도않는그난은얼마나향기가강하던지

배가길을잃었을때그향기로길을찾는다고했다.

세상에,

시인은여기에서그치지않고

처마끝을하늘에내어밀고음영의모습을드러내던

향일암을한포기풍란으로인식한다.

나라면그저놀랍고생경한,

그러나우아하기그지없는그런이야기를들으며

아,백도,그절벽위의풍란향기를맡아볼것,정도나메모했을까,

그놀라운사유의확장앞에서겸허해지면서조심스럽게읽어가기시작했다.

그제서야사물을바라보는시인의넘볼수없는깊고그윽한시선들이설핏보이기시작했다.

내눈이옅어서깊음을알아볼수없었던것이다.

절제되고소박한표현들은은일한내적수련의은일한향기였던것이다.

아름다운풍경이해일처럼다가온다할지라도

조용하고평범한언어로그려내는비범함.

아주사소한것들에서도삶과존재의형상을찾아내는오롯함,

깊이를알수없는지성과지식이합쳐진연상과추론의자유함,

옛시에서느끼는정한의폭도놀랍다.

추사의시,실제失題의한대목,

‘우리집매화나무옛다리동쪽에있었는데홍매피어나자백매따라피어났지’.

시인은옛시를이렇게생각한다.

동(同,東)운으로받쳐져있는이구절에서

홍백의빛깔이교차하는아름다움을느낄수있다고,

홍매바라보며백매생각하는아둔한머리로는

홍백이교차하는아름다움을느끼질못하니,

시인의감도가새삼스러울수밖에.

그는봄날아침애처럽게피어나는분홍빛모과꽃을보며

나무가인류에게남은마지막詩라는생각을한다.

(아,이심전심의소름끼침이라니,)

시인이가는길은이제는잊어버리고살던

그러나우리가살았던얼마전의신작로같다.

신작로는말그대로새로만든길이다.

내고향보성에서는조금길이크다싶으면신작로라고불렀다.

사람이나구루마가다니는길이아닌차도다닐만한조금넓은길,

그런길의이름은전부신작로였다.

신작로라하여지금처럼말끔한아스팔트길은아니었다.

차한번지나가면먼지가구름처럼일어나는길,

이제길은매일이다싶이새로생겨나곤해서

래선지오히려신작로는단어조차사라져버리고없다.

그래서나는시인의가는길을‘신작로’라고여겨본다.

이미오래되어묵은길,

그래서사라져가는길,

그러면서도새로운길을예표해주는듯한말그대로新作路.

그는길을가다가아무데서나멈추며작은풀한포기에도시심과상념을어우른다.

자그마한암자에들러서스쳐지나갔던수많은사람들을기억해내고

거의마모되어서이제는흔적조차가뭇한석상앞에서찬란한과거의시간을떠올린다.

사라져가는것들의비의를그는정확하고섬세한시선으로붙잡아서그려낸다.

흘러가는시간조차명징한그의눈앞에서멈추는것같기도하다.

그제서야보니책의편집,가령사진속의사진이랄지,

새롭게변형된사진의빛깔이랄지,

봄매화,불두화의여름,운봉길의가을,풍란의겨울숲등,

네챕터의나눔도안정적이고미려하다.

좋은책은멋진남성보다훨씬더매혹적이다.

*사진(펌)은백도의전경

현재는입도가금지된상태라고함

3 Comments

  1. 보리

    2011년 5월 20일 at 3:16 오전

    좋은책은멋진남성보다훨씬더매혹적이다!

    그럼좋은책을쓴멋진남성은어떨까요?

    하하…
    재미없는보리식농담입니다.
    푸나무님의글산책따라다니다보면
    한국가서도서관옆집하나얻어
    책잔뜩빌려다읽으며살고프네요.
    아!감칠맛나는한국말!
    풍란의향기보다더고혹적인말과글의향기!

       

  2. 푸나무

    2011년 5월 20일 at 4:53 오전

    아,좋은책을쓴멋진남성…..
    로망이네,^^*

    글에도썼지만
    이책은정말설렁거리며읽으면
    아무맛도없는책처럼여겨져요.
    그러나눈이밝으면올벼쌀이되곤하지요.
    씹으면씹을수록고소한맛이우러나오는,

    요즈음은우리나라도도서관엄청나게많이생겼어요.
    동네마다.

    한가한시골
    도서관옆집이라면
    그또한환상이네요.

    우디알렌의환상의그대는
    정말
    환상이면서도환상이아닙디다만,

       

  3. Elliot

    2011년 5월 20일 at 7:56 오후

    좋은책을쓴멋진남성은여전히책보다못합니다.
    왜냐면"좋은책은멋진남성보다훨씬더매혹적이다."란명제땜에.

    그보단멋진남성을담은좋은책이이론적으로최상입니다.
    마치빛의속도보다빠른것이존재할수없는것처럼….
    그걸극복하기위해선앞으론멋진남성보단좋은책같은남성을구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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