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오랜만에 딸과 음악회를 갔다.
서울 시향의 말러 6번<비극적>
명사인 비극이 단순하고 선명한 존재라면
비극적tragic….은 명사를 뛰어넘어 무한한 자유로움을 거느리는 풍성한 단어이다.
한사람의 비극이 아니라
그 어떤 사람의 비극도 될 수 있는
어느 곳의 비극이 아니라
그 어떤 공간의 비극도 될 수 있는,
말러는 아마도 언어에 대단히 섬세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비극적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 있었겠지.
소리에 대한 감각을 익히 알고
그 소리들을 가장 적절한곳에 배치하고
또한 그 소리들을 조율해 낼 수 있으니….
하물며 언어 정도야….싶기도 하다.
모든 예술이 무한을 향해 비상하지만
가장 폭넓은 무한….을 향해
곤의 날개로 날아가는 것이 음악 아닐까,
말러의 <비극적>은
알마의 표현대로라면
음악으로 자신의 미래를 예견하는 예언적 음악이라고 했다.
이곡을 작곡한 후 말러에게 닥친 여러 가지 비극적인 사태들을 가지고
그 시절 예술가들의 뮤즈인 알마….아름답지만
너무 아름다워 신뢰가 가지 않는 여인의 말에 썩 그리 무게를 두고 싶지는 않다.
생로병사야
인생이라는 일엽편주의 항해 중
가장 가깝고 친근한 벗 아니던가,.
언제든 무차별적으로
노크도 없이 나의 마당으로 들어서서 내 방문을 열어제낄 것이니,
그러니 그런 모든 우리네 인생의 비극들을 보며
말러는
인생이 심히도 <비극적>이라는 것을 생각했을 것이다.
사실 말러의 비극적 6번은
비극에 대한 찬가일지도 모른다.
비극이 기쁨이나 행복의 반대편에 서있는 한부분이 아니라
우리네 생을 관통하고 있는
마치 땅같은,
마치 공기 같은,
마치 호흠같기도 한 것,
그래선지 말러의 <비극적>은 연약한 비극이 아니다.
그 비극을 이기려는
전투적인 의도가 강렬하게 포진해 있으며
위기 속에서도 조화로움을 잃지 않는….
사랑을 찬미하는 부드러운 서사와
자연을 응시할 때 다가오는 편안함도 있다.
그럼에도 비극은 여전히 어디엔가 똬리를 틀고 있고
음악은 비상하며 포효하며
마치 안개처럼 우리를 덮씌우면서도
비극에 대한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거두지 않는다.
6번 일 악장은 내 스마트폰 벨소리이기도 하다.
스마트 폰에 말러 곡을 전부 담아놓고 듣지만
음악회에서 듣는 곡들은
마치 넓은 초원 위 야생화 가득한 벌판 위에 서있는 느낌이다.
사진으로만 바라본 몽골…벌판…같다고나 할까,
아주 아주 새로운 느낌.
정마에스트로는 없었지만
청중은 여전히 서울 시향을 사랑하는 듯 만석이었다.
시작점
콘트라바스는 저기 초원 위
정렬해 있는 군대의 맨 앞이다.
적을 향해 돌진…..
두려움은 감추고, 두려움 같은 것은 하나도 없는 것처럼 장대한 전진.
한 시간 30분의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
음악은 아니 오케스트라의 소리는
어디를 향하며
그곳 어디메쯤 누구와 만나는 것일까,
현대 미술이 이제야
개념, 사상, 철학, 사랑….그 무수한 감정들
어쩌면 금방 사라지고 행위까지 작품이 되었다면
음악은 이미 태생부터가
보이지 않는 행위에 대한 찬가였다.
굳이 오래된 교회음악 까지 들추지 않더라도
음악은
존재하나 존재하지 않는 무형의 것이었으니,
그러니 말러의 <비극적>을 듣는다는 것은
비극 앞에 선것이요/.
비극을 바라보는 것이요
비극을 내 것처럼 느끼는 일일 것이다.
왜 문학은 비애, 비극 ,우수 슬픔 고독에만 기인되어 있는가?
어느 문학녀가 한탄했지,
존재의 기원이 별리에 의한 슬픔
창조주와의 것 말고도
생명의 끊이었던 태와의 결별로부터 시작되니
이별도 슬프지만 맨몸으로 맞이하는 낯선 세상은 또 얼마나 차가운가….
그리하여 아이는 온몸으로 울며 새로운 세상을 시작하는 것 아닌가.
4악장은 길다.
1,2,3, 장의 모든 에너지를 사악장에다 함께 담아놓은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비극적>
사악 장에서
이상한 악기가 등장한다.
해머라고 부르는 거대한 나무 망치 절굿돌..떡메..처럼 보이기도 하는
강력하고 둔탁한 소리
세상에, 전혀 음악 같지 않는
거대한 소리
혹은 폭력적으로 느껴지는 몸짓 같은 것….
비극을 예견하는 악기라고 알마는 말했다는데
예견을 떠나
난데없는 어느 순간 갑자기 들이닥치는 비극에 대한 몸체를
나무 망치로 음악 속에서 구현해 낸게 아닐까,
사악장 마지막을 어느 음악 평론가는
비극이 다가왔다!고 했다.
어제 최수열의 마지막은
말러 특유의 스토리가 엿보이는 섬세한 현악…
작지만 선명한 운명의 두드림을 보여주는 북소리….
관악의 장중한 수용…
그리고 모두 한번 쨍!!! 하고야 마는
그리고 아주 여린 끝….그러나 끝이 아닌 끝..
젊은 최수열 장하다.
이친구 아람누리에서도 둬번 봤다.
참나무.
2016년 1월 18일 at 5:57 오후
따님과 음악회라..부러워죽습니다
음악 좋아하는 딸은 멀리 있고
가차이 있는 아들 며느리는 같은 꽈가 아니니
늘 혼자…
지금 갑자기 법구경 한 자락이 떠오르는 이유는…^^
.
그래도 요즘은 현지처를 만나 그런대로 공유하고있지만
최우열 칭찬 많이들 하데요…
정마에스트로 빈자리 잘 채웠다고
위블은 추천 이런 건 없네요
반가워서말이지요
푸나무
2016년 1월 19일 at 8:48 오전
아이고 참 이것 글 올리고 댓글이 수욱 올라오면 좋으련만…
지송해요. 넘 답답하셨겠어요. ㅎㅎ
딸과 취미가 같으니 좋긴 하던걸요.
음악 그림 좋아하고
뮤지컬 싫어하는것 까지 닮았으니 ㅋㅋ
아마 올봄에는 잘되면 둘이 프라하나 한번 가볼까 봐요.
아주 저가 자유여행이요.
집을 여기저기
남들처럼 만들어야 할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