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랜시스 베이컨氏

 

 

 

베이컨

 

 

신영복 선생(아 선생님~ 가신 곳이 평안하시길 기원합니다)은

어디 책에선가 여행을 이렇게 정의했다.

자신의 생각의 틀을 버리는 것….이 여행이라고

조금 진화해보자면 나를 버리고 새로운 것들을 담는 일,

혹은 나아닌 다른 이를 만나서 다름을 닮는 것,

내가 아닌 내가 되는 것,

(이런 생각 속에서 성숙이나 배려…같은 클리셰한 단어들은 왜 생각나는 거지?)

그러니 조금 다른 길로 우회를 해보자 치면

모든 여행은 낯섦과의 조우에서

낯섬과 내가 섞이는 일일 것이다. 아마도,

 

그리하여 전시회 역시 매우 색다른 여행길이라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자주 그러더라,.

그래서 좀 과장해보자면

그림을 보는 것,

즉 인터넷상으로만 보던 작품을 실제로 친견할 때,

거기 전혀 다른 작품이 있다.

기억 속에 남아있던 열 살 때의 초등학교 친구를

50년이 지나 예순에 만나는 기분이 아마도 그럴 것이다.

예술의 전당에서 하는

<피카소에서 프란시스 베이컨까지>는

돈 될만한 그럴듯한 이름을 내건 조야한 전시회…

아닐까…라는 일말의 우려 속에서 입장을 했다.

 

 

대영박물관이라는 거대한 이름을 건 전시회를 본 후라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타이틀은 거대한데

그러니까 포장도 그럴 듯 하고 소재도 좋았지만

바느질이 좀 거칠게 보였다.

작품들은 나름 소소하게 보는 재미가 있었는데 엮어가는 솜씨…

즉 전시 의도나 전시 설명들이 일목요연한가….에서

지나치게 꿰맞춘 듯 자연스럽지가 않더라는것,

마치 이목 삼목이 된 듯 여겨지니

작품에 집중이 덜 가더라는 것,

 

 

그런데 한가람 미술관 삼층

<피카소에서 프란시스 베이컨까지> 입장을 하니

웬걸 입구에서부터 피카소가 늠름하다.

(이 나이 되어보면 늠름하다! 라는 단어 속에 어우러지는 단어가 많다.

아름다움 기개 원숙 세련 당당 정체성까지도)

나중에 도록에서 보니 베네수엘라 국립미술관 컬렉션모음이다.

 

오홋~

특히 피카소의 석판화 황소…..는 무언으로 하는

현대미술에 대한 수준 높은 평론이었다.

칸딘스키의 쾨헬….은 겨우 한 작품이었는데

정적인 풍경화에

그가 붙인 퀘헬을 얹어 생각하니

그러니까 나도 하루 전날 음악당에서 말러를 연주할 때 생각을 했는데

음악당, 음악을 연주하는 그 공간, 그리고 음악가운데서 쓰는 글…..

글속에서 음악이 나타나는 글이 써지면 얼마나 좋을까…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하게 되더라는 것,

풍경화 퀘헬을 지나 몬드리안…..작품도 꽤 많았다.

그리고 샤갈….이

아, 샤갈 좋았다.

맑고 꿈꾸는 듯,

그렇다고 공간에 떠있는 사람들이

허황되이 발을 공중에 붙이는 자가 아니라

오히려 나의 이웃보다 더 다정한, 이웃처럼 여겨졌다.

그의 그림에서 색이,

핑크가 연한 블루와 연한 연두가

분분이 솟아나 나에게로 날아왔다.

엷은 채색이 오히려 그의 그림 속 공간의 문을

아주 자연스레 열어주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나무와 달과 풀들…그림속으로 나는 들어갔다.(아 진짜? 응, 진짜,)

 

 

그리고 한쪽 섹션인 베이컨…..을 만난다.

 

 

해체 철학에서 본다면

정리정돈 혹은 일목요연한 전시는 촌스럽고 구태의연하게 보일 것이다.

그러나 분류와 정돈은 살아가는

삶의 여러 가지 사건들 가운데서 매우 중요한 덕목을 차지한다.

일종의 우선순위라고나 할까,

그렇지 않다면 삶 자체가 새로운 카오스 일수도 있으니까,

 

 

베이컨의 자화상을 보는데

그의 그림이….

그림….이 해체철학에 부합되는 부분이 선명하게 보였다.

그의 왜곡은

서사와 재현을 방지한다는 그의 선은

그가 그린 부드럽고 연한 아플라와 함께

내게는 <슬픈 잃음>처럼 여겨졌다.

 

언니가 머리 수술을 하노라 머릿속 뼈를 절개 냉동해 놓았다가

치료가 된 뒤 다시 그 뼈를 머릿속으로 넣었다.

물론 그동안 언니 머리 한쪽은 움푹 꺼져 있었다.

언니를 볼 때는 그저 가슴이 아파서 감히 그림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는데

베이컨의 초상을 보며 그때 언니 모습이 오버랩 되더라는 것,

 

 

베이컨의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초상화는

실제 움직임을 그린 것이 아니라

폭력이든 자연스러움이든

어떤 힘과 ..그 힘이 팽창을 부르고 수축을 일으키는 어떤 상태를 그린 것인데

들뢰즈는 이 상태를 형상이라고 표현했다.

(책을 읽은 지 좀되어서 정확한지는 자신할수 없음)

물론 베이컨은 머릿속 내부..에서 나오는 생각의 힘,

어떤 에너지로 인해 변형되는

매우 정신적인 존재자 혹은 존재의 형상을 그린 것이다.

 

 

들뢰즈가 자신의 철학을 ….수정난 …으로

아무것도 아니나 존재 자체인 ..

그러면서도 미래를 안고 있는 상태….를

철학의 비유점으로 삼았듯이

그 비유가 매우 생상한 경험론에 기인된 것처럼 내겐 읽혀졌는데

언니의 상황…

매우 현실적인 아픔 상실 고통의 상황도

그런 정신적인 에너지 못지않게

아니 오히려 더욱 사실적인 빙증이 되지 않을까, …

즉 내부의 힘 못지않게 아니 그보다 더 강한 충격으로 다가온 수축의 모습

단순한 왜곡이 아닌

운명의 해머가 갑자기 두들긴 변형의 흔적.

 

그의 ‘세면대를 붙잡고 있는 인물’…

석판화와 유화..가 같이 있었다.

아플라에서 솟아난 형상이 다시 배출구로 빠져 나가려고 하는 인물은

들뢰즈에 따르면

아플라에서 솟아난 형상이 다시 아플라로 용해되는 과정을

담은 것이라고 했는데

그가 세면대를 붙잡고 있는 것은

우선 배설이라는 거대한 욕구ㅡ 욕구가 생명의 존재와도 연결되는

즉 배설하지 않으면 존재하지 못하게 되는 단순한 삶의 철칙을

선명하게 부각시키는 행위가 아닐까,

 

그는 왜 차라리 변기통을 붙잡지 않았을까…

혹시 그의 성적인 취향으로 빚어지는 어떤 이해 탓이 아니었을까,

아니면

화장실 안의 존재….세면대는

즉 배설만이 아닌 어떤 씻음, 청결 속죄에 의한 아플라로의

이행을 의식한 것일까,

 

 

베이컨은  서사를 싫어한다.

그는 삼면화에서 관자들의 서사나 재현을 금하기 위해

원이라는 장치를 사용해 고립시켰으나

나는 그의 삼면화에서 그의 초상화에서 아니 그의 모든 그림에서

서사를 찾아내고 만족했다.

아플라와 형상의 구별이 없다는

즉 시간의 개념이 현재인 크로노스가 아닌

현재과거미래가 모두 연결된 아이온 이라는

개념을 알면서도 여전히 나는 그의 그림에서 나만의 서사를 읽어내고 있었다.

 

가령

‘작품 인체에 대한 탐구ㅡ들뢰즈’.

서사를 싫어하는 베이컨의 그림에 대한

나의 서사는 이렇다.

 

나타남과 사라짐 감각은 매우 순간적이나 몸에 그 여운의 자리를 마련하다.

슬쩍 나타나듯이 슬쩍 사라진다.

몸뿐이 아니라 모든 정신도 그러하다.

사람은 태어나고 죽는다.

그 사실을 아주 선명하게 붉은 화살표로 표시한다.

아플라는 검고 어둡다.

그렇다고 절대 추악하지는 않다.

오히려 단순하면서 신비롭기조차 하다.

아플라에서 생성된 형상에는 머리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또 다른 혹은 같은 아플라로 용해되어가는 형상에는 흐릿한 머리가 보인다.

선명하던 몸 근육은 쇠해진 건가,

그래도 걸어가야 할 길이 있어 다리의 근육은 선명하다.

아 누군가 그의 그림을 액화…라고도 했지.

그는 시간의 개념을 아이언이라 했지만

가운데 선명한, 즉 다른 아플라로 여겨지는 문짝(?)으로 인해

내겐 아주 선명한 크로노스로 보이기도 한다.

 

무엇보다 나를 아주 놀라게 한 것은

즉 인터넷에서 본 기괴한 베이컨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친견한 그의 그림들은

의외로 모두 다 정적이고 아름다웠다.

베이컨의 근원을 나타내는 그림 속 아플라는 거의 모두 단순하고 간결했다.

그리고 그 색조들은 한없이 부드럽고 정적이었다.

그리하여 형상들이 지닌 기괴함…재현이 아닌 낯섬….일그러짐

분홍빛 살과 일그러진 육체임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웠다.

그리하여

그 모든 것들은 어떤 사라짐 ,

소멸에 대한 비애, 처럼 다가왔다.

그가 친 둥그런 원들은 서사를 거부하는 혹은 연결을 거부하는

그저 존재를 완강하게 나타내주는 표현으로 보이기도 했으나

그 역시 벽과 인생이라는 틀 속에 갇힌 우리의 모습처럼 여겨지기도 햇다.

 

뱀다리!!

아 근데 왜 이렇게 재미없는 글을 이렇게 열심히 쓰는 걸까,

나도 나를 잘 모르겠다.

이 재미없는 글이 왜 이렇게 열심히 써지는지,

그리고 나름 재미있는지…ㅎ

혹 읽어주시는 분 감사드리고…

너무 길어서 죄송함돠!

9 Comments

  1. 벤조

    2016년 1월 20일 at 6:15 오후

    다정한 이름들이 뜨면 무작정 반갑지요.
    프란시스 베이컨이 그림을 그렸는지 어쩐지는 잘 모르지만…ㅎㅎ
    언니는 잘 계시는가요?

  2. 참나무.

    2016년 1월 20일 at 8:11 오후

    예당,국박 두루 다니셨군요 저는 아직인데…
    날씨 좀 풀어지면 담주에나 한 번 벼르고 있습니다만…

    아이구 참 제발 아바타 곁에 곧바로 올 수 있게
    프로필 수정 먼저 하시면 얼마나 좋을까요
    오늘처럼 본부에 뜬 날은 모를까
    그냥 찾아오긴 마이 힘들답니다아 plz~~

  3. 푸나무

    2016년 1월 20일 at 9:06 오후

    벤조님 저두 넘 반가워요.
    근데 아직 글 안쓰시는거예요?
    왜요?
    빨리 쓰세욤.
    글스시는 분들이 몇 분 안되는것 같아요. ㅠㅠ

  4. 푸나무

    2016년 1월 20일 at 9:08 오후

    푸로필 수정을 해도 안되는데요?
    어딜 수정 해야 되는건지…ㅋㅋ
    정말 봉사 문고리 잡는것 같아요.
    정말 앞에 뜨지 않으면 찾아갈수가 없어요.
    제 집에는 아직 검색창도 없거든요.

  5. 푸나무

    2016년 1월 20일 at 9:09 오후

    아참 벤조님 언니는 그런대로 집에서는 혼자 지낼수 있답니다.
    밖에 나가려면 누군가의 도움이 있어야 하구요.
    삶의 질이 달라져 버렸어요.

  6. 참나무.

    2016년 1월 20일 at 9:30 오후

    로긴하시면 상위 오른쪽 ‘안녕하세요 푸나무님’
    그 아레 프로필 수정란에 들어가(아바타는 만드셨으니)
    그 아래 ‘사이트’ 빈칸에다 제 경우는
    ———————————-
    http://blogs.chosun.com/kangquilt
    ———————————
    kangquilt대신 푸나무님 원래 아이디(늘소화 영어알파벳?)

    이걸 입력해야 링크가된답니다.

  7. 참나무.

    2016년 1월 20일 at 9:31 오후

  8. 푸나무

    2016년 1월 20일 at 11:21 오후

    친절하신 참나무님…해 봤는데 되나 뵈주세염

  9. 참나무.

    2016년 1월 20일 at 11:32 오후

    OK~~

    예당 얼른 가보고싶군요
    베이컨 작품 보고 언니 연상하신 부분에서 저도 떠오르는 사연 하나 있어요
    예전에 우리집 옆집에 살던 분이 생각났어요
    -‘왜사냐건 웃지요’…월파 김상용선생 며느님
    빙판에 비끄러져 뇌가 함몰한 상태로 맨정신을 잃고
    한달 여 앓으시다 결국 돌아가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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